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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4월. 제187차 산행] * 경북 대구 <팔공산>(1,193m) 산행
▶ 2018년 4월 15일 (일요일) ◀
* [산행 코스]☞ 수태골휴게소(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수태골]→ ‘수릉봉산계’ 표석→ 폭포→ 약수터→ 삼거리→ 오도재→ <서봉>→ 오도재→ 마애여래좌상→ <비로봉>(점심)→ 약사여래입상→ <동봉>→ 암릉→ 염불봉 안부→ <염불암>→ 팔공산장→ 부도암→ <동화사>→ 동화사 봉황문→ 마애좌불상→ <팔공산로> 동화사 입구→ [귀경]
* [프롤로그] — 마른 겨울나무에 새 순이 돋아나는데…
사월(四月)이다. 연일 한낮의 기온이 15℃ 안팎의 포근한 봄날이 이어지고 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선 지고, 몇 차례 봄비가 내려서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하늘에서 따뜻한 햇살이 내리니, 모든 생명들이 함성처럼 솟아 올라오고 있다. 눈부신 꽃도 한 철이라 하더니 그렇듯 화사한 개나리, 벚꽃도 다 떨어지고 이제 싱그러운 신록(新綠)이 온 천하를 다시 생명의 땅으로 되살리고 있다. 그 시리고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제 그 초록의 생명들이 희망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에 꽃을 피우고 움을 돋게 하고 싹을 틔우는 것은 다름 아닌 자연(自然)의 힘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우주 대자연의 힘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풀씨에도 작용하여 놀라운 생명의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부활(復活)의 메시지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도 바로 하늘[하느님]의 뜻이다. 이제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도 ‘초록초록’ 새로운 생명과 희망의 새 순이 솟아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마음’으로 산다. 마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준 것은 ‘참다운 마음’[本性]이다. 그런데 하늘은 또 ‘그 본성’의 옆방에 ‘자유 의지’라는 또 다른 마음 하나를 달아주었다. 이 ‘자유 의지’는 천지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에게만 부여한 특별한 은혜이다. 그것은 그 ‘자유 의지’가 안방의 ‘참마음’을 도와서, 영육 간에 인생(人生)을 더욱 풍요(豊饒)롭게 하라는 뜻[命]이다. 본성(本性)에는 인의(仁義)의 도(道)가 자리 잡고 있고, 자유의 방(房)에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는 자유분방한 감정이 살도록 했다. 이 두 가지가 조화(調和)를 이룰 때 인간의 삶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그것이 바로 중용(中庸)의 미덕이다. 예컨대, 집안에 자라는 어린아이[赤子]를 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이유 없이 방긋거리는 그 천진무구(天眞無垢)함이 바로 ‘인간의 참모습’이다. 배가 고프면 그저 엄마의 젖을 찾는 울음소리, 그것은 생명의 순수함이다. 그것을 적자지심(赤子之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성장하면서 이 적자지심 즉 착한 본성(本性)을 잃어버림으로써 엄청난 갈등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한다. ‘자유(自由)’의 방에 그 욕심[私心]이라는 괴물이 자라서 안방의 참마음[公共心]을 밀어내면서 사회적으로 여러 부류의 ‘문제적 인간’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問題)’의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
* [위선자(僞善者)들의 국정 농단(壟斷)] — “깨끗한 얼굴, 뒤로는 더러운 짓 했던 ×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권력집단의 위선(僞善)과 ‘내로남불’이 난장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좌파는 유난히 도덕성(道德性)을 내세워 왔다. 세상을 선악(善惡)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신들은 정의롭고 바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리하여 적폐(積弊) 청산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연이어 드러나는 일들을 보면 추악하기 그지없다. 참으로 역겹다. ‘그 깨끗하다고 하는 얼굴’ 이면에는 오직 이욕 집단의 탐욕만이 횡행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위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 이것은 분명한 국정 농단(壟斷)이다. 이러한 실상을 조선일보 이하원 논설위원이「萬物相」에 썼다.
