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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1 인천서구청 직원 교양강좌 원고
인천 서구의 역사와 문화
1. 서구 역사의 개관
1) 삼한시대, 삼국시대, 고려에 이르는 동안 한산한 농경․어촌 지대였다. 구태여 기록을 찾는다면 고려 충렬왕이 계양산 경명현에 응방(鷹坊)을 차리고 매 사냥에 탐닉했다는 것 정도이다.
2) 조선시대에는 부평 김포에 속했다. 전조창(轉漕倉)이 석곶면 포리(浦里. 현재의 원창동)에 설치됨으로써 환곡조운(還穀漕運)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으며 1883년 인천 개항 당시 전운서(轉運署)가 설치되는 등 육․해의 주요 통로였다.
3) 근대에 들어와서 서구열강에 의한 양요가 일어날 때 해안 방위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고종 16년(1879) 7월 1일 인천에 화도진(花島鎭), 부평에 연희진(連喜鎭)을 설치했다. 연희진은 현재의 연희동 247번지 옛 서곶출장소 자리에 위치했다. 그 해 11월 15일에 모월곶면 1개 면을 이에 예속시켜 자립할 수 있는 독진(獨鎭)으로 만들었다.
<보충> 연희포대지는 연희진 서쪽 바닷가 용두산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용두포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포대는 논현포대와 더불어 고종 16년(1879) 연희진이 설치될 때 축조되었는데 연희진이 관할했다. 3개 좌의 포대가 설치되었는데 갯말(浦里, 원창동)에 2개 좌, 봉우재(가정동)에 1개 좌가 있었다고 하나 그 흔적은 없고 다만 용두산에 축대만 남아 있다
4) 고종 20년(1883) 10월 부평에서 서곶으로 넘어가는 景明峴(징맹이고개)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했고 이듬해 1월 4일 연희동에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설치했다. 경기, 충청, 황해 3도의 수군을 통할했는데 1년 후인 1885년 3월에 용산의 만리창지(萬里倉址)로 옮겼다.
<보충> 중심성은 계양구 계산동 산 52에 소재하며 계양산 능선을 따라 일자성(一字城)으로 축조되었으며 경명문 서쪽 약 20미터 아래 지점에 중심성 사적비가 서 있었다. 성은 흔적도 없이 헐려지고 사적비는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하였다가 한국전쟁시 함포 사격에 명중되어 부서지고 대석(臺石)만 남아 있다.
5) 그뒤 다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지역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당하고 1914년 부평군의 일원과 인천부에 편입되지 못한 종래의 인천군의 일부 지역, 그리고 강화군 중에서 일부 지역을 통합하여 부천군을 신설했는데 서곶은 거기 속했다. 검단은 그대로였다.
6) 광복 후에는 서곶이 인천에 속하고 인천시 서곶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구제를 실시하면서 북구청에 속한 서곶출장소가 되었다가 서구로 분구되었다. 그리고 그 뒤 검단을 포괄하게 되었다.
2. 서구의 지리와 지명
1) 조선시대에는 부평군 석곶면(가정 석남 신현 원창 가좌)과 모월곶면(연희 심곡 검암 공천 시천 백석), 그리고 김포군 검단면(불로 마전 원당 당하 금곡 대곡 완정 여래 오류 등)이었다.
2) 우리말의 ‘곶’ 또는 ‘고지’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황해도의 ‘장산곶’이나 경상북도의 ‘장기곶’처럼 지명 뒤에 붙어 바다로 뻗어나간 곳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3) 석곶이라는 지명은 속칭 '돌곶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곳의 지형이 꼬챙이같이 길게 뻗어있으며 돌이 많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돌곶이가 어디인가는 한 장소를 잡아 지칭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보아 가좌동, 원창동, 가정동의 해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월곶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고 작은 산맥이 터럭(毛)같이 뻗어 내려서 ‘터럭이 많은 반달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물이 많은 고장이라 물곶이〔水串〕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4) 서곶은 1914년 두 면 통합시에 만들어진 지명이다. 군소재지인 부천을 중심으로 서쪽에 해안에 있는 곶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5)인천 다운타운과 달리 문명의 혜택이 늦은 격리 소외된 지역이었다. 계양산이 부평 쪽을, 철마산이 인천 쪽을, 보도진 해협이 가로막기 때문이었다. 전기도 1970년대에야 들어왔다.
