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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伴鷗亭)은 명재상인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반구정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임진강변 강언덕에 있다. 이 일대는 낙하진(洛河津)과 붙어 있으므로 ‘낙하정’이라고
했다가 임진강변을 가득 채운 '갈매기를 벗하며 놀겠다'고 반구정이라 했다.그는 1449년(세종31년)에야 64년의 험난한 공직생활을 벗어났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그는 날이 맑은 날이면 고향땅 개성의 송악산이 아득히 눈에 들어오는 파주 임진강변에 정자를
짓고 강위에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갈매기를 친구 삼아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 정자가 ‘반구정’이다. 갈매기를 벗하며
지내겠다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황희는 반구정에서 3년동안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그때가 1495년으로 90세까지 장수한
황희다. 그는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면서 찬란한 업적을 쌓은 명재상으로 후세에 알려진다.
그후 160년이 지나 후손 황생이 쓰러진 반구정을 다시 세웠다. 그 때 미수 허목이 1665년에 ‘반구정기’를 썼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반구정의 풍경은 변함이 없다. 절벽 아래로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해질녘에는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절경이다. 하지만 당시에 이곳을 찾았다는 갈매기는 그 수가 훨씬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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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안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반구정기(伴鳩亭記)>는 이렇게 반구정을 기술하고 있다.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공의 정자이다. 황희가 죽은 지 2백 년이 채 못 되어 정자가 헐렸고,
그 터전이 쟁기 밑에 버려진 땅이 된 지도 1백 년이 된다. 이제 황희의 후손 황생(黃生)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
그대로 반구정이라 하였다. 이는 정자의 이름을 없애지 않으려 함이니 역시 훌륭한 일이다. (중략)정자는 파주 부치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臨津) 가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강가의 잡초 우거진 벌판에는
모래밭으로 꽉 찼다. 또 9월이 오면 기러기가 찾아든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10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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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초당의 문을 잠그고 손님을 일체 거절하고 운서(韻書)만 탐독하고 있다."
명재상 황희는 남원에 귀양 가서 유배생활 하는 모습이다. 왕의 지시에 따라 오치선(吳致善: 황희의 생질)이 황희의 유배생활
동태를 살핀 후 복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남원의 광한루(廣寒樓)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廣通樓)'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이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시조에서 우리는 그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청계상(淸溪上) 초당외(草堂外)에 봄은 어이 늦었는고
이화(梨花) 백설향(白雪香)에 유색황금눈(柳色黃金嫩)이로다
만학운(萬壑雲) 촉백성중(蜀魄聲中)에 춘사(春思) 망연(茫然)하여라
맑은 시냇물 그 위에 초가삼간 여기에 봄철이 찾아오니
눈같이 흰 배꽃은 향기가 싱그럽고 푸른 버들은 누른빛을 띠어
장차 움이 트려는데 먼 산에는 구름이 엉기고 두견새 소리는 처량만하다
1418년(태종 18년)에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국본을 쉽게 바꾼다며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난다.이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양녕대군 폐위 반대는 순간적으로 태종의 분노를 초래했으나, 후에 태종은 그를
믿을수 있는 사람이라고 깊이 신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든다. 그러나 상왕 태종의 진노가 풀려 태종의 건의로 세종에 의해 복직된다.
청백리 황희 정승이 부패와 청탁, 뇌물수수에 수차례 연루되어 파직 당한다.
세종 12년11월 24일 사헌부에서는 태석균이 제주 감목관으로 있었을 때, 말 1천마리가 떼 죽음을 당한다. 그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한 태석균이 중신들에게 뇌물을 썼다. 황희도 뇌물을 받고 비호해 줄 것을 부탁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는다. 세종도 어쩌지를 못했다.
결국 황희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 파직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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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언덕길에 반구정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시피하고 서 있는 육각형의 정자는 앙지대(仰止臺)다.
앙지대도 황희가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안에 걸려 있는 ‘앙지대중건기’는 1973년 파주군수 우광선이 썼다.