▶ 논문 표절한 사람이 다른 사람 표절을 비난하고, 아파트 두 채 갖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집 팔라고 하고, 제 자식은 특목고 보내고 다른 사람은 못 가게 하고, 남들은 블랙리스트로 감옥 가는데 자신들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 그런데 이 꼴사나운 ‘내로남불’에 대한 실토가 그들 내부로부터 나왔다. ‘깨끗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안희정 충남지사는 직원 행사에서 ‘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을 언급하며 “남성 중심적 권력 질서에 따른 폭력이 다 희롱이고 폭력”이라고 했다. 그 당시 이미 여성 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참여연대 출신 김기식 금감원장은 평생 1만원짜리 접대도 거부했을 것 같은 이미지를 쌓아왔다. 접대성 출장을 다녀온 다른 사람들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 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구태 정치인들을 능가했다.
‘민주당원 댓글 공작’ 사건의 주범 중 한 명이 체포 직전 소셜 미디어에 이런 글을 남겼다. “2017년 대선 댓글부대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 언젠가 ‘깨끗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 했던 넘들(놈들)’이 뉴스 메인 장식하는 날이 올 것이다.” ‘드루킹’이라는 필명을 쓰며 민주당 권리당원으로 활동해 온 그가 현 여권(與圈) 더불어민주당을 겨냥해 한 말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의식한 듯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어디 구덩이라도 파고 소리라도 질러야겠다.”고 썼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있다. 가게 앞에는 양(羊)의 머리를 걸어놓고 실제론 개고기를 파는 걸 말한다. 그럴듯한 간판으로 사람을 속이는 걸 풍자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내린 조서(詔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양 머리를 걸고 말린 말고기를 팔고, 도척이 공자처럼 말씀을 한다.” 도척(盜跖)은 춘추시대의 큰 도적이다. 남의 것 훔치는 걸 전문으로 하면서도 입만 열면 의리(義理)와 용기(勇氣)를 얘기했으니 위선(僞善)의 전형이다. …
소명(召命)으로서의 정치'를 집필한 ‘막스 베버’는 상대방을 부도덕하게 보이게 해 이익을 취하려는 정치를 하수(下手) 중의 하수로 보았다.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정치는 정작 자신이 부도덕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 동안의 행태를 보면, 건수만 있으면, 아니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편향된 이념의 정의(?)을 부르짖으며, 거리에 나서서 대중을 선동하고, 자기편이 아닌 사람은 ‘마녀사냥’식으로 매도한다. 그리고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여 민심몰이를 해왔다. 이제 권력을 쟁취하였으니 거리낄 것이 없다. 적폐(積弊)를 청산한다며 스스로 적폐를 자행하며 자기 편의대로 권력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위선(僞善)의 철면피,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액튼 경의 말이다.
