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월호, 선교국 잡지에 실린 신세기 MK간증)
저는 미국 사우스케롤라이나 콜럼비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빠는 미국장로교(PCA) 목사이시고 GMP 선교사 입니다. 3살 때 엄마는 저에게 그림과 간단한 설명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고, 저는 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세인트 엔드류 교회의 유치원에서 매일 친절한 백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부모님이 멀리 여행을 간다며 중요한 장난감들을 가방에 담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큰 비행기를 탔고, 제 동생 지성이는 지루했는지 비행기안에서 의자를 앞뒤로 넘어 다녔습니다. 지성이가 아빠에게 몇 번 야단을 맞는 것을 보면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처음 보는 아빠 가족들이 뭐라고 말들을 하며 정신없이 제 얼굴에 뽀뽀를 해대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은혜가 태어났습니다.
지성이와 나누어 가졌던 부모님의 사랑은 다시 나뉘어졌고, 엄마 아빠는 막 태어난 은혜를 너무 사랑하셔서 제 몫은 1/10정도 밖에 안되었습니다.
은혜가 태어나서 100일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중국 북경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30층짜리 아파트의 16층에서 살았는데, 창문을 넘어 밖을 내다보면, 미국의 맑고 푸른색의 풍경과 많이 달랐고, 뿌연 먼지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몇 개월 후 저와 동생은 북경의 한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북경의 유치원 생활은 저에게, “억울함” 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중국말도 한국말도 잘 못하는 저는 유치원 안에 생긴 안 좋은 일들의 잘못을 뒤집어쓰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의 말만 듣고 저를 자주 혼냈습니다.
저는 또 유치원에서 밥을 빨리 먹는 나쁜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점심을 빨리 먹으면 좋은 장남감을 먼저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또 그 장난감을 뺏으려고 해서 자주 다툼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에 있었으면 이런 일이 아예 발생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억울하여 집에 와서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울며 떼를 썼습니다.
아빠가 우리 가족은 여기서 평생 살 것이며, 하나님께서 가서 중국인들을 도우라고 우리 가족에게 부탁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빠의 단호한 표정을 보며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중국어를 배우려고 저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보통은 아이들이 새로운 언어를 더 빨리 배운다고 하는데, 동생과 저의 중국어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고, 아빠 엄마의 중국어 구사능력은 빠르게 발전해서 현지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설교할 실력이 되어서, 우리 집은 어느새 많은 중국인들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온지 4년이 되었을 때 교회는 8개로 늘어났고, 9살이 된 저도 섬길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부모님은 저와 동생이 방학이 되면, 다른 도시에 개척된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북경에서 공부를 마치고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공무원들이나, 직장을 잡은 사람들, 그리고 지방대학 교수가 된 성도들이 전도를 하여 여러 도시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큰 교회는, 교인들이 100명이 넘었고, 작은 곳은 20, 3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도시의 성도들은 우리 가족을 항상 환대해주었고, 아빠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고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성경을 배우고 함께 기도하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방도시의 성도들을 보면서 저는 갈급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훈련장소는 호텔 회의실과 방 몇 개를 빌려 하였는데, 저와 동생들은 훈련에 참가하고 있는 성도들의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중국의 허름한 호텔은 벽과 소파 아래와 뒤에 먼지가 가득하였고 아이들이 뛸 때마다 오래된 양탄자에서 먼지가 튀어올라 기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자녀를 하나만 낳기 때문에 아이들의 기본적인 교육이 잘 안되 있어서 행동이 제멋대로이고 케어 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저는 울고 떼를 쓰는 중국아이들을 한손으로 안고 등에 업고 3, 4시간 이상을 케어하느라 온 몸에 땀으로 가득하였고, 한 살 아래인 지성이는 아이들 레고를 가르쳐주고 부순 것들을 맞추어 주느라 애썼고, 여동생 은혜는 자기도 어린이라고 소리지르며 중국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습니다.
은혜는 100일이 되어 중국에 와서 면역주사들을 많이 못 맞은 탓에 늘 아팠습니다. 아파서 우는 은혜의 얼굴과 기도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속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에 우리 가족은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한국에 후원교회가 딱 한군데 있었는데, 그 교회를 방문해 아빠가 주일 설교를 하고 점심때 교회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세계지도가 붙어있는 벽 옆에 앉았는데, 제가 고개를 돌려보니 중국지도위에 우리 가족 사진이 핀에 꽂혀 있고, “중국 신선교사 가정” 라고 써 있었습니다. 저는 아빠 얼굴을 보며 물었습니다. “아빠 중국선교사 였어?” 엄마와 아빠가 순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아빠가 중국 IT회사의 부사장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약간 충격도 있었으나, 부모님이 왜 출근은 안하고 교회일만 하였는지 일순간에 이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빠는 IT회사에서 부사장 신분으로 비자를 받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돌아와 저는 선교사라는 각도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처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중국사람들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성도들의 변화를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양육받은 교인들중에 60명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에 헌신을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정말 위대해 보였고 부러웠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궁극적인 인생목표는 아빠와 엄마처럼 선교사가 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동생과 함께 아빠에게 가서, “저도 아빠처럼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아빠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빠처럼 되고 싶어서요. 이 세상에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중요한 일들도 많지만, 가장 가치있고,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더니,
아빠는 “그러면 지금 다니는 국제 학교에서 중국 현지 학교로 옮겨서 중국어와 중국 문화와 역사를 배워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제가 학교 옮기는 것은 싫다고 했더니, 아빠가 그럼 선교사가 되려는 목표를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저와 동생은 중국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중국학교에 등교한 첫날부터 제가 그때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잔인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저는 먼지 속에서 큰 학교운동장을 10바뀌 이상 달려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중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같은 반 학생들이 저를 심하게 바보 취급을 해서 저의 학교 생활은 날마다 불행했습니다.
저는 불행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갈때마다 하나님께 중국어도 잘하고 중국학교에 잘 적응하게 해달라고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저에게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을 주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중국어를 중국사람처럼 잘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중학교에 들어갈 때, 저는 학교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았고, 중국인 학생 4명의 공부를 도와주는 공부 도우미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강한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2독하였고, 아빠가 개발한 전도훈련과 귀납적 큐티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기도훈련을 받았고, 가정 예배를 통해 설교 훈련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보다 더 복 있고 기쁘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매주 교회 아이들을 베이비 씨터로 섬기는 것도, 어른들 (부모님의 동역자들)과 교회청소를 하고 예배 준비를 하는 것이 정말 기뻤고, 피곤하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중국에서 12년을 보내고, 현재 저는 미국의 칼빈신학교에서 1학년을 막 마친 20 살의 젊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정부의 외교관이 되어 선교사 비자를 받을 수 없는 나라에 들어가 선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립하는 길은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식당 일과 체육관 청소, 두 가지 일을 매일 하면서 한 학기를 다녔고, 두 번째 학기엔 중고차를 구입하여 학교 밖에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지만 학비를 벌기는 힘들었습니다. 지난 1년동안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인생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제가 경험한 것들이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대한 강한 적응력과 생존력을 키워주었습니다. 학교 친구들도 열심히 사는 저를 격려해주었습니다.
뒤돌아보니, 저의 MK로서의 삶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저의 미래를 믿음으로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번 사는 인생이지만 제가 선교사 자녀(MK)로 태어나고 자란 것에 긍지가 있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신 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