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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족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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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스크랩 베트남왕족으로,우리나리명문이된.화산이씨.충효당!!
홍왕식 추천 0 조회 101 13.05.21 11: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남국왕에서 화산이씨로

이공온(李公蘊)은 화산이씨의 시조로 안남국(安南國) 사람이다.

교지군(交趾郡)의 왕이었다고 한다.

송나라 진종 대중상주 13년에 안남왕 여환(黎桓)의 차자인 교지군왕 지충(至忠)이 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음란하고, 잔악무도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이공온의 아들인 이명제·이명창 등이 다투어 공격하고자 하였고, 송나라 시랑 능책(凌策)도 병사를 내어 징벌하기를 바랐다.
이때 이공온은 교주 대교로 나가 있었는데 아주 관대하고 인자롭게 정치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감복하였다.

이공온은 병사를 내어 피 흘리지 않고 정벌하였다.

천자가 기뻐하여 정해군 절도사를 제수하였고, 또 교지군왕으로 봉하였으며, 천희 원년 정사년에는 남평왕으로 봉해졌다.

인종 천성 7년 기사년에 타계하였다.

재위는 20년이다.
아들은 이덕정(李德政)으로 역시 교지군왕이다.

인종 천성 7년에 즉위하여 경오년에 서평왕 조덕명과 더불어 공신으로 책록되고 남평왕으로 봉해졌다.

지화 2년에 타계하니 재위는 26년이다.
이용상(李龍祥)은 화산이씨의 중시조이다.

교지국왕 이공온의 6대손이고, 안남왕 이용한(李龍翰)의 아우이다.

본디 인자한 성품이었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형제간에 공경하여 덕망이 높았다.

왕인 형님이 동생의 그러한 덕망을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이용상은 거듭 세 번이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진일희(陳日熙)가 나라를 빼앗는 변란이 일어나자 종리종 보경 2년 그 종족의 군장인 슬포제기(瑟抱祭器)와 더불어 동쪽 바다에 배를 띄워 탈출하였다.

이용상은 1226년(고려 고종 13)에 옹진현 창린도에 표착하여 귀화하였다.

지금의 옹진군 조면 화산리에 살았으므로, 고종으로부터 화산군으로 책봉되고, 화산을 본으로 삼게 되었다.
이용상의 아들은 이간(李幹)이다.

이간은 고려에서 처음 벼슬을 한 화산이씨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벽상3한 3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예문관 대제학 감우문관사 등을 지냈다

정면 가운데

정면 전경

내부 가운데 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원경

내부 가운데 마루 천장

오른쪽에서 본 정면

오른쪽 측면

정면 오른쪽 사경

오른쪽 측면 옆 공간

정문 뒷면

정면 난간

정문 오른쪽 담장 안쪽

왼쪽 측면

충효당의 정문은 작고 아담하다.

한팔 정도 되는 공간에 양쪽 나무판 문을 달고, 그 앞으로 반팔 정도 나아가서 앞 선의 기둥 둘, 또 그 뒤로 반팔 정도 나아가서 뒤 선의 기둥 둘을 키 높이가 조금 넘도록 세워 올리고 위에 지붕을 덮었다.

이 대문은 좌우로 역시 키 높이에 조금 못 미치는 담장을 좌우에 일선으로 거느리고 있다.

정문과 앞 담이 확정하여 주는 공간은 평지가 아니라 원형 그대로의 산기슭이다.

충효당은 산기슭의 기울기를 평면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올려 세운 건물이 아니다.

충효당이 서 있는 바닥면은 그대로 경사면이다.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여 옆으로 기울기를 좀 조정한 흔적은 있지만, 위 아래의 기울기를 잡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은 계단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제 일선의 기둥들이 놓인 지점은 정문 안에 마련된 좁은 안마당 뒷면이다.

주초는 조금 사각 모양으로 다듬어서 썼다.

기둥은 상당한 굵기인데, 제 1선의 기둥은 원형이다.

제 1선의 기둥은 키보다 높은 지점에서 건물의 바닥구조와 만난다.

아래편에서는 마루를 얹기 위해서 종으로 깐 각재들이 수선으로 연이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통나무를 거칠게 각형으로 다듬은 것들이다.

제 1선의 기둥 뒤편으로는 바닥면이 두 뼘 정도 높이의 계단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 윗면의 폭도 그 정도이다. 이 계단은 건물의 양 끝까지 나아간다.

계단의 위편으로 동일한 높이를 갖는 계단이 또 가설되는데, 이것은 건물의 이쪽 측면에서 저쪽 측면까지 일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가설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방이 있는 부분에는 이 계단 면이 마련되지만, 마루가 있는 부분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식이다.

어쨌든 건물의 바닥면은 이런 방식으로 처리되어 실제적으로 건물이 가설되는 평면이 마련되는 것이다

*******

화산이씨충효당!!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220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220

창평리이야기.