* [대구의 진산 팔공산] — 낙동정맥에서 서쪽의 내륙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
팔공산(八公山)은 낙동정맥(洛東正脈)에서 서쪽의 내륙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팔공산지맥] 중에 솟은 거봉이다. 팔공산지맥은 낙동정맥의 청송 주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온 산줄기로, 청송 무포산(716m), 포항의 구암산(800m)과 면봉산(1,113m)을 경유하여, 영천의 방가산(755.8m), 군위의 연화봉, 영천의 보현산 시루봉에서 남하하여 거봉 팔공산을 이루고, 계속 서진하다가 칠곡의 가산산성에서 고도를 낮추어 유학산을 경유하여 대구 북쪽 칠곡의 낙동강을 만나면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팔공산(八公山)은 대구의 진산(鎭山)으로 거대한 봉황(鳳凰)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형상이다. 산줄기의 좌측[동쪽]에는 '갓바위'로 유명한 관봉(冠峰)이 있고 우측[서쪽]으로는 ‘파계사’를 품고 있는 파계봉이 펼쳐져 있다. 예로부터 산(山)의 곳곳에 수많은 암자와 고찰이 자리하고 있어, 팔공산 전체가 경주의 남산(南山)처럼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고 있다. 정상 1,193고지의 비로봉(毘盧峯)을 중심으로 동봉(東峯)과 서봉(西峯)이 봉황의 날개의 어깨를 이루는데 정상의 남동쪽으로는 염불봉, 태실봉, 인동, 노족봉, 관봉 등이 연봉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칼날능선, 파계봉, 파계재를 넘어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꺾어져 멀리 칠곡군 가산을 거쳐 다부동의 소아현에 이른다. 특히 오늘 우리들이 오르는 동봉(東峯) 일대는 암릉과 암벽이 어울려 팔공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팔공산 산봉우리의 암벽은 기암이다. 그 장대한 팔공산의 품안에 거찰 동화사(桐華寺)가 자리 잡고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金鷄包卵)의 명당이다. 그래서 동화사 대웅전 들어가는 누각이 봉서루(鳳棲樓)이고, 절의 일주문 이름도 봉황문(鳳凰門)이다. 팔공산은 198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낙동정맥(洛東正脈)] —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의 다대포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정맥이다. 이 정맥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 전 국토의 근골(筋骨)을 이룬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태백산 줄기인 구봉산(九峰山)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와, 영천의 운주산(雲住山, 806m)까지 높이 1,000m에 달하는 산줄기를 형성하고, 월성군 서면 아화리의 낮은 구릉을 넘어 다시 경상남도의 가지산(加智山)을 거쳐 부산광역시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로, 낙동강 동쪽 하구에서 그 맥을 다한다. 낙동정맥은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동해안과 낙동강 유역의 내륙을 가르는 분수령 산맥이다. 정맥의 주요 산(山)은 백병산(白屛山, 1,259m)·백령산(白嶺山, 1,004m)·주왕산(周王山, 907m)·주사산(朱砂山)·사룡산(四龍山, 685m)·단석산(斷石山, 829m)·가지산(加智山, 1,240m)·취서산(鷲棲山, 1,059m)·원적산(圓寂山, 812m)·금정산(金井山, 802m) 등이며, 길이는 약 370㎞에 이른다.
서쪽의 백두대간(白頭大幹)과 동쪽의 낙동정맥(洛東正脈) 사이의 모든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물들은 경상남도 양산 서쪽 삼랑진에서 합수하여 김해 을숙도에 이르면서 남해로 흘러든다.
* [팔공산을 향하는 마음] — 언제나 정겨운 동행하는 대원들
오늘은 멀리 대구의 명산 <팔공산>(1,193m)을 산행지로 하는 긴 여정이다. 오늘 산행에는 김준섭 회장, 조인규·한영옥·장태임 부회장, 박은배 총무, 그리고 김재철·유형상 대장이 포진하고, 호산아·장병국·남정균 고문, 김의락 자문위원이 함께 했다. 그리고 늘 변함없이 참석하는 전진국·안상규·강재훈 님과 그 삼총사의 벗송기성 님도 오랜 만에 나오셨다, 허향순 님, 김재철 님 내외분, 신지호·강완식 님, 김숙이·정석희·신동희·김희태·류경 님도 함께 동행했다, 쾌활한 이명자 님, 농암인 이상복 님 등이 함께 했다. 박현주 님을 비롯한 두 분의 여성 대원, 꽃구름 지기 이달호 님 등도 참석하여 동행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무칠이’ 안수경 님이 참석하여 무척 반가웠다. 산(山)을 지향하는 마음이 따뜻한 동행을 이루었다.
