요즘 바쁜 일이 있으신지, 아니면 이번 한더위가 추석이 지나도록 식지 않아서인지 발걸음이 뜸하셨던 구봉님이 모처럼 오셔서는 제가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이란 소문을 동네방네 다 내버리셨습니다.
제 기분이 막 애매해질려던 찰나, 태양계를 벗어나 우리 은하계를 외롭게 열심히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에 대한 이야기와 ET와의 접촉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구봉님의 글 말미에 제 기분이 확 풀렸습니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제 글 고물상을 뒤졌고, 마침내 먼지 소복한 그 글을 찾아냈습니다.
오래전 제가 상상했던 ET와의 교감.
때마침 열린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16강 올랐던 포르투갈과의 경기.
온 나라를 시뻘겋게 물들이던 그날의 환호와 함성에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판타지 소설의 틀을 빌려 새벽까지 썼던 글.
ET 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ㅎ
<ET 일기>
지구력 2002년 6월 14일
변방 우주. 태양을 중심으로 펼쳐진 태양계 세 번째의 별. 우주에서 가장 영롱하고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
아침부터 그 푸른 별 지구의 한쪽 귀퉁이. 뾰족 튀어나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최근 연일 시끄러웠지만 오늘은 특히 더 심하다.
파장계를 이용해서 눈앞에 그곳의 영상을 펼쳐보았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지구의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연일 시끄러운 걸 보면 분명 또 서로 죽이고 살리고 난리가 났을 거야...
초점을 자동으로 찾아가는 영상이 보여준 곳은 그런데 좀 이상했다. 커다란 범선 모양의 큰 경기장?? 무슨 큰 시합이라도...?
전쟁이 아니란 말이야? 재미없겠는데...
아~ 또 동그란 공을 가지고 노는 시합을 하는구나. 몇 번 본 적이 있는 시합인데 저 지구 생물들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서로 죽이고 싸우고 하다가도 동그란 공을 차고 놀 때 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서로 공 뺏기에만 골몰한다.
그러다가 거미줄 같은 줄을 쳐둔 네모 기둥 속에 그 골을 집어넣으면 서로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모른다.
노이즌가? 오늘 사운드가 왜 이래??
그동안 에너지 보충을 게을리했더니 파장계가 약해졌나...?
그런데 이상하다. 노이즈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네...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노이즈가 아닌가...?
이상하게 반복되는 그 방해파에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어떤 에너지가 느껴진다.
영상이 경기장을 한 바퀴 자동으로 휙~ 돈다.
앗! 모두 붉은색~
아... 노이즈가 저곳에서 비롯되었구나.
온통 붉은색의 옷을 입은 지구 생물들이 바로 그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노이즈를 일으키며 손에는 뭔가를 열심히 리듬에 맞춰 흔들어 댄다.
영상이 자동으로 근접하더니 그 손에 든 것을 보여준다.
빨강과 파랑이 동그란 원 안에서 돌고 있고 그 주변 네 귀퉁이에는 검은 막대기가 세 개씩 그어져 있다. 인쇄기술이 아직 부족한지 중간중간에 끊어진 막대기도 보인다.
갑자기 영상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더니 이곳저곳을 돌아가며 보여준다. 가는 곳마다 온통 빨간색의 무리들...
연신 그 노이즈를 외치며 나에게로 손을 쭉 쭉 내 뻗는다.
두렵다... 겁난다...
다시 경기장.
가만히 보니 빨간색 옷을 입은 선수들을 응원하는 게 아닌가 보다.
이상하다... 그들은 흰 옷 입은 선수들을 응원하는 모양이다.
아... 상대편 옷을 입고 물러가라고 외치는 응원을 하나보다.
나도 한번 따라 해 볼까?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그들처럼 나도 손을 쭉쭉 펼치며 따라 해보았다. 아무도 안 보는데 뭐 어때...
재미있다 헤헤. 한번 더~
근데 가슴 안쪽에서 뭔가 조금씩 우러나오는 이 에너지는 뭐지?
두려움도 공포도 아닌 뭔가 무한한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 같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다.
흰 옷 입은 선수들이 훨씬 빠르다. 앞뒤좌우에서 불현듯 날아들어 공을 채가는 모습이 우리 종족의 잘 훈련된 전사들보다 더욱 날렵해 보인다.
읔! 저럴 수가~!!
빨간 옷 한 선수가 십자걸기 한판으로 멋지게 흰 옷 선수의 다리 하나를 걸어 바닥에 넘어 뜨렸다. 검은 옷을 입은 선수 하나가 달려오더니 그 빨간 옷 입은 친구에게 뭐라고 욕을 하며 빨간 종이 하나를 꺼내서 턱~ 보여준다.
