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라인상에서 각국의 여학생 교복패션을 비교하며 ‘태국 교복’이 가장 섹시한 교복으로 꼽혔다는 ‘흥미성’외신기사가 화제가 됐다.일본의 한 언론에 따르면 몸매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블라우스에 총 길이가 20㎝가 안되는 초미니스커트를 태국 여학생(여대생)들이 일상 교복으로 착용한다고 하는데.온라인상에 떠도는 태국 여학생들의 교복복장을 보니 태국 (남성)선생님이나 교수님들은 천장을 바라보며 수업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태국왕자' 닉쿤도 공연중 방문한 태국 여학생들을 보면 큰 실수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태국을 방문해 본 적이 없어 보도의 진위여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설마 모든 학교 교복이 저렇게 다 똑같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사실 ‘유니폼’이란 것은 외부인들이 보는 만큼 내부에선 동질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있지 않은 경우도 많고,일반적인 인식과 달리“어떤 나라의 특징적인 유니폼은 이거야”라고 단정할 만큼 널리 확산되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논의는 “한민족은 역사이래 흰옷을 즐겨입었다”는 ‘백의민족’신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하고,즐겨 입었다는 점을 의심하진 않지만 과연 정말로 흰옷을 좋아하고 흰옷만 고집했는지를 냉정히 따져본 적은 거의 없다.그리고 당장 주변만 둘러보더라도 고 앙드레 김 패션을 제외하고 한국사회에서 흰옷을 구경하긴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반만년 전통이 최근 수십년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최공호 박사가 최근 정리한 백의민족 전통에 대한 재검토글은 한민족의 유니폼으로 여겨졌던 ‘흰 옷’의 의미와 실상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최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백의민족에 대한 관념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비롯해 일제시대에 여러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한다.이처럼 일제시대에 ‘백의민족’개념이 부각된 것은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미술에 대해 ‘색체 결핍론’과 ‘비애미’를 들고 나온데 대한 반론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고 여겨진다.그렇다면 과연 흰옷 착용은 한민족을 타 민족과 구별시켜주는 특질이었을까?
일단 역사 기록들을 살펴보면 각종 역사서속에서 “한국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래 빈번하게 발견되는 편이라고 한다.하지만 한민족이 백의민족으로 흰옷을 고집하고 선호해다는 개념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확대해석된 부분은 없는지 학술적으로 논증된 적은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흰옷’을 언급한 주요 사서내용들을 소개해 보면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인들은 흰색 옷을 숭상해 흰옷에 소매가 넓은 포와 바지를 입는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복색은 흰색”이라는 묘사가 나온다고 한다.『구당서(舊唐書)』 『북사(北史)』 『고려도경(高麗圖經)』 등에도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고 한다.이후 1487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출신 중월의 저술인 『조선부(朝鮮賦)』에 이르기까지 흰옷은 외국인의 시선에 두드러진 한민족의 특징으로 포착됐다.
이같은 현상은 19세기말∼20세기초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한국 묘사에서도 반복된다.구한말 대원군 아버지 묘를 도굴했던 독일인 오페르트도 “남자나 여자나 옷 빛깔은 모두 희다”는 기록을 남겼다.조선을 여행했던 영국인 커즌은 “한국 여성의 운명은 어디서나 밤늦도록 계속되는 빨래로 상징된다”면서 “한국 남자들이 흰옷을 입는 이유는 여자들을 계속 바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이자벨라 비숍 역시 “주인이 흰옷을 이븐한 여자들은 빨래의 노예”라고 지적할 정도로 한민족의 흰옷 문화는 외국인들에게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였다.
이처럼 한민족이 오랜 기간에 걸쳐 흰옷을 많이 착용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하지만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해서 하얀옷을 입어온 것이고,백색 패션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 등 현재까지 전하는 전근대 시기 당대의 시각자료에선 흰옷에 대한 숭상을 확인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오히려 다양한 색깔과 문양의 컬러풀한 패션을 당대인들은 그림으로 남겼다.