* [산으로 가는 길] — 중부선-영동선-중부내륙선-[상주-동군위]선 경유하는 원행
오전 07시 30분, 서울 능동[군자역]을 출발했다. 오늘의 산행지는 대구(大邱)의 팔공산(八公山)으로, 아주 멀리 가는 여정이다. 우리의 금강고속버스(기사 지태윤)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일로 남으로 질주해 갔다. 거침없이 달리는 우리의 버스는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문경 이화령터널을 통과하여, 경상북도 상주의 낙동J.C.에서 상주-영천간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경상북도 내륙의 동서(東西)를 관통하는 이 고속도로는 작년에 개통했다. 우리는 현대식 건물로 산뜻하게 지은 ‘낙동강의성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고속도로를 올랐다. 그리고 동군위I.C.에서 79번국도로 내렸다. 팔공산(八公山)은, 그 산줄기가 동서(東西)로 뻗어 있다. 산의 능선(稜線)을 경계로 남쪽은 대구광역시, 서북쪽은 군위군, 동북쪽은 영천군에 속해 있다. 우리가 고속도로에서 내린 동군위I.C.는 팔공산의 북쪽이므로, 우리의 버스는 919번국도와 909번도로[팔공산로]를 이용하여 팔공산의 남쪽의 산행들머리인 <수태골 입구>(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이르렀다. 오전 10시 50분이었다.
경상북도의 내륙을 동서(東西)로 관통하는 <상주-영천고속도로>의 동군위I.에서 79번 도로에 내려,
919번도로와 909번 도로를 경유하여 동화사 앞을 지나는 팔공산로에 들어가 산행들머리에 이르다.
*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낙동강 다부동 전투] - 팔공산지맥의 가산 다부동전투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의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월 공세로 한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 저항선을 적에게 붕괴 당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 그 동안 수많은 전사자의 유골을 수습했지만 지금도 유학산에는 여기저기 당시 병사들의 유골이 발견되고 있다. 만약 팔공산 다부동 전투의 낙동간 방어선 무너졌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 다부동전투전전기념관 *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당시 북한군 24,000명과 한미 연합군 1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다부동전투]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
* [산행들머리 팔공산 수태골] — 맑은 봄물이 흘러내리는 수태골
오전 11시, 산행들머리 ‘수태골 입구’에서 산행에 돌입했다. 날씨는 비교적 청명했다. 수태골 입구의 싱그러운 낙엽송 숲길을 앞에서 모든 대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아늑한 숲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포즈를 취한 대원들의 얼굴이, 사월의 밝은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신선한 아침, 완만하게 올라가는 산길은 넓고 쾌적했다. 산길의 왼쪽에 수태골 계곡의 봄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햇살이 밝고 공기는 맑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니 큼지막한 돌로 만든 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넜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맑은 물줄기가 여간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길은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산을 오른다. 산길의 경사는 아주 완만하고 걷기에 아주 좋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대원들의 모습이 정겹다. 오늘 이곳의 산길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가롭고 조용했다.
얼굴에 내리는 화사한 사월의 햇살
조금 올라가니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 표석’에 대한 해설판이 있다. ‘이 표석은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출입금지구역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수릉(綏陵)은 조선조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의 능을 말한다. 봉산계(封山界)는 능(陵)의 유지 관리와 제사에 쓰이는 경비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 구역의 산림을 보호림으로 정하여 일반인의 벌목과 입산을 금지하는 푯말이다.’ 몸이 더워지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겉옷을 벗었다.
* [수태골 폭포] — 너른 암벽에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
길이 계곡의 물과 만나는 지점을 지난다.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다. 이제 완연히 봄이 무르익고 있는 계절이다. 콸콸콸 흘러내리는 물이 시원하고 청랑하다. 산길은 바위들이 박혀있는 흙길이었다. 비교적 가파른 경사의 산길을 치고 올랐다. 조금 올라가니 폭포를 안내하는 표지판가 있어, 나무테크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계곡 안쪽에 과연 시원한 폭포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장대한 수태골 폭포(瀑布)였다. 건조한 봄인데도 그 수량은 적지 않았다. 경사진 너른 암반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가슴을 씻어준다. 폭포는 길에서 조금 내려와 있으므로 앞서간 대원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 수태골의 이 멋진 비경을 그냥 지나치다니….
