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음/김문억
목줄에 구멍을 낸다 소리구멍 뚫는다 비우고 또 비우고 피 토하고 다시 비우고 똥물꺼정 다 토하고 오장육부마저 비우고 말긋말긋 빈 몸통에 소리를 담아보는데 옷 벗는 바람 소리와 구름에 달 가는 소리 비둘기 떼 콩 깨무는 소리 소쩍새 딸꾹질 소리와 쥐새끼 나락 씹는 동안 굶어 죽은 할멈 귀신 빠드득 빠드득 이빨 가는 소리와 처녀귀신 꽃신 신고 달밤에 널뛰는 소리 목 부러진 총각귀신 여울물 건너가며 흐느끼는 곡소리 중에 용 못된 이무기 구름 타고 오르다가 번개 천둥 끌어안고 철부덩 떨어질 제 귀신 모강댕이 부러지는 소리꺼정 천지간 소리소리 다 얻고서야 벙어리는 왜 못 되오 김문억 최상하 공동시집<하나+하나=하난>중에서
오래 전에 썼던 작품이다. 요즈음 방영되고 있는 정년이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득음 작품을 다시 꺼내 본다 작품은 물론 소리꾼이 소리를 내기까지의 일생에 걸친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던 사설시조다. 이 작품에 나오는 소리의 비유는 전개되는 모든 문장이 사실은 소리 없는 소리이거나 소문으로만 무성할 뿐 실체는 보지 못한 귀신 따위 얘기로 엮어져 있다.
종장은 매우 역설적이면서 득음에 대한 가설적 질문이기도 하다. 소리의 목구멍을 뚫기까지 있는 소리는 물론이요 옷 벗는 바람 소리와 구름에 달 가는 소리 같은 소리 없는 소리꺼정 다 습득을 하고서야 진정한 소리의 득음에 이를 수 있다는 작가의 질문이 마지막에 가서는 벙어리는 왜 못 되겠냐는 가당치않은 질문으로 마무리한다. 어쩌면 이 종장처리는 읽는 독자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득음의 마지막은 벙어리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역설로 득음의 경지를 더 깊이 끌어 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소리의 완성으로 득음의 경지에 오르는 자만이 그 너머에 있을법한 無聲의 벙어리까지도 될 수 있다는 시인의 가설이다. 시에서만 가능한 말의 성찬쯤으로 여기고 싶다. 그 당시에 이종문 작가가 보는 작품 평도 같이 올려 본다
사설시조를 다시 생각함 이 종 문(시인) 1. 어느 날 문득 시집 한권이 날아왔다. 한권의 책에서 시와 시조가 이쪽과 저쪽에서 실려 오다가 한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그 구성이 참으로 기발한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은 {하나+하나=하나}! 최상하 시인의 시집과 김문억 시인의 시조집이 앞뒤 없는 전차처럼 엮어져 있어서 어느 쪽이 앞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양쪽이 모두 다 앞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보면 김문억의 시조집이고, 저쪽에서 보면 최상하의 시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다. 책 한권에 묶여 있는 두 권의 시집 가운데 김문억의 시조집을 먼저 펼쳤더니, [蟹가 하는 말]이라는 머리말이 나온다. 해蟹는 ‘게’, 그러니까 바다에 사는 게가 세상 사람들의 귀에다 대고 하는 말이다. 똑바로 가는 나를 왜 자꾸 옆으로 간다 하느냐 내가 언제 물을 떠나 맨땅으로 가드냐 비틀거리드냐 절룩거리드냐 먼 바다 헤엄도 치고 뻘 바닥에 구멍도 파고 못논에 기어올라 풀잎잡고 그네를 타도 내 집 찾아 못 가드냐 모로 뜬 눈 사팔눈이 그럼 옆으로 가드냐 네 발로 기드냐. 맹꽁징꽁 운다고 개구리가 흉 보드냐 여닫이 미닫이 보고 문 타박을 하고 있네 사설시조에 대한 정감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느꼈겠지만, [蟹가 하는 말]은 행갈이를 다채롭게 했을 뿐 리듬과 호흡이 영락없는 사설시조다. 보다시피 작품 속에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게의 말 속에 불평과 풍자와 해학이 가득하다. 게는 분명히 똑바로 걸어가는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옆으로 간다고 시비를 건다. 각각의 개성과 특장에 따라 창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가만히 놓아두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인데, 공연히 자꾸만 딴지를 걸면서 난데없는 획일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문을 여닫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데도 여닫이가 미닫이 보고 문 타박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의 게는 시적 자아에 대한 비유. 따라서 시인은 이 시조집의 머리말에서 천편일률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획일화된 시조를 거부하고,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창조적 시조를 쓰겠다고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2. 이야 기대되네, 라고 생각하면서 단시조와 연시조, 사설시조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시조집을 넘겨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김문억의 시조들에는 소신에 찬 게의 발걸음처럼 창조적 위반의 흔적이 가득하다. 번쩍! 난데없는 번개와 함께 우르르르 쾅쾅 천둥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가 하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시퍼렇게 살아서 펄펄 뛰는 능청스럽고도 통쾌한 언어들이 질펀한 난장판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단시조와 연시조에도 좋은 작품이 적지 않았지만, 질과 량의 양면에서 압권은 역시 사설시조인데, 그 첫머리에 놓인 작품이 {득음}이다. 목줄에 구멍을 낸다 소리구멍 뚫는다 비우고 또 비우고 피 토하고 다시 비우고 똥물꺼정 다 토하고 오장육부마저 비우고 말긋말긋 빈 몸통에 소리를 담아보는데 옷 벗는 바람 소리와 구름에 달 가는 소리 비둘기 떼 콩 깨무는 소리 소쩍새 딸꾹질 소리와 쥐새끼 나락 씹는 동안 굶어 죽은 할멈 귀신 빠드득 빠드득 이빨 가는 소리와 처녀귀신 꽃신 신고 달밤에 널뛰는 소리 목 부러진 총각귀신 여울물 건너가며 흐느끼는 곡소리 중에 용 못된 이무기 구름 타고 오르다가 번개 천둥 끌어안고 철부덩 떨어질 제 귀신 모강댕이 부러지는 소리꺼정 천지간 소리소리 다 얻고서야 벙어리는 왜 못 되오 다 알다시피 사설시조는 그 동안 초장과 중장, 종장을 각각 1연으로 하여 연을 갈고, 각 연의 내부에서는 일체 행갈이를 하지 않은 채 산문처럼 죽 늘어놓는 방식으로 표기를 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어 왔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초장과 중장에서 행갈이를 하고 있는데, 특이하다면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지면 관계로 그 의미를 자세히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초장의 행갈이는 초장에서의 숨죽임의 이완을 통하여 이어지는 중장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허허실실의 문학적 장치다. 