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창세기 제 26 장 '그 말씀'
본문: 창 21:1-7
1-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6-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Introduction: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저도 길거리에서 그냥 잘 못 지나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오뎅을 파는 곳입니다. 저는 길을 다니면서 따끈한 국물에 오뎅을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한 저의 경험에 의하면 오뎅은 부산오뎅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국물에 대한 나름의 철학도 있습니다. 국물이 제대로 된 국물이 되려면 무가 좋아야합니다. 좋은 무를 넣어 잘 끓어야 시원한 오뎅국물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오뎅국물의 핵심은 좋은 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즐겨보는 것을 저라고 안 볼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도 '맛있는 청혼'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두 중국 집간의 갈등과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 집 이야기니까 당연히 자장면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자장면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손 수' '때릴 타' 수타능력에 있습니다. 어떻게 수타하여 면을 잘 뽑아내느냐가 자장면의 맛을 좌우합니다. 자장면의 맛은 수타된 면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핵심을 바르게 파악하고 거기에 힘을 집중하는 것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핵심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의 사람도 맥을 같이 합니다. 상황은 누구에게나 다 복잡하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상황의 핵심을 파악해서 심플하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전혀 달라집니다. 큰 믿음의 사람은 핵심을 제대로 붙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리더십의 대가 스티븐 코비는 이 원리를 '원칙중심의 리더십, 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이라는 책에서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핵심을 붙든 리더, 원칙 중심의 리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원칙 중심의 리더는 급변하는 환경에서도 자신과 조직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조직원들의 잠재능력을 극대화합니다. 원칙 중심의 리더는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조직에 자율과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창조력과 에너지를 분출시킵니다. 이런 리더가 핵심을 제대로 붙들고 있는 리더임을 아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핵심을 제대로 붙들고 있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리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성공한 듯 자기도취에 빠진다면 그 공동체는 크나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경제를 보십시오. IMF이후 잠깐 회복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담당자들이 그것을 개혁의 성공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제대로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 먹으려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이런 잘못된 판단 때문입니다. 잠깐 회복되었을 때에 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구조조정을 잘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장기적인 불황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을 붙들고 말씀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큰 흐름을 파악하고 말씀에 접근해야합니다. 자신을 합리화시키거나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말씀에 접근하면 말씀이 여러분을 되려 backfire, 역공격합니다. 자기 함정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그런 죄인된 우리를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 큰 핵심을 중심으로 말씀에 접근해가야 합니다.
Point 1: 그 말씀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를 하나 만납니다. 그 단어는 '그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1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보세요. 그 말씀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 말씀대로, 그 말씀대로.' 이 1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핵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타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을 자세히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권고하시다'는 말은 '복을 주시다 혹은 은혜롭게 대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원래 뜻은 '방문하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있어 사람을 방문하시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라의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그의 몸을 보십시오. 나이가 90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폐경기를 지나도 훨씬 지난 나이입니다. 사라 자신이 자신의 몸을 너무도 잘 압니다. 자신을 볼 때 새 생명의 소망은 더 이상 없음을 자기가 너무도 잘 압니다. 창세기 18장을 보세요. 사라가 뭐라고 합니까? '나도 노쇠했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상식적으로는 생명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한 줄기 빛이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된다고 하신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이르러 그 하나님께서 사라를 권고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그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말씀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권고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생을 방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임을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자 어떤 상황이 벌어집니까? 호세아의 표현대로 대적들이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덮칩니다. 그들이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북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700년이 지납니다. 남유다로 보면 400년이 지납니다. 그 기간동안 말씀이 사라집니다.
이 황폐했던 땅에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전에는 그 땅이 모두 사라의 몸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심령 또한 아브라함의 몸 같았습니다. 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생명이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점점 강퍅해지고 그 몸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 부부의 몸이 상징하는 바를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죄인 된 우리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죄의 심각성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드는 죄의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의 몸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망 없는 몸에 변화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나님께서 방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회복의 시작입니다.
중국의 한 혁명가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피의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혁신을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홍위병이라는 소년들을 동원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것이 중국을 변화시켰습니까? 새롭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그 사건이 중국을 되려 퇴보시켰다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자신의 열심에 따라 새로운 종교를 박해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도 가담하며 자신의 열심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방문하셨습니다.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그에게 부으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을 뭐라고 부릅니까?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한 훼방자라 부릅니다. 핍박자라 부릅니다. 폭력도 불사했던 포행자라 부릅니다. 결국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말합니다.
