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이지 않은 평상 앞의 신발, 수렵총 벽화의 고구려 귀족부부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임아 건너지 마오. 그예 임은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네. 이 임을 이제 어찌하리오.’
어디선가 백발이 성성한 한 늙은이가 나타나 휘적휘적 강 가운데로 걸어들어 가더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늙은이를 뒤따라오면서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소리치던 노파도 잠시 망연자실, 물가에 서서 늙은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소리치며 울더니, 지니고 있던 악기를 꺼내 노래 한 곡을 연주하더니 역시 그 뒤를 따라 강 가운데로 걸어들어 간다. 잠깐 사이 일생을 함께 한 듯한 노인 부부가 강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강물은 다시 유유히 흐를 뿐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나루터지기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낮에 겪은 일을 말하여 주었더니 아내가 백수광부의 아내가 탔던 그 악기 공후인을 연주하면서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로 알려진 ‘공무도하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이다.
수렵총(옛지명: 평남 용강군 대대면 매산리, 평남 온천군 화도리, 현지명: 남포시 와우도구역 화도리) 벽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부부그림이다.

(그림1)
정면을 향해 평상 위에 앉은 모습의 네 사람. 물론 한 사람은 무덤주인이고 다른 세 사람은 그의 부인들이다. 상서로운 기운이 몸 좌우로 두 줄기씩 뻗어 나오는 무덤주인의 외양은 佛像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머리의 오른쪽 위 약간 떨어진 지점에 먹으로 ‘仙寬’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일부에서는 이 묵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인물상이 그려지는 방식으로 볼 때에 무덤주인이 내세에 신선이 되어 선계에서 살기를 원했을 가능성은 그리 낮지 않다.
무덤주인의 세 부인은 그의 오른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모두 두루마기를 걸쳤고 두 손은 소매 안에서 앞으로 모아 잡았다. 역시 이들의 몸 좌우로도 상서로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으나 무덤주인과 달리 한 줄기씩이다. 흥미로운 것은 무덤주인이 앉은 평상과 둘째, 셋째 부인이 함께 앉은 평상 앞에는 목이 긴 가죽신 한 켤레씩 옆으로 나란히 놓였지만 첫째 부인이 홀로 앉은 평상 앞에는 아무 것도 놓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무덤 발굴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첫째 부인 앞의 빈 공간에도 가죽신이 그려졌다가 습기 등으로 말미암아 지워졌을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무슨 까닭일까.
온돌방에서 지내는 우리 민족에게 실내와 실외는 뚜렷이 구분되는 생활공간이다.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신발을 신는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에 살던 시절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불러낼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그 집 방문 앞 섬돌 위에 신발 몇 켤레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보고 판단하던 습관이 있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굳이 신발의 존재 여부를 기준으로 짚어본다면 평상 위에 사람이 그려있지만 수렵총 무덤주인의 첫째 부인은 그 곳에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수렵총 보다 50여 년 가깝게 먼저 그려진 덕흥리벽화분에는 무덤주인의 초상이 두 번 등장하는데, 수렵총 벽화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안벽에 그려진 두 번째 초상이다.

(그림2)
안벽 가운데에 그려진 장방 안 화면 왼쪽 공간에 평상이 마련되었고 그 위에 무덤주인 鎭이 정면을 향해 앉아 있다. 장방 안 화면의 나머지 반에 해당하는 오른쪽 공간 곧 주인의 왼편은 비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 모습도 이름도 알 수 없는 鎭의 부인이 그려졌어야 할 곳이지만 무려 1,6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 공간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방 바깥의 장면만으로 본다면 무덤주인의 부인은 이미 남편이 와 있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행을 마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화면 오른쪽, 장방 바깥의 공간에는 부인이 탄 수레와 시녀들이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인은 차양으로 가려진 수레 안에 앉아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부인이 장방 안에 그려지지 않은 것은 주인 진의 장례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어 무덤 문이 닫히는 시각까지 실제 부인이 이 세상을 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덕흥리벽화분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이 앉은 평상 앞에는 수렵총 벽화에서와는 달리 신발이 그려져 있지 않다. 대신 무덤주인의 부인 자리를 비워 놓음으로써 부인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덕흥리벽화분의 주인 진은 이 세상을 먼저 뜨면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내세로의 여행을 무척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수렵총에 묻힌 고구려귀족은 둘째, 셋째 부인과 함께 내세로 떠나면서 뒤에 남은 첫째 부인까지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듯하다. 아직 살아 있는 첫째 부인의 초상을 자신과 함께 그려 넣게 한 것이다. 아내는 여럿이었지만 첫째 부인과는 결혼과 함께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수의를 같이 마련한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일까. 뒤에 남은 첫째 부인도 검은머리가 파뿌리처럼 희게 될 때까지 남편과 함께 한 날들을 떠올리며 아름답고도 슬픈 옛 노래 ‘공무도하가’를 연주했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