암벽에 넓게 퍼져서 쏟아내리는 수태골폭포
다시 다소 가파른 경사의 길을 차고 올랐다. 물길과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선두의 대원들이 후미의 대원들을 기다리며 물을 마시며 오이 등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했다. 길가의 마른 낙엽 위에 하얀 봄꽃이 피어 길손의 눈길을 끈다. 봄은 햇살로 내리고 대지는 여기저기 작은 풀꽃으로 봄을 피웠다. 천지 대자연의 기운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치고 오른다. 이제 서서히 경사가 가팔라지는 것이다. 숨을 고르며 묵묵히 걸었다.
봄꽃 현호색
* [약수터 삼거리] — 비로봉-동봉을 향하여 오르는 길
약수터 삼거리에 도착했다. 맑은 약수로 목을 축이고 휴식을 취했다. 길옆에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서봉(0.9km)이고 오른쪽으로 바로 올라가면 동봉(1.1km)이다. 오늘의 산행은 일단 서봉을 오르고 난 뒤, 능선을 타고 비로봉을 경유하여 동봉으로 산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여기서 서봉으로 오르는 길은 그 경사가 아주 급하므로 일단 좀 더 올라가서, 서봉 방향을 잡기고 하고 계속해서 올랐다. 약수터에서 능선을 향하여 오르는 길은 아주 가팔랐다. 해발 1,000m가 넘는 팔공산의 기질을 보여주는 오르막길이었다. 햇살이 따뜻했다. 땀이 많이 솟아올랐다.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는 돌계단과 바윗길이었다. 그렇게 꾸준히 가파른 경사로가 이어졌다.
* [철탑삼거리의 갈림길] — 가파른 바위와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길
작은 능선의 고갯마루에 올랐다. 수태골 주차장에서 2.7km 올라온 지점으로 이른바 ‘철탑삼거리’이다. 이곳에서는 남쪽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케이블카 승차장(1.3km)으로 가고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가면 염불암(0.7km)과 동화사(2.6km)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의 능선을 타고 오르면 서봉-동봉(0.8km)으로 가는 길목이다. 우리는 ‘서봉-동봉’ 방향으로 길을 잡고 산을 올랐다. 완만한 산허리를 지나고 나니 가파른 바위의 돌계단이 이어졌다. 팔공산 능선에 가까워지니 경사가 가파른 암반이나 돌계단이 계속되었다. 대원들이 열을 지어 산을 올랐다. 그 경사가 급하므로 과연 팔공산 이름값을 하는 것 같았다. 몇 차례 산굽이를 돌아 돌계단 길을 오르고 난 뒤 안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니 여러 종류의 통신탑이 서 있는 비로봉이 한 눈에 들어 왔다.
* [비로봉 아래 산록의 갈림길] — 오도재-서봉을 향하여
거기서 조금 올라오니 동봉과 서봉이 갈라지는,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좌측으로 가면 팔공산의 주능선 ‘오도재’에 올라 능선을 타고 서봉(0.8km)으로 가는 길이요, 바로 올라가면 동봉(0.3km)에 이른다. 바로 머리 위로 바라보이는 비로봉(0.4km)은 서봉으로 가는 길목에서 갈라져 올라간다. 그러므로 이곳은 팔공산 주능선 비로봉의 턱밑에 있는 지점이다. 일단 우리 대원들은 이곳에서 서봉을 올랐다가 다시 능선을 타고 비로봉에 이르러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 [팔공산의 주능선 오도재] — 길고 아득한 철계단을 지나 서봉(西峰)의 정상에
팔공산 비로봉 아래 산록의 길을 따라 ‘오도재’를 향하여 나아갔다. 산길은 완만하게 이어져 나갔다. 얼마가지 않아 비로봉(300m) 올라가는 갈림길을 지났다. 오도재는 비로봉과 서봉이 갈라지는 능선의 안부이다. 해발 1,000고지의 산록은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앙상한 겨울나무에는 작은 움이 부풀고 있으나, 좀 멀리서 보면 마른 나뭇가지 그대로였다.
