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사상>, 2023년 가을호
【산울림 듣기 1】
장은성(張銀成) 어머니 회고담
일시 : 2022년 7월 21일. 12월 20일.
장소 : 흑석동 자택
맹문재 : 안녕하세요. <산울림>에 대한 관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우선 어머님을 찾아뵈었어요. 어머님의 말씀이야말로 <산울림>의 뿌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건강하시니 참으로 감사해요. 고향은 어디인지요?
장은성 : 1930년 개성에서 태어났어요. 주소는 개성 동현동 330의 13호에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고 언니와 함께 살았어요. 아버지의 존함은 장기창(張基昶), 어머니의 존함은 이순례(李順禮)예요. 언니 이름은 장금성(張金成)이에요. 할아버지 존함은 장문한이고, 할머니 존함은 김여수예요. 나는 궁정심상소학교를 마치고 개성공립고등여학교에 다녔어요. 그때 여학교는 4년제였어요. 남학교는 5년제였고요. 해방된 뒤에는 중학교 3년제, 고등학교 3년제로 바뀌었지요. 왜정 때는 내선일체 정책으로 일제가 공립학교를 세우고 일본 학생들을 먼저 선발하고 나머지를 조선 학생으로 뽑았어요. 그러니 조선 학생들의 입학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지요. 언니는 호스돈초등학교에 다녔어요.
내가 여학교에 다닐 때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해서 6년제였는데, 4년제를 이전에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4년에 졸업해도 학력을 인정받았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도움을 받지 않고 독립해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학교를 4년만 다니고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개성 위 장단이라는 곳에 있는 진서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맹문재 : 교사 생활을 하셨군요. 얼마나 하셨는지요?
장은성 : 1년 남짓하다가 혼담이 와서 교사를 그만두었어요. 친척 중 어느 분이 중매를 섰어요. 총각이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첫눈에 반했어요. 풍채가 크고 잘생겼어요. 이름은 김재혁(金在爀)이에요. 서울에 좋은 색시가 많은데 다 싫다고 하고는 개성에서 만난 아가씨가 좋다고 아들이 말하니 시어머니 될 분이 궁금해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그런 다음에 사주단자가 오고, 금방 결혼했어요. 내 나이 21살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한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맹문재 : 결혼으로 서울에서 살게 되었으니 개성에 있는 가족과는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 했네요.
장은성 : 내가 결혼하기 이전에 언니는 결혼한 상태였어요. 개성에서 건축하는 사람과 결혼했어요. 언니는 구식 결혼식을 했어요. 언니는 나보다 4살 위였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가지 못했는데, 정말 예뻤어요. 말이 별로 없었지만, 인물이 대단했어요. 언니에 이어 나까지 결혼을 하니 어머니는 혼자 사셨어요. 그때 아버지는 서울에 와 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나를 의지하고 사셨는데,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어요. 한이 많으실 수밖에 없었지요. 6․25전쟁 이후 어머니를 못 뵌 지 벌써 72년이 되었네요.
맹문재 : 참으로 가슴이 아프네요. 결혼한 뒤 어디에서 사셨는지요?
장은성 : 서대문구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부근에서 살았어요. 남편은 쌍둥이였는데, 형이었어요. 위로는 아주버님이 한 분 계셨고, 아래로는 시누이 둘과 막내 시동생이 있었어요. 막내 시누이는 6․25전쟁 때 몸이 아파 세상을 떴어요. 시아주버님은 결혼해서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시누이는 지금 안양에서 살고 있어요. 남편이 육군 대령이었는데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두었어요. 쌍둥이 동생은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떴어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었어요. 막내 시동생은 지금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살고 있어요. 남편은 영월인가, 제천인가에 있는 한전(한국전력)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따로 떨어져 살았고, 남편이 주말이 되면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6․25전쟁이 났어요. 그 바람에 남편이 제일국민병으로 뽑혀 군대에 갔어요. 남편은 일반 사병으로 있다가 군사반으로 옮겨 훈련을 받고 화천 최전선에서 싸우게 되었어요. 그렇게 5년간 근무하다가 대위 계급으로 제대했어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어요. 올해 초 동작동에 있는 국립 현충원에 모셨어요. 그전에는 절에 모셨었지요. 우리는 보훈 가족이어서 나도 죽으면 현충원으로 갈 수 있어요.