더 주목되는 것은 조선시대 적지않은 문헌들이 한민족이 흰옷을 피하려고 했다는 기록들을 전하고 있는 점이다.19세기 문인 이옥은 그의 문집에서 “우리나라는 푸른색을 숭상해 백성들이 대부분 푸른옷을 입는다.남자는 겹옷과 장삼이 아니면 일찍이 이유없이 흰옷을 입지 않았고,여자는 치마를 소중히 여기는데 더욱 흰색을 꺼려 붉은색과 남색 외에는 모두 푸른 치마를 둘렀다.…(상복 등)이유없이 흰의복을 입지 않았다.다만 영남 우도만은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으며 아녀자 중에 갓 시집온 사람일 지라도 흰치마 저고리를 입는다”고 주장했다.
즉 이옥의 기록이 어느정도 신뢰성을 지닐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19세기 충청도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흰옷을 많이 입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이는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다녀오는 ‘수원능행도’에 등장하는 백성중 상당수는 흰옷이 아니라 쪽염으로 보이는 청색치마를 입은 이가 의외로 많다는 점에서도 방증된다.조선말기와 근대기에 이르러서야 상하의 모두가 흰색인 서민 일상복,백의 패션이 보편화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제기되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 내내 지배층들의 글에선 흰옷을 상찬하기 보다는 통제하고,비판하는 글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이는 유교의 음양오행설에 따라 동방에 위치한 조선인은 백의가 아닌 청의를 입어야 한다는 명분론에다,흰옷이 상복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유에 따른 관념적인 글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당대인의 사고와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록들이다.
『임하일기』에선 “명종 을축 이후 누차의 국휼을 거쳐 소의(素衣)를 입으니 중국인들이 이를 비웃었다.선조 때 이를 신금하여 사인 무직자들도 홍의 직령을 입었다”며 “영조 2년 교지에 이르길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으니 의당 청색을 숭상해야 하니 위로는 공경부터 아래로는 사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청의를 입으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1429년 2월 5일)에도 “사헌부에서 관직을 가진 사람들은 백색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는 계를 올리자고 가납한 바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인조는 “소학에 이르길 자제(子弟)가 된자는 의관을 순백색으로 하지 않는다”며 “흰옷을 입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니 의당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적어도 왕가와 사대부에선 상·재례를 제외하곤 흰옷을 거의 입지 않았고,백성들이 흰옷을 입는 것을 남부끄럽게 여긴 것이다.이는 당대인의 표현용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즉 “산림(山林)의 한낱 백의(白衣)”라거나 “백의종군(白衣從軍)”같은 표현처럼 낯춰 부르는 사례에서나 흰옷이 동원됐다.
백성들의 경우도 흰옷을 좋아해서 입었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흰옷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흰옷이 장려되기 보다는 금지대상 이었음에도 계속 흰옷이 사용된 것은 백성들이 지배층에 저항할 정도로 흰옷을 선호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다른 옷을 입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한마디로 왕명을 거스를 만큼 흰옷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절대빈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흰옷을 입었고,지배층은 이를 묵인할 수 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표현처럼 서민들도 색깔옷을 좋아했지만 경제적 여력탓에 흰옷만 유니폼처럼 계속 입었다.실제 성종조에 ‘회백색 겉옷을 입은자는 장 80대에 처한다’는 『경국대전』 조문을 근거로 법을 어긴자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성종은 “빈민들이 한꺼번에 갑자기 고쳐입을 수 없을 터이니 반년을 기다렸다가 그래도 안고쳐지면 그때 형량을 줄여 태50대를 치라(『성종실록』 1471년 2월 30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현종때 영의정 정태화도 “흰옷을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가난한 선비들이 이런 흉황을 당해 갑자기 바꿔입기는 어렵다(『현종실록』 1670년 7월 23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백의민족은 한민족이 수천년간 애착을 가져온 전통이자 국민 유니폼이라 단정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는게 최근 학자들의 주장인 셈이다.섹시하고 관능적인 ‘태국 교복’사진과 기사를 보면서 “과연 태국 교복이 모두 저처럼 섹시할까”란 생각을 하다,문득 백의민족 신화를 의심해본 글이 생각나 끄적끄적 정리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