오도재에서 서봉으로 가는 길은 우선 완만한 능선 길이다. 한참을 가다보니 약수터 갈림길에서 서봉으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내려다보니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조금 나아가니 철계단이 앞을 가로 막았다. 아주 가파르고 긴 철계단이 이어졌다.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르는 계단길을 매우 팍팍했다. 계단의 중간쯤에서 돌아보니 각종 통신탑이 솟아 있는 비로봉과 건너편 동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황사로 인해 멀리 바라보는 시야가 좋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황사가, 산의 높은 능선에 올라오니 그 실상이 확인되었다. 길고 긴 계단을 오르니 큰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삼성산’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 옆을 돌아올라 가면 서봉이다. 좁은 암봉에 ‘西峰’을 새긴 작은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후속대원은 많이 오지 않았다. 바로 비로봉으로 올라가 그 아래에 자리를 잡아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했다 서봉의 정상에서 잠시 머물면 사진을 찍고 사방을 조망했다. 황사로 인해 시야가 좋지 않았다.
팔공산 서봉(1,153m)
서봉에서 바라본 비로봉(통신탑)과 동봉
*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 —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애불
서봉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오던 능선 길을 되돌아 비로봉으로 향했다. ‘오도재’를 지나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능선 길, 그 길목의 아래쪽에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곳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가버린다.
‘팔공산 비로봉 서쪽 능선 아래에 있는 이 ’마애약사여래좌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3호)은 왼손 바닥에 둥근 약그릇을 얹어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둔 약사여래좌상으로 자연 바위벽에 ‘돋을새김[浮彫]’을 하였다. 불상은 시원스럽게 생긴 콧대 위에 힘 있는 턱 그리고 뚜렷한 눈썹 등이 얼굴의 윤곽과 더불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깨는 둥글고 탄력감이 있으며 허리를 잘룩하게 표현되었다.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얇은 옷은, 옷주름의 간격이 규칙적이며 가슴에서 옷깃이 한 겹 뒤집어져 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불상의 머리와 몸 둘레에는 이중의 원형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표현하였다. 광배의 안쪽에는 당초(唐草)무늬를, 바깥쪽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연꽃잎을 아래와 위로 향하도록 조각하고, 그 아래에는 입을 벌리고 눈을 부라린 두 마리의 용이 좌우에서 떠받치고 있은 형상을 하고 있다. ‘마애불’는 바위 절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광배(光背)’는 종교화에서 불신의 뒷면에 번지는 빛을 표현한 것이다.
* [비로봉] — 비로봉 산록의 점심식사, 그리고 비로봉 정상에 서다
비로봉 아래 너른 평지에서 대원들이 모여 점심식사를 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산록에서 삼삼오오 모여앉아 환담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었다. 식사 후, ‘毘盧峰’(1,193m) 표지석이 있는 정상에 올랐다. 비로봉은 오늘 산행의 제2포인트이다. 비로봉 주위에는 각종 통신탑들이 여기저기 서 있어 복잡했다. 10여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비로봉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했는데 오늘은 정상에 오를 수가 있었다. 미리 점심식사를 한 대원들은 앞서 올랐다가 동봉(東峯)을 향하여 나아갔다. 결국 서봉에 갔다가 늦게 대원들이 후미 그룹이 되었다. 잠시 몇 장의 인증샷을 누르고 동봉으로 향했다. 산록의 길을 지나 능선 길을 걸었다.