6) 서곶을 '개건너'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현재의 남구 도화동과 서구 가좌동 사이에는 길고 깊은 해협이 뻗쳐 있어서, 이 곳에 바닷물이 들어와 있을 때는 나룻배로, 물이 빠져 있을 때는 갯벌에 놓인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 다녔다. 이 곳을 ‘보도진 나루’라고 불렀다. 개건너는 좁은 뜻으로는 이 해협 건너편 마을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넓은 의미로는 서곶의 모든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서곶과 검단으로 가는 노선버스가 있었다. 두 시간에 한 번쯤 동인천을 출발해김포 양곡이나 강화로 가는 버스였다. 경인국도를 타고 숭의동과 주안을 지나 십정동에서 서쪽으로 꺾어져 굽이굽이 산야를 달려 서곶의 중심지인 연희동까지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서곶이 직선거리로는 결코 멀지 않으면서도 인천 다운타운에 살던 시민 일반에게 먼 곳이라는 느낌을 주고, 인천의 선진문화에서 낙후되고 소외된 것은 바로 이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개건너’라는 명칭은 약간은 멸시하는 뉴앙스로 사용되고 서곶 사람들이 그것을 열등감으로 받아들인 시기도 있었다.
1961년 도화동-가좌동 간의 보도진 해협에 인천교(仁川橋)가 놓였다. 노선버스가 가는 시간이 30분 이하, 운행도 빈번해져 통학과 통근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6)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섬들이 매립되어 사라졌다. 파렴[靑羅島] 뱀섬[蛇島] 노렴[獐島] 밤염[栗島] 범섬[虎島] 등이 그것이다. 서곶의 앞바다는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밀물과 썰물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섬들은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겨 푸른 수평선 끝에 보이기도 하고 썰물 때는 망망한 갯벌의 끝에 얌전히 앉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드넓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와 맛조개를 잡았으며, 썰물을 따라서 섬까지 걸어가 한두 시간 일을 보고 밀물에 앞서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검단의 명칭은 개흙이 유난히 검어서 검(黔)자를 쓰고, 드넓은 갯벌이 석양에 낙조가 시작되면 그것이 마치 홍학의 날개와 같이 아름다워서 단(丹)자를 써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검(黔)이 신성하고 으뜸이라는 뜻을 가졌고, 단(丹)은 제단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제단’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주장도 있다.
8)검단의 서곶 친근성:인천에 편입되기 전에도 문화 지향성은 군 소재지인 김포읍보다는 인천을 향했다.
1)교통:인천-서곶 노선버스가 검단의 중심을 관통. 노선버스가 없는 김포읍보다는 교통이 편리한 인천을 지향
2)중학교:검암동 소재 서인천고교의 전신인 사립중학교들.
1950년대 서곶 유지들 설립 영화중학교 분교로 개교 그 후 영화중→서인천중→고려중→인광중. 졸업생 거의 절반이 검단 출신. 서곶 사람들과 선후배로 이어졌다.
3. 서구의 특산물
계양산의 회양목, 석영 부싯돌, 도롱뇽과 청라 매립지 이전의 방게와 맛살, 경서동 사자발쑥 등이 유명했다.
4. 서구의 전통신앙과 외래종교
1)불교: 불교는 가장 뿌리 깊은 전통 종교인데도 서곶과 검단에는 유서 깊은 사찰이 없다. 계양산에는 고려대에서 조선대에 이르기까지 경명현 서록의 만일사(萬日寺), 주봉 북면의 명월사(明月寺), 그리고 남록의 봉일사(奉日寺)가 있었다. 가좌동 서쪽 마을에 감중사(甘中寺)가 있었다.
그러나 8․15 광복을 기점, 단 하나의 사찰도 없었으며 지금도 번듯한 사찰이 없다. 연희동에서 15대 살아온 연안이씨 집안은 김포 운양리에 있는 용화사에 다녔다.
2)천주교: 1940년대 초반 옹기를 굽는 교인들이 검암동과 경서동과 공촌동의 경계를 이루는 과기평 마을에 가마를 만들고 예배를 올렸다. 1943년에 거기 공소가 생겼다.
3)개신교: 연희교회는 1세기가 지났다. 인천내리교회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다. 감리교파에 속하는 이 교회는 1903년 첫 예배를 올렸고 구한말에 사탕수수 이민으로 하와이로 떠났다가 1938년 거부가 되어 귀향한 김기선 씨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4)무속신앙: 인천 중심지 무속 신앙이 한국전쟁 때 월남한 황해도 사람들의 영향으로 변화한 데 비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인천 지역은 전래된 ‘한양거리’ 굿 양식에다 ‘이북거리’ 굿 양식이 혼재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데 비해 서곶과 검단 지역은 ‘한양거리’ 굿 양식이 최근까지 전승되었다.
*단골네라고 부르는 세습 무당들이 있었다.
*남서곶 박씨--석남동의 번지기 마을(오늘날 ‘거북시장’ 부근과 그 아래쪽 마을)
*북서곶 이씨--경서동 고잔 마을의 이씨 무당
*검단 지씨--마전동의 가현산 아래 간약굴 마을
*서곶과 검단을 대표하던 이들 세 사람의 세습무는 신당에 임경업 장군을 모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영역이 모두 도시 문명에서 30년쯤 뒤떨어진 곳이라 인천의 어느 곳보다도 무속을 왕성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5)마을신앙
서곶과 검단은 당산나무와 신당이 마을 지킴이 구실을 해 왔다. 축제형인 거리제는 없고 정숙형인 당제가 도당굿 형태로 치러졌으며 유교와 무속의 종합된 성격을 가졌다. 그 일부는 지금도 존속되고 있다.