독약 먹을래?
아니... 그만 갈래.
빨간 선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간다.
노이즈가 더 요란해진다.
나도 모르게 그 노이즈 리듬에 맞춰 열심히 몸을 흔들다 보니... 시합을 그만둔다.
아! 반이 끝났구나... 전에도 저랬었어.
그냥 에너지 보충약 하나 먹으면 될 텐데... 왜 시간을 낭비할까?
빨리 다음 반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상한 부호가 하나 떠오른다. 눈 사이에 콧구멍만 두 개인 부호.
0 : 0
또 자동영상이 경기장 밖을 튀어나가 돌아다닌다.
모든 곳이 다 빨갛다. 으아... 지구 생물들이 다 모였나 보다.
이번에는 자동 영상이 이상한 모양을 한 지구 생물 하나를 보여준다. 저런 지구 생물은 본 적이 없는데...
그 생물은 같이 있는 생물들과는 색깔이 달랐다. 목욕을 얼마나 안 했는지 온몸에 검고 붉고 희고 푸른 때가 가득 붙어있다.
분명히 예의라곤 하나도 없는 생물일 거야.
에구... 어디든 저런 생물은 꼭 있다니까...
다시 경기장.
또다시 노이즈가 거세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간 파장계가 고장 날지도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도 따라 하자~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또 빨간 선수 한 명이 흰 선수 뒤에서 발을 걷어찼다. 역시 검은 선수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뭐라고 욕을 하며 노란색과 빨간색 종이 두 개를 꺼내니 빨간 선수들이 달려들어 까만 선수를 에워싸고 겁을 준다. 고집 있어 보이는 까만 선수는 그래도 악착같이 종이를 번쩍 들어 보여준다
빨간 거 먹을래 노란 거 먹을래?
선택도 할 수 있나 보다.
이번에도 그 선수는 안 먹고 그냥 간다.
잠시 후.
흰 선수 하나가 가슴으로 공을 받고 한 선수 뒤로 공을 툭 올려 차 빼더니 거물 있는 곳으로 쌩~ 차 넣는다.
쏘옥... 거물 앞에서 손으로 공을 잡아도 되는 선수 다리 사이로 공이 빠지자 기다렸다는 듯 거미줄이 공을 잡아먹는다.
노이즈가 일순 멎었다. 고장인가...? 갑자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노이즈가 발생했다.
안돼~~~ 파장계 터진다~~~
이렇게 갑자기 부하가 걸리면 파장계 터진단 말이야~~~
근데 파장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노이즈 리듬을 따라 할 때마다 이상하게 내 가슴 안쪽에서 증폭되던 그 에너지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함께 터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 우리 종족 최고의 치욕. 오줌을 쌌다.
얼른 뒷수습을 하다 보니, 엎치락뒤치락하던 시합이 끝나버렸다.
이상한 부호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한쪽 눈이 아래위로 찢어졌다.
1 : 0
빨간 선수들은 여기저기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흰 선수들은 손에 손잡고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배썰매놀이를 한다. 그럴 때마다 노이즈 치수가 최고로 치솟는다.
파장계를 껐다.
이제 오늘의 일을 정리해야지.
지구관찰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1. 지구 생물 중에 빨간 옷을 입은 생물을 보면 가급적 피하라. 지구 최강의 종족이다.
2. 혹 지구 생물과 조우할 경우에는 이렇게 인사하라.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3. 지구 공략은 당분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
4, 그들과 우호선린을 도모하려면 먼저 공 뺏기부터 연습하라.
이기는 것을 대비하여 배썰매도 연습해야 한다.
.
.
근데... 내가 경험한 그 에너지는 도대체 무엇이었지?
우리 종족들에게도 이 기이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노이즈를 전파해야겠다.
한 번만 더 연습하고 잠이나 자자.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때~한민쿡 쿵쾅쾅 쿵쾅!
첫댓글 오모나!
너무 잘쓰신 글이군요
마음자리님은 아주 글을 잘쓰시는군요
기발한 발상도
부러버요~
상상을 즐겨하다보니
글이 좀 웃겨요. ㅎ
ET 일기, 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벌써 22년 전의 월드 컾
실황중개가 전파를 타고...
마음자리님이 대한민국 ! 하고,
응원하는 모습의 실황중개,
0 : 0 (눈 사이에 콧구멍만 두개)
ET는 표현도 잘 하시네요.
16강에서 맞부디친,
포루투갈과의 전투 모습에 감격했습니다.
ET 일기, 아주 잘 읽었습니다.
그날의 감격과 감동을 잊을 사람은 없겠지요? ㅎㅎ
저도 그날 마음이 들떠서 간신히 글로 식혔습니다. ㅎ
붉은 종족, 쿵쾅쾅 쿵쾅! ...
