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신약에 있는 우리 사람의 영(1)/ 만나의 새로움
<나의 영>
로마서 1장 9절은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나의 영 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나의 영 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성령이 사람의 영을 낳는 것과(요 3:6),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경배하는 것을 계시한다(4:24).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령 안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영 안의 문제이다. 나는 사도 바울이 “영”이라는 단어 앞에 “나의”를 사용한 것에 감사한다.
<사람의 영과 우리의 협력>
만일 대기 중에 전파만 있고 당신에게 라디오가 없다면 어떻게 그 전파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신기가 있는 라디오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전파를 주의하고 계시며, 우리는 수신기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은 라디오에 비유될 수 있다. 성령은 하늘에 속한 라디오 전파와 같다. 사람 안의 영은 라디오 수신기와 같다. 수신기는 우리의 영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분 편의 일을 모두 이루셨고, 우리는 우리의 영을 주의해야 한다.
그분의 어떠하심과 그분이 이루신 것과 그분이 이루실 것을 받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합당한 기관, 곧 영을 준비하고 훈련함으로써 하나님께 협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성령 편을 해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우리 편에서 우리의 영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믿는 이들이 이의 필요성을 모르고 있다. 대기는 전파로 충만하지만, 우리가 라디오 수신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전파를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에게 라디오가 있더라도 안의 수신기가 잘못되면 여전히 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라디오를 준비해야 하고 수신기를 잘 조절해야 한다. 당신이 라디오를 켜고 채널을 조절하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바로 우리 사람의 영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셨고 모든 것을 돌보고 계신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협력과 동역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 드릴 수 있는 우리의 동역이란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영을 훈련하는 것이다.
<영 안의 할례>
로마서 2장 29절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영 안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않습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오늘날 영적인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의문(儀文, in letter)이 아닌 영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영 안에”라는 말은 앞 절의 “육체 안에”와 대조된다. 유대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에 할례를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적인 할례는 육체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할례는 의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표면적인 종교나 인간의 사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오직 이면적 계시와 생명에 속한 자들이다.
<영의 새로움 안에서 섬김>
우리는 하나님을 의문의 율법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고 영의 새로움 안에서 섬긴다(롬 7:6).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의문의 묵은 것과 영의 새로움을 설명하는 예로 가톨릭의 기도문이 도움을 줄 것이다.
가톨릭의 기도문 책, 이 책에는 결혼식, 장례식은 물론 거의 모든 기도문과 절차까지도 이 책에 수록되어 있고, 필요시 신부가 해당 부분을 찾아 읽으면 된다. 일부 개신교도 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의문(儀文)의 묵은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서로 만날 때도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의 새로움 안에서 섬기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주님의 임재 안에 지켜야 하고, 주님을 접촉함으로써 영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새로움을 갖지 못할 것이고 자연히 묵은 것을 묵은 것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묵은 것을 갖게 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움을 지키기 위해 매일 매일 수시로 주님을 접촉해야만 한다.
<만나의 새로움>
이스라엘 자손들은 매일 만나를 먹었지만 묵은 것이 없었다. 매일 만나의 새로움과 신선함이 있었다(출 16:13-15, 21-22). 이스라엘 자손들은 월요일 아침에 그들의 장막으로부터 나와 만나를 거두어서 그것을 누리기 위해 일주일 동안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 이른 아침에 만나를 내리셨다. 신선한 이슬을 접촉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만나가 언제나 이슬과 함께 내리기 때문이다(출 16:13-14). 매일 아침 만나를 모으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한다.
매일 매일 똑같은 만나이지만, 그것은 매일 신선하다. 나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접촉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원하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매일 아침 똑같은 성경을 대한다. 그것은 똑같은 만나이지만, 매일 아침 신선한 이슬 아래 새로워져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함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과 접촉함이 없다면, 똑같은 성경도 묵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과 접촉함이 있다면 같은 그 성경이 새로운 말씀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묵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 새로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새로움은 하나님 안에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접촉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라면,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다.
40년간 똑같은 만나가 내리고 또 내렸지만 그것은 매일 아침 새로웠다.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늘날 그분의 임재의 새로움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특히 나는 교회 예배 중의 묵은 것을 미워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주님의 임재 안에 새로워지기를 배워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그때 우리는 새로움을 가질 수 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