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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이널 시퀀스의 의미
사랑과 용서
이제 어지럽게 펼쳐진 사건을 종결하고 결말을 맺어야 한다. 그런 기능이 바로 파이널 시퀀스다. 병원을 나선 신애는 처음 미장원에 들른다. 파이널 시퀀스를 굳이 머리 자르는 행위로 설정한 것은 퇴원 이후 그녀의 마음가짐이 어떤지. 다시 말해 장차 어떤 방식으로 삶을 꾸려 갈 것인지. 한때 크리스천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밖에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지 등을 가늠하기 위해서다. 즉 머리 자르는 행위는 새로운 출발을 뜻하며, 동시에 스토리의 결말 역할을 한다.
만약 보조미용사인 살인범의 딸에게 머리를 맡긴다면 신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영화 속 인물이나 관객 모두 긴장이 되는 순간이다. 어쨌든 용서는 피해자의 권한이다. 이 경우 신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권유하는, 남의 잿상에 감놔라 배놔라 식의 훈수꾼 역할로 만족하면 되지 직접 감, 배를 놔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현실은 훈수꾼을 넘어 당사자가 되려하고, 이게 바로 문제의 소지가 된다.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원죄를 졌고, 그리스도는 그런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구원 받는다. 그러니 용서를 받은 우리는 설사 내 자식을 죽인 죄인이라도 그리스도처럼 용서해야 마땅하다. 어떤가 실감이 나는가? 가령 누가 나에게 가공할 피해를 끼쳤더라도 그리스도처럼 과감히 용서 할 수 있는가? 혹 용서 하고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러나 <밀양>이 그렇듯이 설사 용서해주고싶어도 가해자 스스로가 신에게 용서를 구하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확신한다. 피해자가 아무리 용서하고싶어도 용서해줄 수 없는 상황. 어처구니 없게도 피해자가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다는 것. 이게 바로 엄연한 기독교의 실상이자 원리이다.
한동안 침묵 끝에 문을 박차고 나선 신애는 애꿎은 종찬에게 화풀이 한다. 하필 이 미장원이냐고. 아직은 사랑하는 아들 준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할 수 없다.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나? 그래서 넋이 나간듯 초췌한 몰골이지만 용서 문제에 부딪치면 이내 단호해진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영화는 ‘용서’라는 주제를 여러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묘사 한다. 관객은 영화적 흥미 외에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연출자의 관점을 알아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그렇다면 이창동은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가?
모든 종교는 우리가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지만, 설사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회개만 하면 무조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 회개 혹은 뉘우침의 진정성은 무엇으로 확인하고 측정 할 수 있나?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가 누구이고, 어떤 행동을 했는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더구나 용서할 자격은커녕 무조건 의무감만 갖는다면 오로지 신만이 용서를 해줄 수 있고, 피해자는 곁다리 구경꾼에 불과한 것 아닌가?
더욱이 설사 신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또 제대로 된 신앙이라도 용서가 쉽지 않은 판에 한국의 기독교는 용서에 관한 한 인심이 후할뿐 아니라 속전속결로 처리한다. 또한 용서 여부는 단 하나의 척도로 결정된다. “교회에 나오나 안 나오나, 신자인가 비신자인가” 가 바로 그것. 더욱 문제는 중세시대의 교황들이 그랬듯이 신을 대신해서 교회, 목회자가 용서를 대행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가 배제된 용서,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3자가 대신한 용서를 진정한 용서라 할 수 있을까? 침묵하는 신이, 아픔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자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피해자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배제된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은 필연적으로 값싼 용서, 싸구려 사랑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원래 바겐세일로 팔리는 물건치고 질 좋은 게 없는 법이다. 니체는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죄지은 자들은 일단 교회에 나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다. 그 순간 때묻은 양심은 세탁기 속에 돌려져 하얀 표백제처럼 깨끗해진다. 그러나 다시 교회를 벗어나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아편 효과가 떨어지면 때가 묻고, 때가 묻으면 다시 세탁을 하기 위해 아편을 찾는다. 중세의 교황들이 면죄부를 팔았다면 현대의 목회자들은 시도때도 없이 싸구려 아편을 조제하고, 와중에 용서와 사랑은 저잣거리 싸구려 물건으로 전락한다.
