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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등산이나 벌초하는 사람들이 땅벌에 쏘여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오팟이라고도 불리는 땅벌은 양지바르고 시계가 탁 트이는 곳에 땅굴을 짓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예초기를 들이대거나 땅벌의 출입구를 깔고 앉았을 때는 여지없이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등산이나 벌초를 하러 가서 더욱 주의해야 할 일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술 마신 사람의 입김에 땅벌이 취하면 땅벌은 흥분하여 더욱 공격적이 되는 것이지요. 추석 명절의 교통 체증을 대비하여 벌초를 하고 미리 성묘를 하는 요즈음의 풍속으로 술 한 잔 올리고 음복하는 일이 자칫 땅벌을 흥분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술을 마신 사람은 땅벌은 물론 양봉 벌통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술 냄새에 취한 땅벌은 여지없이 사람을 공격하는데 그것도 얼굴 부위를 쏘이는 것이니까요.
산악회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증평 IC를 나와 지방도로를 달려 괴산군 청천면에 이르렀습니다. 지방도로 길을 우회하다보니 30분이 늦은 3시간이 걸렸습니다.
10시 30분 경, 삼송리 마을 회관에서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대야산을 서너 차례 다녀 온 까닭에 오늘은 일행과 길을 달리 하여 대야산 맞은편에 위치한 둔덕산을 가볼까 생각하였습니다. 곧바로 밀재로 올라 백두대간을 남으로 타고 마귀할미 통시바위 소녀마귀 통시바위를 거쳐 둔덕산을 오라 보고자 하였습니다. 둔덕산 정상에 억새밭이 있다하니 그 모습을 먼저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항일 독립투사 이강년 선생이 둔덕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기에 그 기운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삼송리에서 대야산 중대봉-상대봉으로 길게 이어지는 새로운 산길이 개척되었기에 다음 기회에 답사하기로 미루어두었습니다.
백두대간 대야산 구간을 답사하면서 청화산-조항산-둔덕산-대야산-희양산으로 이어지는 이 구간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이곳에서 역사적 인물이 많이 났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미있고 고풍스런 우리 말 지명이 많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곳의 산세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기운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로는 희양산 정기를 받은 후백제왕 견훤과 둔덕산 정기를 받은 이강년 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후백제왕 견훤은 참으로 걸출하고 신비한 인물입니다. 그는 왕족도 귀족도 부호도 아니었습니다. 변방을 지키는 군장 아자개의 아들로 평민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었습니다. 궁예처럼 왕족도 아니요 왕건처럼 귀족이나 부호도 아닌 평민으로 후백제라는 백성들의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나라, 20세기적 민주주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신라 금성의 왕족과 귀족 세력을 철저히 분쇄해야만하였습니다. 부패한 왕족과 사치한 귀족 세력을 그대로 놔두고는 진정한 백성들의 나라를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풍운아 이강년 선생은 구한말의 걸출한 항일 독립투사입니다. 국운이 위태롭던 구한말, 일본침략에 항거하여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걸쳐 13년간 오로지 의병대장으로 활동하고 순직한 분입니다. 전국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선생은 1858년 12월 30일 둔덕산이 바라보이는 가은읍 완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구한말, 백전백승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항일 독립투사 이강년 선생이 태어나기 사흘 전의 일입니다. 둔덕산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가 신음 소리를 내듯 울었습니다. 농암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에 운강 선생이 태어났고 운강 선생이 태어나자 둔덕산의 울음소리도 뚝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가는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으며 1962년 정부는 운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국민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둔덕산은 마귀할미통시바위, 손녀마귀통시바위, 고모치와 함께 아름다운 암벽 능선이 있는 산입니다. 맞은 편 대야산은 용추폭포, 말십소, 가마소, 벌바위 등의 고풍스런 이름이 재미있는 계곡입니다. 산신 사상으로 출발한 우리나라의 높은 산에는 산신 노고(老姑)가 살고 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에는 삼신할미가 살고 있고 한라산 백록담에는 선문대 할망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둔덕산에는 마고할미와 손녀마고가 살고 있어 재미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마고할미와 손녀마고가 쓰는 통시바위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통시바위란 경상도 방언으로 응가바위라는 말인데 마귀할미와 손녀마귀가 용변을 보는 바위라는 것입니다. 40여 평 이상의 넓은 아파트에는 할머니와 며느리의 화장실이 따로 있듯 이곳에도 화장실을 따로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야산과 둔덕산은 여성을 상징하는 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웃한 희양산과 구왕산은 남성을 상징하는 산입니다. 두 산자락은 백두대간의 줄기에서 장성봉과 막장봉을 사이에 두고 산 태극으로 만납니다. 음양의 기운을 가진 큰 산이 태극으로 어울리니 걸출한 인물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둔덕산 마귀할미 통시바위, 손녀마귀 통시 바위와 대야산 용추폭포, 말십소, 가마소 등은 곧바로 여성을 상징하는 명칭입니다.이것은 운강 이강년 출생 야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모양으로 깊게 파인 용추 폭포나 말십소 등은 여궁을 빼어다 닮았습니다. 둔덕산에 하얀 억새라도 피었다면 마귀할미 통시바위의 의미는 더욱 배가 될 것입니다.
