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옷장을 열다가 옷장 아랫 부분에서 부시럭 거리는 비닐 봉지를 발견했습니다.
커다랗고 노란 이마트 쇼핑 봉지였습니다.
손으로 주둥이를 살짝 벌려 안을 들여다 봤습니다.
느낌만으로도 무엇인지 바로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사각 팬티 십여 장이었습니다.
우리집에서 제 속옷 중 메이커라곤 <트라이> 한 벌뿐입니다.
작년인가 올핸가 제 생일 때, 평소 메이커 팬티 입고 싶어하는 제 심정을 알고, 우리 아들 두 놈이 용돈을 아껴서 사 준 것입니다.
젊은 때는 저도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에 광고하는 <트라이> 같은 메이커 속옷 한 번 입고 싶었습니다.
몸매도 쫙 빠지고, 힘도 들어가 있어서, 참 멋있어 보였거든요.
장가 오기 전에는 우리 어무이가, 맨날 성당시장 같은 곳에서, 일반 시장 상표만으로 삼각 팬티를 사 주셨기에,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얼마 안 있어 장모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장모님표> 팬티만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젊은 때라 난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사람들한테는
"난 커튼 뜯어서 만든 팬티 입고 다닌다."
고 농담조로 소문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벗씨는 뾰로통해져서 그게 아니라고 극구 변명합니다.
"커튼 뜯은 것이 아니고, 친정 어머니께서 몸소 서문시장에 가셔서, 면 100% 짜리 천을 떠 와서는, 직접 오리고, 박음질해서 만드신 것이야."
라고 말입니다.
난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농담이 재미있어서 계속 커튼 뜯은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색깔도 다양하고 무늬도 다양합니다.
무늬가 밑으로 있는 것, 옆으로 있는 것, 점이 박혀 있는 것, 무늬와 색깔이 없는 것, 그리고 녹색 혹은 미색 등 다양합니다.
장모님은 제 팬티 만드는 데 꽤나 신경을 쓰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한 번 만들어 주셨다 하면 스무 장쯤 됩니다.
물론 팬티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여름 잠옷, 겨울 잠옷, 그리고 거실에서 입을 막옷 등도 만들어 주십니다.
팬티는 하도 많아서 하루에 한 벌씩 입으며 1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옷장 안에는 새 것이 꽉 쌓여 있습니다.
언젠쯤인가 이 <장모님표> 팬티를 몇 년에 걸쳐서 입다가, 여유분이 다 떨어져 갈 때에, 기분이 막 좋아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입으면 이제 이 팬티를 안 입어도 되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명품에 준하는 <필라>까지는 아니더라도 태창의 <BYC>나, 쌍방울에서 나오는 <트라이>나, 아니면 주병진 씨가 만드는 좋은 사람들의 <보디가드> 정도는 사 입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날짜가 다가오자 또 <장모님표> 팬티가 스무장이나 날아왔습니다.
"이 일을 어쩌할꼬? 흑흑. 이번에도 또 헛방이네."
실망이 컸습니다.
십 몇 년 동안 매번 이런 식입니다.
다 떨어질 때가 되면 어떻게 아셨는지 꼭 보내 옵니다.
그래서 내가 팬티 받을 때마다 아니, 입을 때마다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아들 둘이서 의논 후 생일 선물로 <트라이> 한 벌을 사 준 것입니다.
이런 연고로 인해 메이커 상표로 <트라이> 한 벌이 생기게 되었고, 이 <트라이>는 <장모님표> 팬티에 밀려 좀처럼 입을 기회가 없다 보니, 아직도 닳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기쁜 일이 되었습니다.
괜시리 기다려집니다.
'이번에는 어떤 종류로 보내 주실까?'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팬티를 보내오길래, 혼자 소비할 수가 없어서 동네 지인들에게 돌렸더니, 이게 대박이 나 버렸습니다.
서로 달라고 아우성들입니다.
헐렁한 사각 팬티가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장모님 잘 뒀다고 엄청 부러워합니다.
통품 잘 되죠, 질 좋죠, 고무줄이 달려 있어 프리 사이즈죠, 질기죠, 색상 좋죠, 그리고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명품이랍니다.
저는 그 때부터 생각이 확 바뀌어 버렸습니다.
젊을 땐 메이커 팬티 입고 싶어 하는 저를 이해해 주시지 않는 장모님이 약간 야속하더니, 이젠 장모님의 깊은 생각에 감동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질 좋고, 건강까지 생각해 주시는 장모님이 세상 어디에 또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결혼 후 십 몇 년 동안 묵묵히, 그리고 수도 없이 몇 십 벌씩 보내 주셨던 장모님께, 고마움을 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트라이> 한 벌밖에 없어도 전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어디 처가 말뚝이라도 보고 절이라도 할까요?
2006년 9월 6일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훌륭한 장모님을 두셨군요. 더 늙어지시기 전에 자주 전화드리고 맛있는것 사드리세요.
애시당초 안입는다고 버텼으면 만들어 주시지 않았을텐데 감사히 입고 댕기니까, 사위가 이뻐서 자꾸 소일삼아 만들고 계십니다. 참고로 둘째 사위는 안입습니다.(당연히 그 집에는 배달 안가죠 ㅎㅎ)
등산 대장 팬티 색깔, 나는 알았다---아. 모양도 알았다--아.....(이런 야--한 일이??? ㅋㅋ)---중인 환시리에 팬티 모양,색깔 공개하고 자랑을 늘어 놓도록 만드신 위대하신 장모님 두셔서 행복하겠슈. 역시 사위사랑은 장모네. 자랑도 가지가지....흥.
나도 흥!!(아 ~ 배 아파)
(이건 일급 비밀인데 ) 우리도 몇장.....장모님표 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