화산이씨(花山李氏)는 비(非) 중국계(中國係) 귀화(歸化) 성씨(姓氏)로 시조(始祖)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 왕조(李朝)의 개국왕(開國王)인 이태조(李太祖) 이공온(李公蘊·Ly Cong U?n)의 7대손(七大孫)이며, 6대 임금 영종 이천조(李天祚·Ly Thien T?)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1226년 정란(靖亂)을 맞아 왕족(王族)들이 살해(殺害)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側根)을 데리고 바다 너머 표류(漂流)하다가 황해도(黃海道) 옹진(옹진) 화산(花山)에 정착(定着)하였다.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고종(高宗)은 이를 즉은(惻隱)히 여겨 이용상(李龍祥)에게 그 지역(地域)의 땅을 주어 그를 화산군(花山君)으로 봉(封)하여 정착(定着)을 도왔다.

원(元)나라 침입(侵入)했을 때는 지역주민(地域住民)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以後) 후손(後孫)들이 이용상(李龍祥)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화산(花山)으로 칭(稱)하였다.

화산이씨(花山李氏) 종친회(宗親會)에서 1995년 베트남을 방문(訪問)했을 때, 도무오이 당서기장(黨書記長)을 비롯한 베트남의 지도급인사(指導級人事)들이 이들을 환대(歡待)하고 베트남인과 동등(同等)한 법적(法的) 대우(大愚) 및 왕손(王孫) 인정(仁情) 등의 호의(好意)를 베풀었다.

베트남 인사(人事)가 한국(韓國)을 방문(訪問)할 경우(境遇), 이들을 방문(訪問)하는 것도 관례(冠禮)가 되어, 화산이씨(花山李氏)가 양국관계(兩國關係)에서 가교(架橋) 역할(役割)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政府)는 해마다 리 왕조(李王朝)가 출범(出凡)한 음력(陰曆) 3월 15일이면, 종친회장(宗親會長)을 비롯한 종친회간부(宗親會幹部)들을 기념식(記念式)에 초청(招請)하여 행사(行事)를 진행(進行)한다.

2002년 12월 베트남의 하노이 오페라 극장(劇場)에서 화산이씨(花山李氏)의 시조(始祖)가 된 이용상(李龍祥) 왕자(王子)의 일대기(一代記)를 공연(公演)했다.

본군(本郡)에는 그의 후손(後孫이 봉성창평(鳳城昌平)에 살고있는데 이집은 고려말(高麗末) 10은(隱)의 한사람인 호조전서(戶曹典書) 이맹예(李孟藝)를 비롯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19세의 나이로 문경전투(聞慶戰鬪)에 참전(參戰)하여 훈공(勳功)을 세운 충효당 이장발(李長發)의 후예(後裔)들이 살고 있다.

이봉수(李鳳壽) 1471년 ~ 1534년 자(字)는 경지(景之)이며 호(號)는 팔각정(八角亭)으로 참봉(參奉) 원숙(元叔)의 아들로 출사(出仕)하려할 때 갑사사화(甲士士禍)가 발생(發生)하여 벼슬길을 포기(抛棄)하고 세상(世相)을 등지고 산수(山水)를 벗삼아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에 힘을 기울(氣鬱)였다.

나라에서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의 관직(官職)을 내렸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이장발(李長發) 1574년 ~ 1592년 자(字)는 영백(榮伯)이고 호(號)는 충효당(忠孝堂)이며 화산군(花山君) 용상(龍祥)의 후손(後孫)으로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원숙(元淑)의 증손(曾孫)으로 어려서 재질(才質)이 뛰어나고 의지(意志)가 굳어 배움에 부지런하여 선생(先生)과 장자(長者)들이 나이를 가리지 않고 교유(交遊)하였다.

일찍이 부친(父親)을 여의고 모친(母親)을 섬김이 어느 효자(孝子)보다도 지극(至極)하였고 문장(文章)이 또한 숙휘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읍(邑)에서 의병(義兵)을 이르켰는데 광산인(光山人)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부르니 당시(當時) 나이 19세였다.

분연(憤然)히 적개(敵愾)하는 뜻이 있었으나 모친(母親)이 계심(桂心)을 어렵게 여겨 모친(母親)에게 들어가 아뢰니 모부인(母夫人)이 “남자(男子)가 세상(世相)에 태어나 국가(國家)를 위하여 죽는 것은 유감(遺憾)없는 일이다.