신애는 명백히 피해자다. 따라서 용서는 피해자인 신애의 몫이다. 3자인 신이 어떻게 용서할 자격이 있나? 가령 우리의 일상 가운데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거나 해결된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일일이 신이 관여하거나 해결해 주지 않는다. 각자가 책임을 묻고 살펴서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차후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강구해야 한다. 신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선 유괴범에게 법적 책임을 묻고, 왜 그랬는지 -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사회적 문제 때문이라는 식의 접근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일단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잘못을 철저히 규명하기도 전에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고, 바로 이 점이 문제라는 게 이창동의 전언이다. 피해자인 신애는 준의 죽음으로 비유되는 한국사회의 각종 범죄에 대해 쉽게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 용서하기에 앞서 우선 철저히 따지고 규명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철저한 책임 규명을 도외시한 채, 종교를 앞세워 값싼 용서와 사랑을 구한다면 자칫 더 많은 범죄를 양산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적 범죄에 대해 관용적이다. 이렇게 된데는 그리스도가 가르친 사랑과 용서에서 비롯되었기 보다 싸구려 용서와 사랑을 하등 자격이 없는 3자가 무작위적으로 대행하고 있고, 가해자 역시 싸구려 행렬에 편승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과 밖의 생활이 동떨어지게된 배경이다. 그렇다해서 신의 용서와 사랑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용서에 앞서 문제를 자세히 파악하고, 책임을 따지는 행위가 선행된 후 비로소 용서와 사랑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용서 속에 범죄 행위가 묻혀 버린다면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는 것이다.
실존
인간이 종교를 찾는 첫 번째 이유는 감당키 어려운 시련에 부딪쳤을 때다. 삶이 평안하다면 누가 신을 찾고 교회에 나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무리 의지하고 싶어도 없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다행히 실재한다면 몰라도 없다면 말짱 코미디가 될테니 말이다. 이창동을 대신한 신애는 결국 무신론을 택한다. 유괴범에 대한 용서 문제에 직면하자 신이 없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피해자가 해야한다. 신애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자 우선 신을 찾는다. 그러자 처음엔 평화가 찾아오고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아편 주사를 맞자 일시적으로 회복되는가 했던 거다. 그러나 현실의 생생한 고통을 잠시 피한다 해서 해결되는게 아니다. 아편이란 일시적 진통효과, 즉 현실도피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비록 나약하지만, 차마 감당키 어렵지만, 결국 내 자신밖에 믿을 게 없다고. 무신론의 길로 들어선 거다.
서양은 중세신학을 부정하고 계몽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근대 산업사회로 진입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그들이 버린 중세신학을 뒤늦게 받아들이고 있다. 도회지, 시골, 산골 할 것없이 우후죽순처럼 퍼져있는 교회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사회는 첨단의 생명과학, 포스트모던과 사이버스페이스, 우주과학과 로봇, 세계적인 휴대폰 기술과 자본주의가 교회와 성당, 절집, 사주관상, 컴퓨터점으로 상징되는 중세 신학과 사이좋게 혼재된 나라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교회 안에서는 중세적 신에게 절대복종하지만, 교회 밖에만 나서면 이내 신이 부재한 근대, 아니 탈근대 사회로 직행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중세신학에 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태도는 몸은 탈근대지만 정신은 중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하겠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중세신학을 철저히 부정하지만 종교는 긍정을 한다. 종교의 본질은 중세신학자들의 엉터리 이야기에 있지 않고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가 가치를 가지는 유일한 근거는 도덕성에 있다” - 이정우 철학강의록
신애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가 해결하기로 작심한다. 이런 태도는 그녀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행위로 나타난다. 내 머리는 내가 자른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과연 내가 해결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 될지, 도중에 자포자기할지 알 수 없다. 짐작컨대, 고통이 쉽사리 아물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태도는 초연하다. 고통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실존주의는 이런 인간조건을 일러 부질없는 수난이라고 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린애가 죽어야 하고, 멀쩡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부질없는 수난이요 비극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종찬과 신애
그렇다면 정말 신애는 의지할데가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이쯤해서 종찬이라는 캐릭터를 언급해야겠다. 종찬은 사실상 신애와 코드가 맞지 않는 인물이다. 한국의 마초남성을 표상하는 종찬, 그는 한국의 문화, 한국의 현재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압축성장 시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통과한 한국적 남성이 바로 종찬이다. 그렇다면 종찬이 왜 평균적 한국인을 대표하는가.