앙지대가 있는 자리가 본래 반구정자리이다. 1915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반구정을 아래쪽 넓은 곳으로 옮기고
반구정이 있던 자리에 앙지대를 세우고 육각 정자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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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지(仰止)’는 ‘우러러 사모한다’는 앙모와 같은 뜻이다. 황희가 무엇을 우러러 사모했는 지는 앙지대 상량문에 적혀있다.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호인(好仁)이라는 뜻을 취했다” ‘호인’은 ‘부국군호인천하무적(夫國君好仁天下無敵)’의
줄임말이다. 나라의 임금이 인을 좋아하면 천하에 적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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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지대에서 보는 반구정의 경관이 빼어나다. 반구정과 반구정 옆으로 길게 늘어선 임진강물, 모래사장과 녹음이 별유천지 같다.
다만 강물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선 철조망만 빼면. 황희의 17대 손이 우산 황유주(1912~19830는 새로 지은 앙지대에 앉아
반구정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단청도 새롭구나 다시 지은 앙지대
달빛 아래 물가에 하얀 분벽이 부침하네
만고의 산 모습은 병풍안의 그림이요
천추의 오랜 옛일 꿈속에 흐르네
반구정은 당시의 일을 말하지 않고
가로뻗은 삼팔선만 고국의 시름 더해주네
익성공어른께서 노시던 곳이 어디멘가
필시 임진강 가의 저 한 고루이겠지
- 황유주의 시 ‘앙지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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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1363년(고려 공민 12) 판강릉 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송경(松京 開城)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난다.
그는 14세 때 음관으로서 안복궁(安福宮) 녹사(錄事)가 되었고 21세에 사마시,23세에 진사시를 마쳤다. 27세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균관 학관이 되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황희가 조선에 들어와 태조의 요청으로 다시 관직으로 나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황희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왕조 창업에 반발해 두문동에 들어 갔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과 세종의 굳건한 신임을 받으며 24년간 재상의 자리를 유지했다. 영의정만 18년을 지냈다. 태종은 3살이나 많은 그를
자식처럼 아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태종의 이같은 절대적 신임에도 할말은 하는 소신있는 선비였다.
양녕대군 폐위때 이조판서이던 그는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4년간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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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스무살 때 벌써 진사의 벼슬에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들판에서는 농부들이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황희는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겨 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귀엣말로 답하였다.
“농부 : 누런 소가 사실 검은 소보다는 일을 더 잘합니다.
황희 : 그런데 노인,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는게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귓속말로 하십니까?
농부 : 모르는 말씀하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을 보면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것이오.”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비록 그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느 소를 일을 잘한다, 못한다 하고 흉보는 일은 나쁘다는 교훈이었다. 이후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별장(別將)이 되었다. 1389년(창왕 원년) 별장으로 재직 중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적성현 훈도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학록을 거쳐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세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황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황희는 황군서의 얼자(노비 처의 자식)로 대사헌이 되었을 때 승려로부터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
하였다. …황희가 장인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노비가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범죄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파주의 3현 중 하나로 평가받는 황희에 대한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이다. 세종 대왕이 황희의 집에 몰래 방문했다.
그는 멍석을 깔고 보리밥에 나물 반찬을 먹었다는 일화와도 정반대의 기록이다.
황희에게는 노비 첩에서 얻은 황중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중생이 왕실의 물건을 여러 차례 훔치다가 발각되어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금을 20냥 훔쳤으면서 네 집에서 나온 것은 어찌하여 11냥뿐이냐?”
“9냥은 저의 형님인 황보신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 놈이 거짓말을 합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황희는 중생을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고, 중생은 자신의 성을 조씨로 바꾸었다.
또, 황보신(차남)은 유배를 가는 대신 국가에서 받은 토지를 반납하게 되었다. 이때 황치신(장남)이 자신의 척박한 땅을
국가에 반납하고 황보신이 소유하던 땅을 차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황치신도 파면되었다. 황희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원수 같았을 것이다. 세종은 무거운 형벌 대신 황희의 뜻을 존중하여 가볍게 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