일행은 청청면 삼송리 마을 회관에서 보덕골로 올라 보덕암에 이르렀습니다. 신라 때의 고찰터로 알려진 보덕암은 거대한 거북 바위 앞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거북 바위 아래에는 석간수가 샘솟고 있었습니다. 사찰을 지키는 보살님은 모처럼 찾아온 산행 손님들을 반갑게 맞으며 석간수를 마시라고 안내하였습니다. 아울러 사찰의 명칭을 보덕암에서 석천사로 바꾸었다고 하였습니다. 인적이 드문 산골에 40여명의 산행 인파들이 들이 닥치자 사람사는 마을 분위기과 났을 것입니다. 산신각 아래에 놓인 바윗돌에 호랑이를 끼고 앉은 산신 암각화를 새긴다면 보다 나은 사찰의 풍모를 갖출 것으로 보였습니다.
30분 쯤 걸어 안부에 올라섰습니다. 안부에 올라서니 가을바람이 더욱 시원하게 불어 왔습니다. 솔숲은 여름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데 바람은 여름과의 이별을 사정없이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전망 바위에 올라서니 북쪽으로 희양산의 하얀 암벽이 대야산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널찍한 전망바위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 분재가 있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흙 한 줌 없는 바윗돌위에 겨우 둥지를 틀고 사는 소나무의 생명력이 신선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을 이사철에 전셋값 대란이라는 가난한 뉴스가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전망바위를 지나 통천문에 이르기까지의 구간에는 더덕이 더러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저기에 구절초가 청초한 꽃을 피워 가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워낙 인적이 드문 산길이어서 더덕과 구절초가 그런대로 남아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몇몇 산행 친구들은 더덕을 찾아 산비탈을 따라 다녔습니다.
12시 30분, 대야산 중대봉에 올라서니 전망이 탁 트였습니다. 중대봉에는 점심을 먹는 등산객이 선점하고 있었습니다. 대야산의 위치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경계하고 있기에 경상도에서 올라 온 산행 인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특징은 이곳 대야산 산행에는 여성 등산객이 열에 예닐곱 명으로 과반수를 넘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따라 나섰거나 여성들만으로 대야산을 찾은 등산객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마흔의 세월을 넘어 50~60대 아주머니들이 대야산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이곳 대야산 둔덕산 마귀할미의 손녀임을 자청하여 찾아왔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마음이 편안하고 며느리 눈 밖에 나지 않아야 노년이 편안한 것은 자명한 일이니까요.
중대봉에서 상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고졸한 바위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것은 메 산(山)자를 닮은 바위도 있고 어떤 것은 초가집을 닮은 것도 있습니다. 수 만년의 풍화에 닳고 닳아 모나진 않은 바윗돌에는 푸릇푸릇하고 얼룩얼룩한 바위 옷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모습의 든든한 바위 형상과 그렇게 푸릇한 느낌의 바위가 나는 좋습니다. 어쩌면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의 바위들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나저나 대야산 용추계곡을 다녀간 아주머니들은 분명코 산기운을 받을 것입니다. ♥와 ♡모양의 이단으로 구성된 검푸른 용추폭포를 보고 돌아가면 마고할미가 주는 여성의 기운을 듬뿍 받습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이곳을 찾는 여성 등산객은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가는 것입니다.
1시 30분 경, 대야산 정상인 상대봉에 다다랐습니다. 상대봉에서 바라다보이는 사방의 조망이 광활하였습니다. 첩첩이 겹쳐진 산자락의 그림이 아름다었습니다. 가까이 속리산의 준봉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장대, 관음봉 묘봉으로 이어지는 톱날 능선이 서쪽을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었습니다.