당제--연희동 가정동 원창동
도당굿--경서동의 고잔 마을, 청라도, 검암동, 백석동, 왕길동, 마전동의 능안, 여래리, 가현, 불로리
5. 서구의 옛길
1) 고려시대의 길: 무명한 포구였던 인천, 혹은 삼남지방에서 이동해온 사람들이나 화물을 왕도인 개성으로 수송하는 통로였다. <추정>원창동 석남동→신현동→가정동 봉수대 앞→심곡동→옛 305번 국도 그대로 연희교회 언덕까지→연희교회 옆 스쳐 내려가 연희진지 당산나무 언덕→다시 북쪽으로 내리막길 빈정천 건너→검암동 상동→장모루(검암동과 시천동 경계)→북향하여 개성 쪽으로
2) 조선시대의 길: 삼남지방에서 싣고 온 세곡을 왕도인 한양으로 수송하는 중요한 통로로 부상했다. <추정>당산나무 언덕까지는 고려시대와 같음. 당산나무 언덕→북진하지 않고 동쪽으로→현재 연희동 주민센터 길 타고 경명현→ 고개 넘어가 부평부를 거쳐→한양으로 감
3)일제 강점기의 길: 1930년대에 305번 국도가 주민들의 부역으로 개설, 싱아고개가 가장 위험했다.
6. 서구의 대표적인 설화 3편
1)장모루의 아름다운 처녀
시천동은 고려 때 장모루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남부지방에서 고려의 왕도인 개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갔다. 전라도에 사는 대갓집 아들이 천릿길을 걸어 과거를 보러 가면서 이곳 장모루촌 여관에서 묵었다. 여관 주인에게는 매우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젊은 선비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청년 선비는 과거를 이틀 앞두고서야 개경으로 떠났다. 과거시험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는 다시 장모루로 왔다. 여관 주인의 딸과 다시 사랑에 빠졌고 말리다 못한 여관 주인이 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는 거기서 처녀와 살며 여관의 잔일을 맡아했다.
그의 고향집에서는 몇 달이 지나자 무슨 사단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판단해 수소문했다. 마침내 청년이 부평의 장모루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젊은 선비의 형이 찾아왔다. 사흘 동안 아들과 그 처녀를 설득했다. 장래를 기약한다는 말을 남기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 뒤 사랑에 빠져 일생을 그르치지 말라는 한 줄의 시구가 남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2)천마와 아기장수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다. 옛날 이 산 속에는 양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산 아랫마을에 선량한 부부가 살았다. 천마비상의 태몽을 꾸고 비범한 아들을 낳았다. 세 살이 되자 초가지붕 위로 휙휙 날아올랐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천마산 꼭대기로 달려 올라갔다.
나라에서는 장차 역적이 되어 나라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에 관군을 보내 죽이라 했다. 아버지가 미리 아기장수를 다듬잇돌로 눌러 죽이고 땅에 묻으며 콩과 팥을 함께 묻었다.
관군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기장수가 살아 있고, 아기와 함께 묻은 콩은 군사가 되고 팥은 군마가 되어 막 아기장수를 호위하여 일어나려는 것이었다. 관군 장수는 깜짝 놀라 칼을 내리쳐 아기장수를 죽였다. 그 때 천마산 골짜기에서 천마가 날아올랐다.
몇 해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쳐들어왔다. 수많은 목숨과 조선의 강토가 그들의 발굽에 짓밟혔다. 사람들은 탄식하였다. 아기장수가 살아 있었으면 천마를 타고 날아다니며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켰을 것이라고.
3)신관사또가 처녀의 원혼을 풀다
검단 사거리의 옛 이름은 원현(院峴)이고 역참이 있었다. 어느 해 새로 부임해 오는 신관 사또가 이곳 원현에서 묵었다. 밤에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서늘하고 음산한 느낌이 들더니 여인의 혼령이 나타났다. 정절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죽어 객사앞에 묻혔으니 신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비록 기생이었지만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기생을 기념하는 원현 사거리의 이 정려는 구한말까지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조문’이라고 부르며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정절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그 정조문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 없어졌다. 그러나 토박이들은 객사가 있던 자리를 ‘원현 사거리’ 또는 ‘정조문 사거리’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7. 서구의 인물
*정희량(鄭希亮): 조선 연산군 때. 방외인(方外人) 문학, 다도(茶道), 신선로, 혼란주(昏亂酒), 천채환(天菜丸)의 창시자였다.
*조서강(趙瑞康): 조선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아들로서 가정동에 살았다. 가정이란 지명은 조반 조서강 부자의 정자인 가정(佳亭)에서 유래한다.
*심혁성(沈爀誠): 백석동 출신으로 황어장터의 3․1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류완무(柳完武): 시천동 출신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생애를 바쳤다.
*류희강(柳熙綱): 시천동 출신으로 서예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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