너는 모름지기 국가(國家)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죽고 사는 것을 이 늙은 애미를 위하지 말아라” 이리하여 문경(聞慶) 진중(陣中)에 달려가 왜적(倭敵)을 맞나 혈전(血戰)한 나머지 전사(戰死)하기 직전(直前)에 시(詩)에

백년(百年) 사직(司直)을 보존(保存)하려는 계책(計策)으로 6월에 군복(軍服)을 입었네 국가(國家)를 근심(謹審)하다 몸은 헛되이 죽으나, 어버이 못잊어 혼백(魂帛)만 홀로 돌아가네(백년재사계(百年在社計), 유월저융의(六月著戎衣), 우국신공사(憂國身空死), 사친혼독귀(思親魂獨歸)라 하고 장렬(壯烈)히 전사(戰死)하였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격문(檄文)에 따르면 천성(天性)이 순효(純孝)하고 풍모(風貌)가 뛰어나 기상(氣象)이 늠늠하다 하였고 그 스승인 동강(東江) 권사온(權士溫)은 대기(大器)라고 인정(仁情)하였고 그 시신(屍身)을 찾을때 죽은 모습(冒襲)이 바람을 몰고 우레(又賴)를 굴리는듯한기상(氣象)이라고 하였으며 신야옹(新野翁) 이인행(李仁行)은 유허비(遺墟?)명(名)에서 “그 대절(大節)을 세워것은 독실(獨室)한 학문(學問)의 덕(德)과 선조(先祖)가 가르친 의리(義理)를 몸소 실천(實踐)한 것이라”고 하였다.

직장(直長) 황소공(黃昭公)이 죽음앞의 시(詩)를보고 감동(感動)하여 당(堂)에다 “충효(忠孝):두 글자를 써불여 정려(旌閭)를 대신(大神)하였으며

또한 감사(監司)의 계문(啓文)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행장(行狀)은 참판(參判) 문소(聞韶) 김희주(金熙周)가

묘지명(墓誌銘)은 생원(生員) 권은래(權恩?)이

유허비명(遺墟?銘)은 익형(翊衡) 신야(新野) 진성(眞城) 이인행(李仁行)이 각각(各各)지었다.

이휘봉(李輝鳳) 호(號)는 난포(蘭圃)로 충효당(忠孝堂)의 후예(後裔)이며 헌종(憲宗) 때 생원(生員)을 하였다.

이유안(李惟顔) 자(字)는 자우(子遇)로 인조(仁祖) 때 참봉(參奉)을 하였다.

이종연(李鐘淵) 자(字)는 회일(會一)이며 음직(蔭職)으로 주사(主事)를 하였다.

이택용(李澤龍) 정조(正祖) 때 ~ ? 자(字)는 운휘(雲徽)이며 호(號)는 석거정(石居亭)으로 학행(學行)과 덕망(德望)이 있었고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사림(士林)으로부터 상를 받았다.

이원효(李源孝) 고종(高宗) 때 자(字)는 시립(始立) 이고 호(號)는 괴와(槐窩)이며 학행(學行)과 덕망(德望)이 높았으며 저서(著書)로는 괴와집(槐窩集)이 간행(刊行)되었다.

바다처럼 넓은 들판이 뻗어있는 곳, 창평리

봉화 법전 사이의 36번 국도는 유곡·동양을 거쳐 창평에 이른다.

창평은 동양의 동편으로 붙어 있는 마을이다.

36번 도로는 동양을 지나 동행하여 은행정에 이른다

. 여기서부터 창평리이다.

은행정은 행정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행인들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고 한다.

은행정에서 동쪽으로 조금 나아가면 창평리이다.

이곳은 창해, 창바다라고도 한다.

넓은 들이 있는 곳이라서, 창해를 바다처럼 넓은 들이라고 창바다로 불렀다.
36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는 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들이 있다

. 마을은 상당한 규모이다.

이 마을에는 충효당 정자와 비각, 종가가 있다

. 창평리의 동쪽으로는 사선을 그리며 시내가 흘러내린다.

이 시내는 36번 도로를 넘어 건너편에 있는 창바다 들을 적신다.

그 물길은 36번 도로의 남쪽을 타고 흐르다가 동양마을의 신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길을 건너고 금봉천과 합류한다.

창평천이 동양마을의 신기고을에 이르기 전, 36번 도로 남쪽에 펼쳐진 창바다의 남서쪽 끝부분에서 만나는 마을은 지밑고을, 또는 지동이라고 한다.

창바다 마을의 맨 끝, 바다 밑에 낮게 위치하는 마을이라고 해서 지밑고을이다.
창평천은 창평리 북쪽 편에는 너른 저수지를 두고 있다.

봉화군 내에서는 제일 커다란 규모의 저수지이다.

저수지 위쪽은 서쪽으로는 갈방산 영역이고, 북쪽으로는 구망이재이다.

갈방산과 구망이재 사이의 골짜기들은 물을 모아 창평 저수지로 흘려보낸다.
창평저수지와 구망이재 사이에는 소금 고을이 있다.

일제시대에 여기 소 한 마리만한 크기의 금덩이가 매장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자로는 둥지 소(巢)자, 짐승 금(禽)자를 쓰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짐승들만이 둥지를 짓고 사는 깊은 산골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지어졌던 것 같다. 그 이름의 우리말 음으로부터 소와 금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나온 것이라고 추측하여 볼 수 있다.

이곳은 창평리의 북쪽 깊은 골을 이루고 있고, 그 수원지가 되는 곳이므로 마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지점이다.

그런 까닭인지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창평리는 골이 깊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특징과 물이 풍부하고 들이 넓은 곳이라는 특징을 아울러 지닌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이 깊고, 아래쪽으로 내려서면 벌이 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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