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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산악회 202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순례산행 !
룸비니산악회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불어도 출정합니다
가야산은 가야산국립공원과 합천군에서는 상왕봉을 주봉으로, 성주군에서는 칠불봉을 주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주봉은 상왕봉(1,430m), 최고봉은 칠불봉(1,432m)이다. 성주군에서는 칠불봉 높이를 1,433m로 표기하고 있으나 지형도에는 1,432m로 표기되어 있다.
국립공원 가야산은 조선8경의 하나로 주봉인 상왕봉(1,430m)을 중심으로 톱날 같은 암봉인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마치 병풍을 친 듯 이어져 있다. 주봉은 상왕봉(1,430m), 최고봉은 칠불봉(1,432m)이다.
상왕봉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해졌던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 해왔다고 하여 우두봉 이라고 불리우며, 상왕봉의‘상왕’은[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가야산은 동서로 줄기를 뻗고 있으며 남북으로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합천 쪽으로 드리운 산 자락은 부드러운 육산을 이루고 성주군 쪽은 가파르고 험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가야산은 오묘하고 빼어난 산세를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표소에서 해인사까지 이어지는 홍류동계곡 주변에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그 아름다움이 해인사와 함께 가야산의 백미로 손꼽힌다.
해인사 초입의 갱맥원에서부터 정상의 우비정까지 19개의 명소가 있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홍류동계곡은 계절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주위의 천년 노송과 함께 제3경 무릉교로 부터 제17경 학사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절경이 10리 길에 널려있다.
가을의 단풍이 너무 붉어서 계곡의 물이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 불리어 웠고 여름에는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도 불리운다. 이 계곡의 아름다움은 봄이나 가을에 으뜸을 이룬다.그밖에도 가야산에는 무릉교, 홍필암,음풍뢰, 공재암, 광풍뢰, 제월담, 낙화담, 첩석대 등의 명소가 있다.
해인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12교구 본사이다. 국보32호인 팔만대장경 경판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 52호인 장경판전을 비롯해서 15점의 보물과 200여 점의 사보등 수많은 문화재와 고적이 있다. 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청량사, 백련암, 원당암 등 75개의 부속말사와 15개의 부속암자가 있다.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海印)이라는 낱말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청정도량 해인사, 이곳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다.그래서 황량한 대지를 방황하는 현대의 이방인들을 다정한 고향의 손짓으로 부르고 있다.
팔만대장경, 높은 탑, 자연의 그윽함이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 그 거룩한 도량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의 의하면 부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와 중생들에게 한 설법과 교화 내용은 생전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했다.
80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이 패엽경(貝葉經)이다.
패엽경이란 최초의 불교 결집에서 만들어진 결집경전(結集經典)으로 패다라(貝多羅)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여 만들었다.
패다라는 인도에서 종이 대신 글자를 새기는 데 쓰였던 나뭇잎을 말하는데, 흔히 다라수(多羅樹) 잎이 많이 쓰였으므로 그렇게 불려졌다.
다라수는 종려나무와 비슷하고, 그 잎은 바탕이 곱고 빽빽하고 길다.
글 쓰느데 사용하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자획(刺劃)을 만들고 먹을 넣는다.
그 크기 6~7 센티미터, 길이 60~70 센티미터 정도이며 양쪽에 구멍을 뚫어 몇십 장씩 실로 꿰어 묶어둔다.
패엽경이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제자들은 생전에 부처님께서 설파한 가르침을 흩어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각자 들은 바를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고 하여 서로 논의하고 모아서 결집(結集)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사서의 칠엽굴에서 가섭(迦葉)을 상좌로 500명의 비구가 모여 경(經), 율(律), 2장(藏)의 정리하여 다라수 잎에 새긴 것이다.
이후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모두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臧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三臧)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梵語) 혹은 빨리(Pali)어로 된 뜨리삐따까(Pitaka)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戒律)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글, 즉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처음엔 이 세 가지 종류의 부처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다라수 외에도 나뭇잎, 대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부처님이 태어난 아열대 지방의 기후는 너무 덥고 습하여 오랫동안 보존 할 수 없었으므로 못쓰게 되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여러 종파들은 제각기 다른 대장경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대표적인 것이 지금 산스크리트어 혹은 빨리어로 기록된 뜨리삐따까이다.
차츰 여러 종파의 인도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사성제. 팔정도를 닦아나가는 엄격한 자기 수행 중심의 소승불교에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대중적 대승불교로 통합되고 경, 율, 논 삼장의 내용을 정비하면서 인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아직은 오늘날 남아있는 것과 같은 형식의 대장경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으로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게 되면서 인도어로 된 불경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처음에 산발적이었던 번역사업은 포교활동과 함께 당시 나라를 통치하던 지배계층이 관심을 갖게 되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불경의 번역사업은 통치의 한 수단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으며 최초로 동진(東晋)의 도안(道安, 344~385)이 한나라 이래의 각종 번역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한 이후 당나라 개원 18년인 730년 지승(智昇)이 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라는 번역서 목록 등은 번역불경을 정리한 좋은 예였다.
중국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오던 불경의 번역사업이 체계적으로 정일되기 시작한 연대는 양·진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수·당 시대까지도 손으로 베껴쓰는 필사본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필사본 번역불경은 옮겨 쓰는 과정에 이중으로 번역되거나 잘못 번역하는 등 정확을 기하지 못했고 종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므로 나뭇잎, 대나무, 나무 껍질 등의 사용으로 보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재료를 찾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돌을 재료로 한 석판(石板)대장경, 금속판에 새긴 금속판대장경도 쓰이게 되었다.
중국 운거서 방산석경 1만여 장은 지금 남아있는 가운데 대표적인, 돌로 만든 대장경이다.
그러나 취급과 보존, 또 인쇄하여 널리 알리는데 편리한 점을 고려한다면 나무를 대신할 만한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목판(木板)대장경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