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모처럼 아내와 드라이브를 하였습니다. 용인에서 멀지 않은 수원 원천 유원지로 차를 돌리자 비는 거침없이 퍼부었습니다. 주위에 즐비하던 식당은 원천유원지 부분 택지개발로 모두 철거를 하였습니다. 유원지 옆 길가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하나의 우산에 보폭을 맞추었지요. 보폭을 맞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쿵 과 짝을 같이 맞춰 나간다는 뜻이겠지요. 쿵짝 쿵짝.....
"자기랑 이렇게 빗속을 거닐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라 호호"
"하하 그렇게 좋아? 나도 참 오랜만에 와 보네."
계단에 올라서자 둑 위로 호수가 보였습니다. 회색빛 머금은 호수에 꽃비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호수에 수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비를 보니 문득 나 자신 반성이 앞섭니다.
'그래 빗물도 모나지 않는구나. 네모도 있고 세모도 있을 텐데 비는 동그라미밖에 그릴 줄 모르는구나. 나는 어떤 모양으로 세상을 살아왔던가? 혹, 구르기 싫어 멈추어버린 네모는 아니었던가?'
제목: 꽃비
구름이 만든 밭이랑
촘
촘
촘
꽃 모종 옮겨 심는다
어머
벌써 꽃 피었나 봐요
밤새
꽃비 내리는걸 보면
*꽃비 : 비가 꽃잎처럼 가볍게 흩뿌리듯이 내리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호수를 감상하던 우리는 이윽고 '재너머 찻집'이란 간판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길게 흙집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창이 넓어 바깥 풍경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울창한 숲은 한껏 빗물을 머금고 있다가 홀연 뚝뚝 떨어집니다. 창 밖으론 커다란 항아리를 켜켜이 뒤집어 놓아 마치 납작 드러누운 조선왕조의 신하들 같습니다. 찻집 처마 끝에 대롱이던 빗물은 엎드려있는 항아리 바닥 움푹 파인 곳으로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가랑 가랑거리던 빗물은 어느새 넘쳐 항아리 빗살무늬를 타고 사르르 흐릅니다.
"자기야! 풍경 너무 좋은데 시 한 편 지어봐요."
아내가 실력 발휘를 해 보라며 친히 종업원에게 볼펜까지 부탁합니다.
"에고 나 시 못 쓰는 걸 알잖아! 즉흥시는 더 약하단 말이야."
"무슨 시인이 그래? 내 부탁하나도 못 들어줘?"
모처럼 나온 나들이에 찬물이라도 끼얹을까 조심스러워 나는 펜을 냅킨에 올렸습니다.
제목: 비 오는 찻집
비는
그들만의 언어로
뚜벅뚜벅 걸어가
엎드린 항아리 위를 걷는다
아!
이 황홀할 눈 말이여
원천 유원지 재너머 찻집은
구름 위를 걷다 잠시 내린
간이역만 같아라
시를 읽던 아내의 입술이 쀼루퉁해졌습니다.
"에고, 이 시도 좋긴 한데 가능하면 날 위한 시를 지어줘야지."
멍석을 깔아주면 더 못하는 게 사람인데 아내를 위한 시를 지어달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윽고 칼국수가 나왔습니다. 따스한 국물이 목울대를 넘어 가슴까지 훈훈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허기가 달래지자 나는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제목: 재너머 찻집
찻집
엎드린 항아리 빗물 떨군다
가랑 가랑거리다
사르르 넘는 물방울 잔상
손말 속삭이면
귓말 화답해줄
우리 사랑 나들이
내 은혜 하는 숙이
오래오래 눈 바라기 할 수 있어
더 좋은 하루.
시를 읽던 아내의 눈망울이 촉촉해집니다.
"고마워요. 이 시 예쁘게 사진 찍어서 내 홈피에 올릴 거야. 호호"
생각해보면 시를 좋아해 시를 쓴다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시가 몇 편인가 헤아려보니 열 손가락에 꼽히지도 않습니다.
시를 고이 접어 한 장은 아내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우리가 마주 앉았던 유리식탁 안에 장식을 하고 나왔습니다. 이미 다녀간 많은 인연의 글이 유리 식탁을 채웠더군요.
그 많은 사연의 공통점은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고파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 인생길, 모처럼 비를 핑계삼아 쉬는 비요일의 나들이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났습니다. 사랑은 가끔 확인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지금 펜을 들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혹은, 사랑하는 남편에게 확인시켜 드리세요. 저녁 시간이 달라질 것입니다.
첫댓글 아주 예쁜 하루였네요 공통점-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