팔공산 주봉 비로봉(1,1194m) 정상
*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 — 풍만한 볼,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동봉으로 가는 길, 널따란 평지가 있는 안부에 이르렀다. 그곳은 산의 북쪽 영천에서 올라오는 길목이다. 이정표가 있는 너른 안부에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서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된 이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은 서쪽을 향해 바로 서 있는 전체 6m의 거대한 ‘약사여래입상’이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동방의 정유리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입상(立像)은 상투 모양의 육계(六髻)를 갖추고 두 볼은 풍만하며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바로 선 발끝은 드러나 있고 발가락의 형상도 뚜렷하다. 옷은 두 어깨에 걸치는 방식으로 입고 치마를 걸쳤다. 오른 손은 무릎 위로 늘어뜨려 손바닥을 안으로 하고 있고, 왼손을 가슴 위에 올려 약(藥) 그릇을 받치고 있다. 옷의 새김은 투박하고 전체 균형도 고르지 못하나 대체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많이 풍화되었다. 옷주름이나 얼굴 모습 등의 조각 솜씨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된 이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팔공산의 동봉(東峯)] — 거대한 암봉으로 솟은, 주변의 풍광이 아름다운
드디어 동봉(東峯)에 올랐다. 오늘 팔공산 산행의 중심 포인트이다. 너른 암봉 위에 날렵한 행서체의 ‘東峯’을 새긴 작은 정상석이 있다. 후미 대원들이 정상석을 중심으로 포즈를 잡았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본다. 황사가 아니면 동화사를 비롯한 사방의 조망이 멋진 풍경으로 다가올 수 있는 곳인데 오늘은 시야가 좋지 않아 아쉬웠다. 이미 대원들이 앞서 갔으므로 서둘러 산행을 계속해 나갔다.
* [팔공산의 장대한 산줄기] — 동쪽 관봉에서 서쪽의 파계재에 이르기 까지
동봉(東峯)에서 이어지는 산의 능선 길은 기암의 암봉과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어. 그 풍경이 아름다웠다. 산의 어디를 가나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진 풍경은 아주 일품이었다. 팔공산의 산체는 토산이지만 주능선은 암릉(巖稜)이다. 그래서 팔공산은 예로부터 기(氣)가 세기로 유명한 산이다. 그 능선이 장대하다. 서쪽의 파계재에서 시작하여 고찰 파계사을 안고 있는 파계재에서 시작하여 파계봉-톱날능선을 지나면 서봉이 솟아있고, 그 다음 안부의 오도재를 지나면 비로봉이 하늘에 닿아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봉이 우뚝하게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팔공산의 정상 비로봉은 비로자나불의 위용을 갖추어 좌측으로 동봉[미타봉]을, 우측으로 서봉[삼성산]이 거느리고 있어, 장중한 품새를 유지한다. 동봉을 지나고 나며 염불봉-병풍바위-신령재-은해봉-노적봉을 지나 ‘갓바위’로 유명한 관봉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능선을 이루고 있다.
* [염불봉 안부] — 동화사로 내려가는 하산의 갈림길
염불봉 아래 안부는 오늘의 하산 포인트로 잡았다. 염불암으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안부에서 선두 그룹의 대원들이 뒤에서 따라오는 대원들을 기다려 내려가는 길을 잡았다. 능선 안부에서 내려오는 길은 급전직하의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지그재그의 산길을 모두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 급경사가 다소 완화되는 길이다. 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군데군데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능선의 막바지에 이정표가 있다. 염불암(0.3km)으로 내려가는 지점이다. 다시 가파른 산록의 길, 얼마가지 않아 염불암 갈림길에 도착했다. 염불봉 안부에서 0.9km로 내려온 지점이었다.