중장의 행갈이는 앞 행과 뒤 행을 경계로 하여 호흡의 단위와 의미의 층위가 달라진데서 오는 불가피한 조치일 것이다. 종장을 행갈이 없이 평시조의 종장보다도 다소 길게 처리한 것은 중장의 장광설이 지닌 원심력을 이 한 줄이 지닌 구심력으로 확 잡아 당겨 일대 반전의 팽팽한 균형을 이루면서 시적 긴장감을 극대화 하려는 의도일 터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모두가 작품내적 질서가 요구하는 필연성에 따른 창조적 전략의 결과이며, 그러면서도 말의 연쇄와 충돌이 빚어내는 사설시조의 리듬과 호흡을 그대로 살리는 데 성공하고 있어서 누가 읽어봐도 사설시조다. 내용의 차원에서 볼 때 초장과도 중장은 시상을 일으키고 이어 받는 관계인데, 여기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소리에 대한 실로 놀라운 상상력이다. 보다시피 이 대목에는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더구나 그것들은 모두 소리 자체를 감각할 수 없는 소리이거나 현실세계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소리다. 그러니까 시인은 깨끗하게 다 비워낸 몸통에다 이 희한한 소리들을 낱낱이 다 담고 있는데,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이 [得音]일까?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지금까지의 장광설들은 그 다음에 오는 반전을 위한 서막에 불과하다. 시인은 자신의 몸통에다 천지간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담은 뒤에, 聲東擊西에다 寸鐵殺人의 죽비를 들입다 휘둘러서 독자들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는데, 그것이 바로 종장의 “천지간 소리소리 다 얻고서야 벙어리는 왜 못 되오”다. 깨달음을 얻은 고승의 그 무슨 禪問答을 닮은 이 뚱딴지같은 생뚱한 말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선문답에 무슨 답이 있으랴만, 그것은 아마도 萬籟皆空의 천둥 같은 말씀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만뢰개공의 천둥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절대적인 고요, 바로 거기서 또 다른 차원의 새롭고도 놀라운 득음의 경지가 가슴 속에 큰 돌이 떨어지듯이 쿵-, 하고 열리는 법이다. 요컨대 이완과 긴장, 원심력과 구심력의 밀고 당김을 빚어내는 반전의 형식 구조는 이처럼 작품의 내용과도 절묘한 호응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3. 다 알다시피 조선시대 시가의 주류를 이룬 것은 정형시였다. 절구나 율시 같은 근체의 한시나 평시조 및 연시조가 정형시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사와 같은 장시도 기본적으로 평시조와 다름없는 1행 4음보격의 정형시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는 남의 집 보리밭을 마음껏 짓밟고 싶은 망아지처럼 질펀하게 분출하는 자유분방한 시상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그릇, 곧 오늘날의 자유시에 해당하는 갈래가 없었던 시대였다. 물론 사설시조가 사실상 자유시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설시조도 엄연히 3장이란 형식과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리듬 및 호흡이 있고, 그와 같은 조건에서 일탈하게 되면 더 이상 사설시조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설시조의 형식이 상대적으로 다른 갈래보다 느슨하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자유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유시가 없던 시대에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형식이었던 사설시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았으며, 그와 같은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자유시가 시단의 흐름을 도도하게 주도해 나가고 있는 시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자유시의 아버지 세대였던 사설시조가 과거와 같이 큰 의미를 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시조를 쓰는 시인들 가운데서도 사설시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고, 사설시조를 아예 수록해 주지 않는 시조 잡지도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문학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시조 가운데서도 사설시조는 더욱더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느낌이며, 발표되는 작품의 물리적인 분량도 평시조와는 도저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 자유시가 판을 치고 있는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사설시조가 차지할 자리가 과거처럼 넓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설시조는 자유시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변별적 특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조 3장 형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말과 말의 연쇄적 흐름과 충돌이 빚어내는 리듬과 호흡 등의 특징이 뚜렷하다. 그러므로 사설의 일렁거림과 넌출거림을 제대로 타면서, 짤막한 종장에다 초장과 중장의 원심력을 감당하고도 남는 촌철살인의 구심력을 확보하는 등 변별적 요소를 확실하게 지켜나간다면, 정형시와 자유시 사이에 위치한 중간 갈래인 사설시조가 설 자리가 그렇게 좁은 것만도 아닐 터이다. <현대시학 2011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