모두 신명이 만든 풍경일 텐데, 그게 외계인들 까지 손을 들게 만드는군요 ^^
마음님 글은 소년이 쓴 것처럼 늘 재미있습니다.
지구촌이 축구로 워낙 시끌벅적하던 때라, ET가 보면 어떨까..? 상상하며 쓴 글이었어요. ㅎ
태양계의 네번째 행성
화성에서 온 남자 이티가 지구별의
월드컵 경기에 몹시 흥미를 느끼는군요.
그 이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호기심 많은 젊은이로
커다란 비행접시 새벽이를 몰고 다니며
미쿡 곳곳을 누비고 있지요.
동트는 새벽 하늘도 찬란하고
여호와나무도 신기하고
들꽃을 비롯한 생명체들이 무한 신비로워서
이티일기는 현재진행형이구요.
미쿡에 사시는 이티님의
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수필방의 제라연사 크게 외치고 갑니다.ㅋㅋ
제라님도
호기심 많은
ET인가 보군요.
마음님도 글도
멋있고,
순수함이 넘쳐나는데,
제라님의 댓글 또한
순수함이 넘쳐납니다.
ㅋㅋㅋ
역시 우리 혜전님 밖에 없어요.
굿밤요.^^
상상을 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 속에 제가 풍덩 뛰어들어
노는 것이 제 일생의 낙이라... ㅎㅎ
암요~ 일기, 오래오래 쓸 작정입니다.
ET 일기.
ET의 마음으로 읽어 봤습니다.ㅎ
붉은 악마들의 이상한 노이즈에
잠시 겁을 먹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에너지를 경험했지요.ㅎ
대한민국~~~~~~
문득 그때가 떠오릅니다.
다시 한번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마음자리 님, 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나라가 나누어져 시끌시끌할 때면
저는 2002년의 그 뜨겁던 여름과
태안반도에 기름이 밀려왔던 그때의
한국을 생각합니다.
너나없이 하나되어 함성을 지르고
힘을 합하던 그 아름다운 때를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샘님, 수필방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카바티나를 능가하는 노이즈 파장계.. 같은 이과
용어가 등장하니 찐문과는 초장부터 깨갱입니다ㅎ
오래전 나도 좋은 글 하나 쓰고싶다 하자 국어
선생님 막내여동생 왈, 사춘기에 책을 읽지 않으면
절대 글을 쓸 수 없다 꾸중했는데 마음자리님의
상상과 창조력은 분명 어린 날의 독서에서 나온 것..
독특한 시각에 ET도 울고 갈 것을 장담하옵는 바~
구봉선배님 덕분에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래전에 쓴 글이 떠올랐습니다. 고맙습니다. ㅎ
ET'일기
내 가슴속에도
에너지파장이
생겨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 소리 그 함성, 대단했지요?
K-Pop 성공 비결도 그때의 그 리듬과
그 함성에 기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ㅎㅎ
상상초월의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마음자리님이 순수하다는 증표입니다. 나같이 세상사에 쪄들고 모든 세상고민 다안고 사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상상력입니다. 2002월드컵같은 한국이 한데 뭉친 시절이 그립습니다. 지금처럼 날마다 싸우는 오합지졸인 우리의 정치지형으로 도저히 넘볼수 없는 그때 그시절입니다.
우리 대한국인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 되었던 참 특별한 경험이었지요.
우리들 속의 그 DNA가 나라 중흥을 위해 크게 발휘되는 날이 오면 얼마나 기쁠런지요.
0 : 0 눈 사이에 콧구멍만 두 개 ㅎㅎ
1 : 0 한쪽 눈이 아래위로 찢어졌다 ㅎㅎㅎ
마음님 동화작가 하셔야겠어요.
펜을 손에 쥐면 조용한 순수를 쓰시고
핸들을 잡으면 길위에 열정을 뿌리시고
팔색조 재주꾼이십니다.
ㅎㅎ 호기심 많고 공상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먼길 오가는 일이 참 즐겁기도 하고요. ㅎ
마음자리님 까까머리 중학생의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셨어요.
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수가 없네요.
이글은 작품입니다.
20년이 넘은 그때의 분위기.감동.경기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스칩니다.
이제껏 읽은 마음자리 오라버님의 주옥 같은 작품 중. 개인 적으로 👍 최고.
ㅎㅎ 칭찬에 익숙하지 못한데,
커쇼님 칭찬에는 동생에게 뭔가 잘해 인정 받은 오빠처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ㅎㅎ
그때의 감동이 잊혀지나했는데 ET의 눈으로 다시 살아났네요.
잘읽고 갑니다.
네.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