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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 루게릭
방송국 성우를 지내다 퇴임을 하고 이제 나머지 인생의 1/3은 아내와
함께 여행과 휴식을 하며 지낼것을 계획했다.
은빛 강가를 달려 햇살 좋은 커피집에서 서로의 잔잔한 주름을 마주보며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反芻)하며 회상(回想)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부부에게 휴식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의일로 만 여겼던 치매가 아내에게 찾아와 가족은 물론 자신의 존재감도 모르고 그저 동물적
본능으로 먹을거리만 찾는 아내의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었다.
잠시도 곁을 비울 수 없는 남편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훔친다.
5일 장터를 돌며 추억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아내가 좋아할만한 음식과 재미있는 악세서리를
사주지만 아내는 생각 없는 아기가 되어 그저 희죽 희죽 웃는다.
그 노부부에게 아름다웠던 추억도 고즈녁하고 편안한 미래는 없어 보인다.
형벌(刑罰)같은 고달픈 현실이 영상처럼 오랫동안 내 마음에서 잊혀지질 않았다.
누군가 말한다..
품위(品位)있는 삶을 살 수는 있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고 추(醜)하다고.
마지막 가는 모습은 지위(地位)의 고하(高下)도,
부자도, 빈(貧者)도 예외는 없다고 한다.
치매... 사랑했던 가족들도 지치게 하다가 결국 대부분이 요양원을 결정 하게한다.
그곳에서는 팔 다리가 침대에 묶이고 욕창과 두터운 기저귀로 방치되기 일쑤다.
환자로써 받아야 할 최소의 삶도 존중받지 못하지만 막상 환자는 그 마저도 인지(認知)하지 못한다.
어쩌면 바라보는 가족들 입장에는 처절한 비극이지만 환자 본인은 먹고 배설하는
일 외엔 아무 생각없이 오랜 시간이 지나간다.
재앙(災殃)이다. 단란했던 한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돈독했던 가족의 애정(愛情))이 해체(解體)되기도 한다.
난 우리의 이 병에 “그래도”란 여지에 명분을 두고자 애쓰는 이유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에게 눈빛이나마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정리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충분히 있다.
난 너무 일찍 마음을 접었다.
아끼던 옷들과 내 추억이 담긴 악세서리를 모두 나누어 주었다.
막장의 씨나리오를 나 스스로 예견(豫見)하며 일찍 써 내려갔다.
아침이 되면 태양의 눈부심과 창문을 열면 뻐꾸기가 날아오르고 검푸른 녹음의 생동감에
잠시 삶의 희열을 느낀다.
나와 그가 함께하는 노(老)부부의 뜰에 화초가 햇살을 받아 건강하게 반짝인다.
연 녹색 잎이 또 하나 새로이 얼굴을 내밀고 맨 먼저 올라왔던 잎은 늘어져 이별을 준비 한다.
인간의 삶도 식물도 이처럼 피고 지는 순환(循環)을 되풀이 한다.
오늘 또 나는 비탄(悲嘆)이란 얼음 속에서 푸른 희망과 같은 한줄기
희열(喜悅)과 깊은 가슴속 열망(熱望)을 해 본다.
나를 향해 겸허히 웃어주는 그에게 나도 답례를 하고 싶다.
초록이 숨 쉬는 뜰에서 싱그런 소녀를 닮은 미소로
“당신과 함께해서 오늘 웃을 수 있어 아주 많이 고맙습니다!!” 라고. |
첫댓글 제가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생기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일 을 한 것이 시립 요양원입니다. 그때는 남들이 할 수없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어르신들과 부딪치는 일들은 절망이었습니다. 거꾸로 내 자식이 성치않는다고 그런 비슷한 시설에 보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사는 것이 바쁘다해도..........저는 1 년 요양보호사 일을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 비참함 속에 저도 미래의 그 어르신들 모습은 아닐까~~~두고두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늘 마지막을 준비하고 산답니다. " 당신과 함께해서 오늘 웃을 수 있어 아주 많이 고맙습니다!! " 이 글귀가 마음을 파고 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알수없슴의 연속이라고...
살면서 운명적으로 힘든 시간이 온다해도 대처하는 모습에 따라 고통일수도 삶의 과정
이라고 의연한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다행이도 아직은 자아를 볼수 있고 성찰의 기회가 아직 있슴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