맹문재 :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모습을 어머님의 말씀에서 확인되네요.
장은성 : 결혼한 뒤 개성에 있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6월 24일 개성에 갔어요. 24일,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남편이 집으로 오는 날이었기에 시댁에서 말리는데도 갔어요. 내가 고집이 센 면이 있어요. (웃음) 그런데 그만 6월 25일 일요일 날 6․25전쟁이 일어난 것이에요. 그래서 개성에서 한 사나흘 있다가 서울로 왔어요. 인민군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 독립문까지 와서 내려 북아현동의 집까지 걸어갔어요.
맹문재 : 정말 놀랍네요. 전쟁 상황인데 그렇게 다니셨다는 것이 믿기 어렵네요.
장은성 : 내가 결혼해서 시집살이할 때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 과정에 가서 교사 생활도 했어요. 거기는 고아원 같은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북성초등학교로 보냈어요. 9․28수복으로 피란 갔다가 돌아와서 한 것이에요.
맹문재 : 여러 가지로 놀라운 말씀이네요. 피란은 어디로 가셨는지요?
장은성 : 피란을 충청남도 공주로 갔어요. 피란 도중에 아기를 낳았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목숨을 잃었어요. 쌀을 불려 미음을 쑤어 먹였는데 체했는가 봐요. 6개월 된 아이였어요. 전쟁 중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고 돈도 없고 해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를 땅에 묻었는데, 그곳을 어떻게 찾을 수 없으니 이렇게 살고 있네요. 79세에 막내아들도 잃어 내 가슴이 편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불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까지 했어요. 결혼하자마자 6․25전쟁이 나 남편이 군대에 가야 했고, 개성에 있는 어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어요. 한때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했다가 취소했어요. 세월이 너무 흘러 어머니를 비롯해 친척이 다 돌아가신 것 같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어요.
맹문재 : 하실 말씀이 워낙 많고, 또 듣고 싶기도 한데, 다른 기회에 듣도록 할게요. 이제부터는 <산울림>으로 좀 더 들어가 볼게요. 큰아드님인 김창완부터 말씀을 들어보고 싶은데, 어렸을 때 특별히 다른 면이 있었는지요?
장은성 : 남편이 전쟁터에 끌려가 싸우고 있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내가 중대장에게 편지를 썼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일주일 만에 남편이 휴가를 나왔어요. 그래서 김창완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에요. (웃음) 1954년생이에요. 남편이 군대에 가 있으니 아이를 집에서 낳았는데 시어머니가 받았어요. 아이가 어렸을 때 내가 무어라고 말하면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어요. 내가 영어 노래를 불러주면 그대로 따라 부르고, 일어 노래를 불러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정도로 신기했어요.
주위에서는 나보고 체구는 작은 사람이 간덩이가 크다고 해요. 사실 그러한 면이 있어요. 내가 우리 손자를 키워 초등학교에 데리고 다녔는데, 글쎄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가용에 아이를 태워 교문에 들어가 내려주는 것이에요. 그러니 불편함이 컸어요. 그래서 내가 교장 선생님 앞으로 편지를 썼어요. 그다음부터 자가용이 교문에 못 들어갔어요. (웃음)
남편이 제대한 후 김포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창완이가 오정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학교에 들어가니 창완이도 학교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어요. 그런데 나이가 6살이니 학령이 안 되어 입학할 수 없다고 해서 교장 선생님께 사정사정해서 넣었어요. 그때만 해도 어수룩한 시절이었고 인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서는 공부를 안 하는 것이에요. 창훈이는 걸리고 창익은 업고 학교에 가보면 창완이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그네에 앉아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달래서 교실에 넣고 또 공부가 끝나면 학교로 가서 데리고 오곤 했어요.
1학년 말에 학예회가 있었어요. 변종률 담임 선생님이 창완이에게 학예회가 끝나고 학부모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말을 시켰어요. 선생님이 원고를 써서 창완에게 주었지요. 따라서 창완이가 외워서 인사말을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아이가 외우지를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학예회 때 아이가 강단에 올라가서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을 다 하는 것이에요. 다들 놀랐지요. 교장 선생님도 이 아이가 만 5살밖에 안 되었다고 학부모들에게 소개했어요.