돌바위로 이루어진 상대봉에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장소도 없이 사람들의 발길로 붐볐습니다. 그런대로 그 틈바구니에 앉아 명예대장님과 마주 앉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이제 날씨가 제법 서늘하여져서 김밥 가게에서 김밥을 사 가지고 와도 좋았습니다. 알콜 도수 높은 증류 소주 한두 잔을 정상주로 나누어 마시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였습니다. 바람은 선선하고 햇볕은 따사롭고 하늘은 하루종일 푸르고 맑았습니다.
이즈음 선두로 나선 일행은 벌써 점심을 마치고 일행과 하산 방향을 달리하여 밀재로 내려갔습니다. 아마도 선두 일행은 둔덕산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지난 번 산행 때에 길을 잘못 들어 고모치로 하산하였던 일을 되살리며 길을 잃었던 지점을 확인하러 가는 것입니다.
대야산 상대봉에서는 첩첩이 겹쳐진 동서남북의 조망이 압권이었습니다. 특히 속리산 능선이 한 눈에 조망되어 좋았습니다. 관음봉 문장대도 뚜렷이 보이고 서쪽으로 달려나가는 톱날 능선도 아득하였습니다. 일행은 상대봉에서 피아골 계곡으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습니다. 용추계곡에 이르니 너른 반석위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에 손발을 씻는 인파들이 많았습니다. 반석을 지나 용추폭포에 다다랐습니다. 대야산 자락 최고의 장관인 용추폭포야 말로 비경 중의 비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폭포 양쪽의 화강암 바위에는 용 비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 하다 남긴 자국이라고 하는데 풍화에 만들어진 그럴듯한 바위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이곳 대야산 용추 폭포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어 예전부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하는군요.
용추폭포의 형상은 위아래로 두 개의 용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수천만 년의 기나긴 세월을 쉼 없이 흘러내려 용추폭포 아래에는 검푸른 하트형(♥)의 깊고 푸른 소(沼)를 이루고 그 아래 용소는 쪽빛 푸른 하트형(♡)의 맑은 연못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는 이의 감탄과 미소를 머금게 하였습니다.
윗 용소에서 잠시 머물던 물은 매끈한 암반을 미끄럼 타듯 흘러내려 부드럽게 흐릅니다. 몇 년 전 여름에는 숲 속에 가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용소에 들어가 자맥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용소는 한 여름에 이르러 모험심 많은 청소년들의 애용하는 천연 수영장과 돌 미끄럼틀로 이용되기도 하는 곳입니다.
가마소와 말십소를 지나 마당바위로 나오는 계곡에는 수십 명의 어른들이 마지막 여름 햇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모임들은 흘러간 60,70년대의 노래를 합창하기도 하고 어떤 모임들은 트위스트 음악을 틀어놓고 청춘 남녀의 모습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어떤 모임들은 고스톱을 치고 낮잠을 자며 아쉬운 여름 햇살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나이는 머리가 허연 50,60대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영락없는 10대 후반의 철부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단군 이래 가장 풍족한 시대를 일구어낸 세대들의 뜨거운 에너지는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습니다.
일행과 함께 돌마당 식당에 들렀습니다. 돌마당 바깥 주인은 아직도 수년 전의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분홍색 붕어꽃을 가꾸어 손님을 반기고 있었고 뜨락에는 이 곳 특유의 벌바위를 드문드문 놓아 정원을 장식해 놓았습니다. 벌바위란 벌집 모양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바위로 이곳 특유의 정원석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솔잎 감식초를 한 컵 넣은 동동주 석 되와 파전을 놓고 산행의 여흥을 즐겼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솔잎 감식초 두 병을 사서 배낭에 넣었습니다. 집에 와서 맛을 보니 솔내음이 향긋하고 달고 신맛이 순하여 한 잔 마시기 좋았습니다.
주차장에 이르니 수백 명의 등산객들이 일행들과 어울려 왁자하니 장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추석 대목을 두고 온갖 햇과일과 곡식들이 구색을 맞추어 장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느 새 알밤도 보였고 잘 말린 빨간 고추도 저 데려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대장 사모님이 건네준 잔치국수를 곱빼기로 먹고 빛깔 좋은 머루주를 일행들과 나누어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밀리지 않고 수월하였습니다. 다음 주에는 저도 생거지 진천의 고향에 들려 조상의 묘소에 벌초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암봉과 분재가 어우러진 산행길이 편안했습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하구요.
가은산 둥지봉에 이어 대야산 상대봉의 산행후기를 "개미실 사랑방"으로 스크랩하였습니다. 개미실사랑방 친구들이좋은글을 읽을수 있게 수고해주신 임선생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별 고마우신 말씀을 다하십니다. 러쎌산악회가 없으면 후기가 안 쓰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