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인(訥人)문학제
김세명
내 고향에는 '한국 비평문학의 효시'인 눌인(訥人) 김환태(1909-1944) 선생이 있다. 그는 34년이란 짧은 생애를 사셨다. 일제 암흑기에(1930-1940) 최고 평론가이자 수필가로 우뚝 선 무주인이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그는 순수문학의 옹호자로서 순수비평의 씨앗을 틔운 기수였다.우리나라 문학비평사에 우뚝 선 거인었다. 우리 문학이 친일문학으로 변모되는 것을 경계하며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는 버팀목으로서 민족문학을 확립하는 기둥이 되었다. 1986년 5월 김동리, 박두진, 이어령을 비롯한 55인의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덕유산국립공원 입구에 김환태문학비를 건립하였다. 문학사상사는 1988년 김환태 평론문학상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순수문학의 옹호자 김환태 선생을 기리고 있다.
2010.11.6. 08:00 눌인 김환태 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북의 뜻있는 문인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무주로 향하였다. 작년에도 참석한 바 있어 금년행사에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이 행사에는 서울대 권영길 교수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과 지역의 군수를 비롯하여 무주문인협회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무주군수는 국비 등 21억원을 확보하여 눌인문학관을 건립중인데 내년 5월경 준공예정이라고 하였다.
눌인 김환태의 연보를 살펴보면 1909년 11월 29일 무주 읍내리에서 출생하고, 1921년 무주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 서울보성고보를 졸업하고 1931년 일본 九州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춘원 이광수와 도산 안창호, 정지용, 이상, 김기림, 김유정등과 문학활동을 하면서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36년 박봉자와 결혼 후 서울 무학여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눌인은 일제의 국어말살정책과 친일보국문학이 문단을 휩쓸자 절필하고 울분의 나날을 보내던 중 건강이 악화하여 1944년 5월 26일 향년 34세로 영면하여 무주읍 당산리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은 미국으로 건너가 장남 영진은 미국 일리노이대학 교수이며 장녀 인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역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작년에는 눌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에 유족이 참석한 바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적상산 사고지를 둘러 보았다. 눌인 김환태의 ‘적상산의 한여름밤’이란 수필을 읽어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눌인의 수필 한 편을 올려 본다.
적성산(赤城山)의 한여름밤
눌인 김환태
우리 고향에서 한 30리가량 되는 곳에 적성산(赤城山)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산허리가 마치 성벽 같은데, 가을이 되면 그 성벽이 빨갛게 물이 듭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적성산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산이 빨간 치마를 두른 것 같기도 하여 적상산 (赤裳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고향 어린이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먹다가는 이 산을 손가락질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가 나이 열 살이 넘으면 아버지 뒤를 따라 그곳으로 땔 나무를 패러 갑니다. 그러다 나이 들어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하면 마루 끝에 장죽을 물고 앉아 멀리 이 산을 바라보며 긴 해를 보냅니다. 노인네들의 대대로 전해 오는 말을 들으면 이 산이 생긴 이후로 아직 한 사람도 그 절벽에서 떨어져 횡사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절벽 밑에 웅크리고 있는 맹수들도 이 산에 들어온 사람은 결코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고향 사람들의 이 산에 대한 정감은 마치 어머니에 대한 그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용모와 마음이 뛰어나게 아름다움은 이 산의 정기를 타고 이 산의 애무 속에서 자란 까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나는 큰 괴로움을 안고 고향에 돌아갔었습니다.
예전 놀던 산으로 시냇가로 싸다니었으나 나의 괴로움은 좀처럼 멎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적성산에 올라가서 그곳 절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새워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산이 서러운 어린애로 하여금 눈물을 닦고 웃으며 일어서게 하는 그런 어머니의 품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는 묵은 절 앞 풀밭에 가 누워서 달을 기다렸습니다. 보름달이건만 앞을 가린 봉우리에 막혀서 스무날 달보다도 늦게 떴습니다. 그러나 그 달은 유독히도 푸르고 맑았습니다. 그리고 그 달이 그린, 절을 둘러싼 그림자는 호수보다도 깊었습니다. 달빛에 잠기자 뭇 풀벌레 소리는 한층 맑고 높아졌습니다.
나는 그만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심장의 고동도 쉬인 것 같았습니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그곳에 정신을 잃고 누웠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박쥐가 집을 짓고 있는 마당 같이 넓은 나의 방에 돌아온 때는 아마 자정이 훨씬 넘었었을 것입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떡을 해 가지고 오랜만에 찾아 오셨습니다. 나는 설움에 복받쳐서 그 떡이 목에 걸려 그만 잠을 깨었습니다. 보니 달그림자가 창문 끝에 겨우 달려 있었습니다. 이윽고 밑에 절에서 새벽 염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해를 나는 전에 없이 거뜬한 마음으로 맞았습니다.(5월26일 오전2시) 1936.7.1 (조광)2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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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환태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나라가 힘든 시기에 문학을 지키셨고,
너무도 짧은 생을 사셨기에 마음이 애잔해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김환태 선생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계절 좋은 산이지만 적성산의 단풍은 기함할 지경입니다. 무진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
일부러라도 눌인 문학관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지금은 공사중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