맹문재 : 김창완 가수가 어렸을 때부터 남다르게 영특한 면이 있었네요. 그밖에 초등학교 생활에서 소개해 주실 일화가 있는지요?
장은성 : 남편이 김포에 있는 미군 부대를 그만두고 서울로 와서 다시 미군 부대의 토목 기사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흑석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전세로 살았는데 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학교도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은로초등학교로 옮겼지요. 은로초등학교에서도 나이가 부족해 2학년에 올라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 또 사정사정해서 2학년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창완이는 공부를 잘 안 해요. 글쎄 자연 과목 시험을 보는데 백지를 내서 0점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다음 시험에 100점을 받는 것이에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은 창완이가 공부를 하면 아주 잘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언젠가 학교에서 아이큐(IQ) 검사를 했는데 창완이가 159가 나왔어요. 전교에서 가장 높았어요. 공부를 안 해도 참으로 재주가 많았어요. 나도 어렸을 때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좀 들었어요. (웃음)
맹문재 : 말씀 잘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둘째 아들 김창훈의 초등학교 생활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네요.
장은성 : 창훈이는 남편이 전주에서 군대 생활할 때 태어났어요. 창훈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너무너무 잘했어요. 속 썩이는 일이 전혀 없었어요. 거저 키우다시피 했어요. 학교 다닐 때 옷도 모양을 내서 입었고, 머리도 물을 바르고 할 정도로 단정했어요. 초등학교 때 별명이 영국 신사였어요. (웃음) 덕수궁에서 열린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어요. 모든 것을 잘했어요.
맹문재 : 둘째 아드님의 그와 같은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지요. 요즘 시노래 500곡을 목표로 매일 한 곡씩 작곡하고 있는데, 성실함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면 셋째 아드님인 김창익은 어떠했는지요?
장은성 : 셋째 아들은 위의 두 형에 비해 조금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공부를 잘했어요. 이들이 모두 착하게 잘 자랐어요.
맹문재 : 그러면 이제부터는 아드님들의 중학교 이후의 생활에 대해 여쭈어볼게요. 큰아드님 김창완의 학교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장은성 : 남편이 미군 부대에서 퇴직했어요. 근 20년 정도 근무했어요. 그런데 퇴직금 300만 원을 영화 만드는 데 투자했다가 불황으로 다 날렸어요. 그 일로 남편은 실망하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국 신경을 많이 써 중풍을 맞고 쓰러졌어요. 남편의 나이 47세 때였어요. 내 나이 42살이었지요. 그 후 27년간 내가 병수발을 들었어요. 남편은 69세에 세상을 떴어요. 집안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아이들 교육도 힘들어졌지요. 큰아들은 계동에 있는 중앙중학교에 합격해 다녔어요. 그리고 중앙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집안이 어려워도 과외 공부를 시키려고 했는데, 비싼 돈을 들여서 할 필요가 없다고 본인이 거절해 과외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러고도 서울대학교 잠사학과에 합격했어요. 학교에서 12명이 예비고사를 보러 갔는데, 우리 아들만 합격했어요. 담임 선생님이 창완이는 시험을 칠 때 백지를 내고 올 수도 있는 성격이니, 학교를 따지지 말고 갈 수 있는 아무 대학이라도 보내자고 했을 정도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떡하니 합격한 것이었어요.
맹문재 : 참으로 놀라운 일이네요. 그러면 둘째 아드님 김창훈은 어땠는지요?
장은성 : 둘째 아들은 당산중학교에 들어갔어요. 제1회 졸업생이에요. 그다음에는 용산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집안이 어려워 과외를 못 시켰는데, 영어학원에는 다녔어요. 그리고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에 합격했어요. 장학금 받고 들어갔어요. 어려운 집안에 큰 도움을 주었지요. 워낙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또 잘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집안이 어려워 학교에 장학금을 신청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학교에서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고 놀랐대요. 그만큼 둘째 아들은 용모가 단정하고 행동이 바르고 공부를 잘해 주위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줄도 몰랐던 것이지요.
맹문재 : 두 아드님의 결과가 대단하네요. 그만큼 어머님의 교육열이 높았다고 여겨지네요.