중세적 초월신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의 기독교, 중세 교황 못지않게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목회자들, 그런 목회자에게 순진하게도 생사여탈권을 맡기는 교인들. 천민 자본주의적 문화와 실상이 정확하게 반영된 한국의 교회들. 이런 교회와 목회자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격리된 게 아니다. 다시 말해, 한 사회의 구조와 문화는 종교적 영역에까지 정확히 반영되고 투영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종찬이 오늘의 한국을 표상하는 대표적 인물이라고 했다. 이 경우 종찬은 한국의 기독교, 천민 자본주의의 중심에 위치한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적 인물이다. 자기 신념이 없이 세태에 편승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그냥 편해서, 그저 습관으로 나간다는 것.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 바로 종찬이고 평균적인 한국인의 모습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대중의 얼굴이다. 평균적인 한국인!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롱테이크 씬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이윽고 카메라는 신애의 잘려진 머리카락과 마당 귀퉁이를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순간 한줌 햇빛이 스쳐간다.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낙옆 한 잎, 쓰레기 몇 개, 구석에 고인 물. 하나하나가 초라한 풍경들이지만 웬지 따스한 느낌이다. 카메라는 패닝과 틸트업 다운으로 풍경들을 보여주다 마당 귀퉁이를 잠시 응시한다. 다시 카메라는 신애의 뒷모습, 거울을 들고 있는 종찬의 헌신적인 모습, 신애의 머리카락을 차례로 훓어간다. 그렇다면 이창동은 3분간의 롱테이크 장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걸까.
인공 때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를 알아서 싸운게 아니다. 미국과 소련을 대신해서 전쟁을 치룬 나라. 신의 존재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맘이 편하니까. 교회에 나가면 복받고 부자되고 천당 가니까. 단지 그것뿐 다른 이유는 없다. 우주선이 달나라를 왕복하고 생명이 복제되는 이 개명천지에 현대판 중세신학과 샤머니즘이 태연히 재현되는 이 땅. 그러나 정작 막다른 상황에 처한 신애가 의지할 곳은 종찬 밖에 달리 없다. 종찬, 즉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 이 사회 밖에 달리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은 슬픈일이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비록 중세신학이 판을 치든, 마초가 활개를 치든 발딛고 있는 이곳을 부여잡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이게 바로 종찬과 신애의 운명이다. 따라서 이창동이 <밀양>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한국사회의 정확한 실상이다. 나아가 종교문화 또한 사회적 실상을 반영하거나 투영하는 것이기에 그는 한국의 기독교를 통해 거꾸로 우리 사회의 혼탁한 풍경들을 치밀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신애의 동생 말대로, 비록 피아노를 전공한 신애(현대)와 카인테리어 사장 종찬(중세 혹은 근대)의 코드가 서로 맞지 않을지라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피아노는 잠시 유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잠시일지 긴 시간일지 알 수없지만, 우선은 이곳의 현실을 껴안고 더 밀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부정하는게 아니라 긍정 하자는 것. 이런 한국을 껴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쉽게 용서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신은 부재하지만, 그래서 약한자들 끼리지만 더욱 옹골찬 몸짓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밀양>은 힘주어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