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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도시 청주, 그 많던 책방은 어디로 갔나? | ||||||||||||
70년대까지 호황누린 중앙시장 주변 헌책방 골목의 추억 90년대 성안길 대형서점 전성시대, 현재는 ‘우리서점’ 유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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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추석이라 해도 추석은 추석인지라 아침저녁 날씨가 제법 삽상하다. 보름 전까지도 숨이 막힐 듯 무덥던 여름이 언제 있었느냐 싶다. 저녁 무렵 성안길을 걷는다.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하교한 학생들이 집으로 가기 전 무얼 하려는지 무리지어 성안길로 모여든다. 들녘 논의 참새 떼 같다. 예나 지금이나 성안길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1950년 무렵 청주에는 많은 학교들이 생겼다. 대부분의 초 중 고교가 이때 세워졌는데, 청주중고, 청주여중고, 청주농고, 상고를 빼곤 모두 그랬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가히 한국의 민족성이라고 할 만한 ‘유별난 교육열’에 불이 붙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절대인구의 감소를 일시에 채우려는 듯한 커다란 불길처럼 보였다. 집집마다 예닐곱 이상의 자식을 낳은 것도 당시의 의무 교육정책과 더불어 많은 학교가 세워지는 바탕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때 그시절, 청주역 부근 헌책방 애용 “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거나 “숟가락 하나는 물고 태어나는 법”이라는 속담이 가난하고 배움의 기회가 없던 이 나라 부모를 무언으로 격려(?) 하기도 했다. 사실 큰자식이 막내둥이를 업어 키우는 모습은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했었으니…. 외지인들의 입에서 ‘청주는 교육도시’라 부르게 된 것은 아마 1960년대를 지나며 얻은 이름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교육도시라는 확고한 증거물을 찾아내었으니 그것은 바로 국보4호 용두사지 철당간의 명문에서였다. 철통의 명문에 ‘학원경’과 ‘학원낭중’이라는 교육직 벼슬이름이 돋을 새김으로 나타나 있으므로 물증까지 확실한 ‘교육도시’가 된 것이다. 60년대 70년대를 지나며 전체 인구의 절반이상 학생이었던 청주는 등하교 무렵이면 희고 푸른 교복에 검정 모자를 쓴 학생들만 보이는 도시였다. 그토록 학생 수가 많았기에 책방이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일. 그리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필요했던 헌책방이 많았던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70년대 말까지 청주역과 청주시청 인근인 중앙시장 골목에는 길게 헌책방이 늘어서 청주역에서 기차 통학을 하던 주머니 가벼운 통학생들을 기다렸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대부분 옷가게나 음식점으로 변했는데 이젠 보문서점, 대영서점 등 세 곳만 남아 옛 향수를 팔고 있다. 학교, 학생, 서점 많았던 교육도시
그렇게 소리친 덕으로 큰형은 책값 덤터기를 썼다고 웃으며 얘기했었다. 근 오십년이 넘은 얘기인데 나와 우리집 형제들은 그 헌책방에서 산 많은 헌책들로 교양의 뼈를 굳혀 온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성안길이 된 “本町通 - 본정통, 혼마찌도리”에는 큰 새 책방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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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 청주역 앞에 배문각 서점이 있었는데, 기차 통학 시절 차 기다리다 자주 들어갔지.
헌 책 뒤적이다 비행기 그림만 있으면 사곤 했는데...
콘사이스 새 것은 쌀 두말 값이고 헌책방 헌 콘사이스는 살 한되 값 .......중학교 입학선물 헌 책방에서 누님이 입학기념으로 사주고 시집가셨지 보문서점에서 .... 지금도 간직하지 버테르의 슬픔도 죄와벌. 바다와노인 고전 ....... 문득 고등학교 3학년 예비고사 본 생일날 지열이 용진이 돈원이현숙이 문자 선영이 귀순이 명은이 가 사준 성경책이 눈에 들어오지..... 세월이 무심천을 무심하게흐르 듯 우리도 청주도 책방도 변했구려 잘 읽고가요 석위공 .
어렴풋이 밝아오는 창문을보며 오랜친구들의 두런두런하는 소리들으니, 그느낌이 말이야
어릴적 아침에잠깨어 눈뜰때 마루건너 안방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나즈막하고 푸근한 두런거림을 듣는것만같구먼!!!!
세월이 갈수록 옛일이 새롭구만. 먼산아래 푸르름이 밝아오네..... .
동인친구 오랫만이요 추석은 잘 보내셨는가 건강한모습 보여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