장은성 : 내가 은로초등학교의 학부모 대의원을 10년 동안 했어요. 내가 우리 동네의 반장도 하고 계주도 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학부모 대의원을 하는 것은 좋아했어요. 그만큼 남편도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때는 수험대지 5백 원씩 받아 선생님들께 드려야 했어요. 그러면 학생 엄마들이 학교 선생님보다 창완이 엄마 보고 준다고 했어요. 그만큼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학부모들로부터도 내가 인정을 받은 것이지요.
맹문재 : 막내아드님 김창익의 학창시절은 어떠했는지요? 창익도 두 형과 함께 은로초등학교를 다녔지요.
장은성 : 막내아들 창익은 중앙대 부속 유치원에 다녔어요. 창완과 창훈은 유치원에 못 다녔으니 막내에게 교육 투자를 제일 많이 한 셈이지요. (웃음) 내가 재봉틀로 삼 형제에게 똑같은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어요. 창익은 영등포중학교에 다녔고,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두 형보다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중학교 때 학교에 가보니 담임 선생님이 제일 잘한다고 했어요. 반장도 했고요. 물론 창훈이도 반장을 했지요. 창익도 공부를 잘해 고려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어요.
맹문재 :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아드님들의 대학 생활과 군 복무에 대해 듣고 싶네요.
장은성 : 창완이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술을 먹었어요. 어떤 학기에는 학사 경고를 받기도 했어요. 그래도 다행히 졸업은 했어요. 막내아들도 술을 잘 먹었어요. 둘째 아들은 잘 안 먹었어요. 시아버지도 남편도 술을 좋아했어요. 우리 큰손자는 술을 안 먹어요. 내가 칭찬을 하니 며느리가 그래도 남자는 술을 좀 마셔야 한다고 했어요. 며느리가 술 마시는 남편을 다 받아주니 참으로 고마워요. 내가 복이 많아요.
창완이는 군대에 가지 않았어요. 중학교 다닐 때 친구가 던진 연탄재에 맞아 눈을 다쳤어요. 가해한 아이가 동아일보 기자의 아들이었는데, 사과는커녕 치료비도 한 푼 안 줘 우리가 다 댔어요. 그래서 창완이는 방위 근무를 했어요. 둘째와 막내는 세종문화학원에서 악기를 배워 군악대로 근무했어요. 그래도 논산훈련소에 가서 기초 훈련을 받았어요. 훈련을 받는 3주 동안 애가 타서 변비를 겪어야 했을 정도였어요.
맹문재 : 자식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이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그럼 이제부터 <산울림> 활동을 들어보고 싶네요. 김창훈 아드님이 작곡한 <나 어떡해>를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셨는지요?
장은성 : 감개무량했어요. <나 어떡해>를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보았어요. 노래를 부른 여병섭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어요. 우리 둘째 아들이 작곡을 잘해요. <나 어떡해>는 진짜 명곡이에요. <산울림>이 탄생하는 역할을 했지요. 노래의 연주도 참으로 좋아요. 음반 회사 사장이 그룹 이름을 <산울림>이라고 지어주었는데 큰아들이 어떠냐고 묻길래 내가 너무 좋다고 했어요. 장충체육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던 공연과 엘에이(LA)에서 한 공연이 정말 좋았어요.
막내가 세상을 뜬 뒤 드럼을 치는 사람을 영입해 <산울림>을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어요. <산울림>은 친형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죽기 전에 막내아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큰아들 환갑 때 <산울림> 팬들이 선물도 주고 잔치도 열었어요. 그때 들어온 화분이 지금 꽃피고 있어요. 매주 수요일 팬들이 아들과 같이 또 딸과 같이 도와주고 있어요. 공연 갈 때도 데려다주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워요. 세 아들이 잘 크고 좋은 노래를 불러줘서 고마워요. 또 내가 복이 많아 귀한 며느리가 우리 집에 들어왔어요. 효부예요. 큰아들도 둘째 아들도 매일 안부 전화를 해줘요. 돈 많은 어떤 사람도 안 부러워요. 요즘은 개종해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쓰고 있어요.
맹문재 :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자주 찾아뵐게요. 늘 건강하세요.
■ 장은성 : 1930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개성공립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결혼해서 그만두고 서울로 오다. <산울림>의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세 아들을 두다.
■ 맹문재 :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평론집 『시와 정치』『현대시의 가족애』가 있다.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