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닭구이 외 2편
강상기
저 놈은 참 불쌍한 놈이다 눈자위에 칼자국 같은 흉터가 잔인하게 보이는 저 놈은 이제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눈알을 부라리며 나를 위협하면서 심문하는 저 놈도 가정을 지키기 위함이다 죄 없는 이에게 한사코 죄를 불라며 윽박지르고 있는 저 놈도 양심은 있을 것이다 하필 저 놈의 직업이 문제다 자리가 보전되고 특진의 보상이 따르기에 독하고 험한 짓을 하는 거겠지 생각하다가 사는 방법이 저 짓밖에 없을까 슬퍼진다
심연에서부터 식구들 사랑에 설레다가 막막한 외로움에 너울대면서 가슴의 펄을 드러내고 있는 나는 어쩌란 말이냐 식구들 생활의 늪지대를 흔들어 철저히 망가뜨리는 저 놈은 무슨 코끼리 같은 거대한 힘으로 나를 옥죄는 것이냐
대공 분실 지하실에서 벌거숭이가 된 나는 쇠파이프에 매달려 아직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두 팔목은 노끈으로 묶이고 무릎에 깍지를 끼라고 한 후 쇠파이프를 무릎 아랫쪽에 집어넣어 테이블 양쪽에 걸쳐놓고 모진 고문을 하면서 우리보다 월급도 많은데 웬 불평을 그리했냐? 전두환이가 광주에서 만행을 저지른 것을 나도 분개한다 그러나 나도 살아야 한다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 어서 빨리 큰 것 하나 내 놔라 여기 들어온 이상 너는 그냥 나갈 수 없다 독서 서클이 있다면서? 없습니다 이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해! 사실입니다 안 되겠구먼! 아, 죽여라 죽여, 민주주의, 아 민주주의, 자유, 자유 나는 통닭이 되어 뜨거움 속으로 의식이 꺼져가고 있었다
길가 트럭에 설치된 발가벗은 통닭이 뜨거운 열에 구워지면서 쇠막대기에 나신을 걸치고 뱅뱅 회전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는 그렇게 구워지고 있었다 내 가슴에 항시 매달린 잎새의 가족과 함께 나의 꿈은 언제나 지상 밖에 있었거늘 나의 싸움은 맥없이 무너졌다 나는 영영 파멸의 인생이 되어 이 사회에 내팽겨진다 허리케인이나 쓰나미는 저 놈들의 최후를 위하여 필요한 일이거늘 역사는 언제나 저 놈들을 비켜간다
검열
나는 스스로 내 생각을 검열한다 이 말은 해도 좋은가 이 말은 글로 써도 괜찮은가 검열한다 특히 국보법에 저촉될 것 같은 화제가 미치는 술자리에서 나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듣기는 하되 말하지 않기로 한다 들어도 화제를 돌리거나 화장실에 간다 정말 말하고 싶다면 내 생각과 다르게 말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말하지 말자 차라리 쓰지 말자 내 생각과 말은 항상 어긋난다 지구는 둥글다고 알면서도 둥글다고 말 못한 자의 고통이 살아 숨쉬는 사회가 참으로 좋다고 하면서 끝까지 그런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검열의 괴로움이 납처럼 무겁다
활화산活火山
아, 얼마나 참고 견뎌왔던가?
나의 짓눌린 자유를 황홀하게 비워버리자
용공 조작 수사관에 대한 부글부글 끓던 분노도
시커멓게 탄 징역살이의 꽃망울도
먹물 같은 억울한 속울음도
텅 빈 하늘이 아름답고 푸르듯
누명 쓴 죄
아름답게 비워버리자
<시인수첩>
오송회 사건, 결과를 기다리다
나는 교직에서 두 번 이나 쫓겨났다. 80년 서울의 봄, 그 때 교권옹호위원회를 만들어 교육정상화를 위해 앞장선 일이 문제가 되어 사직을 했고, 두 번째는 오송회 사건에 연류되어 감옥살이까지 했다 지금은 이것이 군사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1982년 11월 4일에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국어수업 중 경찰에 강제연행 되었고 그 날 저녁 전북 대공 분실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11월 25일 세상에 알려졌다. 9명이 구속되었는데 한 명은 방송국 간부로 근무하던 중이었고, 나머지 8명은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교사들이었다. 내게 적용된 법조항은 국가보안법 제 7조 제5항, 동법 제10조, 동법 제14조, 형법 제37조 동법 제38조, 동법 제48조였다.
지금도 이 법 조항의 내용들을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하였다. 이제는 2세를 담당한 교사들까지 이념적으로 오염되어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군사정권의 충실한 나팔수 노릇을 했다.