염불봉 안부 (하산포인트)
염불암에서 동화사까지는 골짜기를 따라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가 나 있었다. 우리는 포장된 길이 아닌 그대로 산 능선 길을 타고 내려왔다. 조금 내려오니 빈 집으로 버려져 있는 ‘팔공산장’을 지나, 산골짜기로 내려오는 가파른 길을 타고 내려왔다. 염불암 계곡에 내려오니, 깊은 산의 정기(精氣)가 몸을 풀듯, 맑은 봄물이 바위와 돌들을 치고 쏟아지고 있었다. 맑고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뜨거운 얼굴의 땀을 씻어내리기도 했다. 봄이 흐르는 팔공산 물맛을 보았다. 그리고 포장된 도로가 아닌 계곡의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 [팔공산 동화사] — 유서 깊은 명찰, ‘대웅전(大雄殿)’(보물 제1563호)을 비롯하여
오후 4시 50분, 동화사(桐華寺) 경내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졌다. 동화사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다. 절의 바깥마당에는 아직도 초파일 때 달아놓은 오색의 연등이 그대고 남아있었다. 정면의 큰 다락건물인 봉서루(鳳棲樓)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가니 장중한 대웅전(大雄殿)이 올려다 보였다. 동쪽의 큰 요사채는 화엄당(華嚴堂)이요 서쪽은 큰 요사채는 법화당(法華堂)이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다락누각 봉서루(鳳棲樓)
봉서루의 안쪽
대웅전(大雄殿)’(보물 제1563호)
* [팔공산 동화사] — 동화사의 유래와 중요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동화사(桐華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493년(소지왕 15년)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했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桐華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동화사에서 특기할 만한 유적이 많다. 동화사 국가지정문화재로는 ‘대웅전(大雄殿)’(보물 제1563호)을 비롯하여 ‘아미타회상도’(보물 1610호), ‘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보물 1607호) 등 11점의 국가지정문화재가 있다. 한편 1992년에 건립된 높이 33m의 ‘통일약사대불’은 국민안녕과 민족통일을 기원하는 불사이다.
동화사 비로전(毘盧殿)의 <비로자나불좌상(毘盧遮那佛坐像)>은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였던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구비한 불상으로, 이것 역시 심지의 작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보통 사람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산스크리트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했다. 법신(法身)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부처를 신(身)이라고 하였을망정 평범한 색신(色身)이나 생신(生身)이 아니며, 갖가지 몸이 이것을 근거로 나오게 되는 원천적인 몸을 뜻한다.
동화사에는, 동남쪽으로 약 7㎞ 거리의 관봉(冠峰)에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있다. 이 불상은 638년에 원광(圓光)의 수제자인 의현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하였다. 세련된 이목구비와 자비로운 얼굴이 잘 조화를 이룬 격조 높은 불상으로서 머리에 커다란 갓을 썼다 하여 세칭 ‘갓바위’라고 부른다. 이 불상에 불공을 하고 소원을 빌면 효험이 많다고 하여 참배객들이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한 아녀자들의 참배와 병을 낫게 하려는 참배객이 많다. 불상의 전체높이는 4m에 달한다.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보물 243호)은 입구 주차장의 바른쪽에 있는 큰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다. 이 불상은 상당히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바위가 튀어나와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다. 섬세한 수법과 부드러운 감각, 자비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구름무늬의 대좌는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신라 흥덕왕 때 심지가 조각한 것으로 전한다.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일주문)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보물 243호)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며, 서사원(徐思遠)이 격문을 지어 많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등 호국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민족항일기의 31본산 시대에는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이었으나, 현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청도군·칠곡군·성주군의 4개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다.
* [에필로그] — 따끈하고 구수한 ‘능동국시’로 피로를 풀고
☆… 상경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경내(境內)를 한 바퀴 돌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오후 5시 16분, 동화사를 출발하여 영천-청주간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경부고속도로 진입, 버스전용차로를 타고 쾌주하여 상경했다. 서울에는 오후 9시 30분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한 대원들은 군자역 ‘능동국시’에서, 다함께 따끈하고 구수한 국수를 만찬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오늘 저녁식사는 향이 님이 제공했다. 따뜻한 정성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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