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경상북도 영주의 옛 지명) 사람 이수에서는 아버지로서 아픈 손가락이 있었다.
젊은 시절 천인(천인)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들여 낳은 얼자(얼자) 떄문이었다.
조선 역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지만, 양반들의 경우 정상적으로 혼인한 아내외에 따로 첩을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첩은 대체로 양반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첩의 자녀 신분은 양반인 아버지 신분을 따를 수 없었다.
조선시대 신분은 어머니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첩의 자녀를 통칭해서 '서얼(庶孼)'이라 불렀는데, 이는 양인(良人) 신분의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인 신분의 첩이 낳은 '얼자'의 앞 글자를 딴 말이다.
이러니 같은 서출이라 해도, 그 안에서 다시 신분이 갈렸다.
서자는 양인, 얼자는 천인이었다.
양인인 서자는 과거 시험도 칠 수 이었고 일정 정도 사회 활동도 가능했지만, 천인인 얼자는 이마저도 힘들었다.
이수 자신의 신분은 양반이지만 그 자식은 천인이었으니,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이만저만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분제 사화라 해도, 자기 피가 흐르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마음은 대체로 그러했을 터였다.
하다못해 천인 신분이라도 벗어나지게 해야 했다.
1584년 음력 12월24일, 이수는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뜷고 서울을 찾았다.
아들을 보충대에 입역시키기 위해서였다.
1415년 태종에 의해 설치된 보충대는 천인들이 군에 입역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
원래 천인에게 군역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천인들만 입역하는 곳이라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이는 조선 초, 양인과 천인으로 신분을 구분했던 양천제가 비교적 덜 엄격하게 적용될 떄 만들어졌다.
양인인 아버지와 천인인 어머니가 낳은 자녀가, 부모 신분이 모호하여 신분을 확정하기 어려운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의 경우 일정 기간 군에 근무하면 양인으로 속량(贖良)하도록 제도화했는데, 이것이 보충대였다.
그런데 1432년 이후 신분제가 업격하게 적용되었고, 양인과 천인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천인을 속량하기 위해 설치된 보충대가 신분 탈피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게 되자, 그 대상을 엄격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1품 이하의 양반이나 문,무과 출신의 얼자, 왕을 시위했거나 보좌했던 관원의 얼자, 그리고 문벌로 관직에 오른
음직(蔭職) 관원의 노비를 첩으로 들여 낳은 얼자만이 여기에 들 수 있었다.
또한 나이 40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얼자로 하여금 장자를 승계하게 할 경우, 승계 받을 장자 1인만 보충대에 입역해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정확히 어느 조건에 해당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수는 얼자 아들을 보충대에 입역시킬 조건을 갖추었던 듯했다.
문.무과 급제만 해도 대상은 되었으니, 조건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건을 맞추려는 아버지의 노력이었을 터였다.
종 더 나은 아들의 미래를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다행히 보충대 근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실질적인 군사 기능을 하는 곳이 아니므로, 주로 관사에서 잡무를 보거나 심부름하는 게 일의 전부였다.
비록 1000일을 근무해야 했지만, 이를 거치기만 하면 양인이 될 수 있으나 마다할 일은 아니었다. (금난수의 '성재일기')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역시 신분이 얼자라 해서 다 같은 얼자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누구인가에 따라 양인이 될 수 있는 얼자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얼자도 있었다.
신분제 사회의 불합리함이야 말로 할 필요가 없지만, 그 속에서도 아버지 신분에 따라 다시 계층이 나누어지는
그 불합리함은 다 같은 얼자라고 느꼈던 사람들에게 더 큰 절망감일수도 이었다.
이 기록은 얼자 아들에 대한 눈물 어린 부정(父情)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부정 이면에는 얼자 아들에게 그거마저도 해줄 수 없는 더 많은 아버지들의 피눈물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