한편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이나 정의 평화위원회 소속 이돈명, 황인철 변호사들이 이 사건의 조작성을 들어서 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반체제적 지식인들을 용공으로 몰아 처벌함으로써 군사독재정부에 가장 불평이 많은 지식인들을 침묵시키고자 조작했던 사건이 바로 오송회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 권의 시집이 발단이 되었다. 이광웅 시인이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의 필사본을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문학에 관심 있는 몇몇 선생님들이 복사하여 나누어 가졌다. 그 필사본을 한 학생이 선생님으로부터 빌려갔다가 버스 속에 두고 내린 일이 생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집을 정보기관에서 취득하여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수사는 이 책을 복사하여 나눠가진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수사 결과 선생님들에게는 별다른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기관에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만들기 위해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까지 다 조사했다. 그래도 혐의가 나타나지 않자 광주문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시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어내도록 했다. 이 문답식 조사에서 반체제적인 답변을 한 사람은 적을 찬양하고 고무했다고 하여 구속되었고, 모른다고 답변하지 않은 사람은 불고지죄를 적용하여 구속했다. 원시적인 조작 수법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통하는 시절이었다. 연루된 선생님들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감옥으로 보내졌다.
오송회五松會 사건이라는 명칭도 그렇다.
4·19 기념일인데도 기념식조차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들 다섯 분이 소나무 밑에서 술을 마시며 현실을 개탄한 일이 있었다. 그 날의 일을 두고 정보기관에서 오송회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다. 참으로 참혹한 시절이었다.
오송회 사건으로 인해 내 인생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가정이 파괴되고 부모형제 간에도 갈등이 생겼다. 출감 후까지도 나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은사나 종교 지도자나 누구나 예외 없이 나를 만나면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있으니까 그랬지 괜히 생사람 잡았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소위 문인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명을 발표하고 석방운동을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협회에서 제명을 하겠다고 법석을 피우는 꼴을 보니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나는 대공 분실에서 20일 동안 가혹한 고문에 의한 강압 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당한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인해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혹독한 고문에서 오는 심한 강박관념과 공포 상태는 나를 정신적 혼미에 빠지게 했다.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도 나를 담당했던 형사가 뒷자리에 앉아있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경찰 의견대로 시인하거나 자백하는 것으로 조서가 작성되었다. 공명심으로 가득한 수사관들이 정부에 비판적이고 정책에 반대한 사람을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반국가사범으로 조작한 것이다. 나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 지독한 대공 분실이 경찰서 유치장보다 차라리 따뜻했다. 경찰서 유치장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다 앞문과 뒷문이 모두 철창이었는데 겨울바람이 몹시 세게 불어서 담요 한 장 가지고 체온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더구나 모진 고문으로 인해서 내 손가락과 종아리 쪽이 심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는데 담당경찰관에게 물파스를 구해달라고 해서 바르며 지냈다. 너무 춥고 몸의 통증이 심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일어나 뛰면서 몸을 움직이면 담당경찰관이 앉으라고 제지하였다. 너무 추워서 그런다고 하면 비디오카메라로 유치장을 감시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하얀 한복 한 벌이 내게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내 추위를 걱정했는지 한복에다 이불솜 넣듯이 두껍게 솜을 넣어 보내주신 것이다. 그 옷을 입으니 얼마나 따뜻하고 좋던지! 그러나 유치장 안에서 하루 종일 대화 없이 무료하게 지내는 일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경찰서에서는 내게 좮정화좯라는 잡지를 읽어보라고 주었다. 정화추진위원회 본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였다. 그 책을 읽어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의 글도 실려있었는데 군사정권에 온갖 아첨을 다하는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정화’시켜야 할 잡지였다.
책을 읽는 도중 문득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이 생각났다. 내일이면 1982년 12월 5일. 우리의 6주년 기념일이었다. 유치장 안에서 내 생각을 어떻게 아내에게 알릴까 궁리했다. 나는 밥 한 숟갈을 몰래 남겨 놓았다가 잡지의 활자를 찢어서 새 내의를 넣어줄 때 묻혀들어 온 종이쪽지에 붙였다. 다행히 내의를 빨래하기 위해서 옷을 뒤집어 보던 아내가 그 쪽지를 받아 읽을 수 있었다. 아내는 나의 내의에서 풍기는 물파스 냄새를 맡으며 그 편지를 읽었다고 한다. 눈시울을 붉히면서……. 지금 이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가는 피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가 회복되도록 재심을 해야 한다고 권고해서 재심이 진행 중이다. 나는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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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기 / 1946년 출생. 1966년 『세대』 제1회 시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 『이색풍토』,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이 있으며,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있다』, 『자신을 흔들어라』가 있다. 현재 서울 이수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