이 변화가 언제 일어납니까? 은혜가 역사하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방문하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방문으로 회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찾아오셔서 그 인생을 놀랍게 일으킵니다. 죽은 몸을 일으키십니다. 소망 없는 인생을 일으키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이 은혜를 거부할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분이 몸으로 오심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왠만하면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해결하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 말씀으로 다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 분이 육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죄가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몸을 입으시고 오셔야했을 만큼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창조물이 그 분께 불순종하고 그 분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의 걸작품이 그 분에게서 돌아섰습니다. 생기를 불어넣은 인생이 주인을 배반했습니다. 이 죄인 된 인생은 마치 100세 된 아브라함의 몸 같았습니다. 90세의 사라의 몸 같았습니다. 마침내 죄가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여러분, 이 인생을 구할 은혜가 어디에서 옵니까? 돈에서 은혜가 옵니까? 우리의 명예와 명성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놀라운 지식과 기술로 옵니까? 두텁고 두터운 인간관계로 은혜가 임합니까? 여러분의 탁월한 은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십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위에서 오는 것입니다. 위에 계신 분이 방문하셔야 임합니다. 그 분이 몸으로 오셔서 대가를 치루셔야 임합니다. 고난을 다 당하시고 피의 제사를 드려야 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에 대한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amazing grace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보세요. 그 말씀이 알려주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절을 다시 보세요.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호와가 누구입니까? 그 분은 그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란 칭호는 보통 인간과의 약속, 즉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되어집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칭호는 그 언약을 성취하실 때 많이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여호와'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약속의 성취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 부부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또 주셨습니다.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 심히 번성케하며 영원한 기업을 주리라' 이제 여호와께서 그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믿음의 절정입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잘 모릅니다. 그 믿음은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이며 인내의 시간을 지나지 않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에 굴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인내합니다. 누구나가 다 소망없다고 할 그 때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심을 소망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그들의 불순종에 느부갓네살왕이 화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워낙 탁월한 사람들이라 죽이기에 아까왔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옆에 있던 신하들이 이렇게 회유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네들, 금신상 앞에 가서 신발끈 한번만 매. 그러면 자네들은 신발끈 고쳐맨거고. 보기에는 신상에 절한거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살고 봐야지'
그렇게 설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No! 그럴순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너무도 신실하셨던 그 분을 배반할 순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지시는 분입니다. 또한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그 분을 배반치 않습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는 사람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환난에 당당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그 분을 더 소망합니다. 소망 없다 할 때 도리어 소망을 품습니다. 그리고 인내합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을 자세히 보세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위한 소중한 가이드라인이 하나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시간이 되어' 무슨 뜻입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분의 시간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In His Time! 그 사람은 주님의 시간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분의 시간은 너무도 정확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계가 고장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는 행동을 살펴보면 그런 예측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잘못된 듯 여깁니다. 그 분의 시계가 고장나 작동을 안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시계가 우리보기에는 고장난 시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습니다. 너무도 정확히 두 번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시작되면 겁나게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무섭도록 정확한 간섭이 시작됩니다. 너무도 엄밀한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하나님의 시간보다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너무도 놀라운 능력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사모하는 사람,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사람은 환난을 감당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냅니다. 요셉의 인생이 바로 그런 인생 아닙니까? 그가 겪은 많은 상황 속에서 그가 낙망할 이유가 없었습니까? 맞지 않는 하나님의 시간을 탓할 조건이 그에게 없었습니까? 형들에게서,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 그럴 상황이 없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분의 시간이 너무도 맞다는 것을 신뢰했습니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시편 105편 19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했다고 말합니다. 그 분의 시간이 될 때까지 주님의 말씀이 그를 담금질했습니다. 어떤 번역본은 '철이 요셉의 영혼 속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안에 철을 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시간이 우리를 강인하게 합니다. 담대하게 합니다.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우리 혼에 강한 철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후에 어떻게 상황이 변합니까? 정말 겁나게 변합니다. 무섭도록 정확한 회복이 시작됩니다. 감옥의 죄수가 순식간에 세계 최강대국의 2인자가 됩니다.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그 자리에 등장합니다. 너무도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80년의 눈부신 사역을 감당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도 실패를 만납니다. 추락하기도 합니다. 오류에 빠집니다.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소망하는 사람은 제일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절대로 거꾸러지지 않습니다. 물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나 거기에 묻히지 않습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능력의 주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너무도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분의 시간에 그 분이 역사하심을 너무도 확신합니다. 그의 하나님은 능하신 손을 가지신 분임을 그는 믿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입니까?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습니까? 그 분의 시간을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Point 2: 웃음
이제 두 번째 주제입니다. 오늘의 두 번째 주제는 '이삭,' 즉 웃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6-7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아브라함이 드디어 아들을 사라에게서 얻습니다. 그러자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부쳐줍니다. 그리고 팔일 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할례를 합니다. 이 때 사라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웃음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듣는 모두가 나와 함께 웃을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 18장을 자세히 보면 그곳에도 사라의 웃음이 나옵니다. 12절을 보세요. '사라가 속으로 웃고' 그러나 이 웃음은 유쾌한 웃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쓴웃음입니다.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보세요.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천사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나셔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말합니다. 그래서 좀 어이없어서 웃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능력 많으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가 잉태하고 정상적인 분만의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아이를 낳았습니다. 2절의 '기한에 미쳐'라는 말은 10달의 임신기간이 지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10달 동안 사라가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얼마나 신기해하며 고마웠겠습니까? 정상적으로 그 기간을 거쳐도 여자들은 그 과정을 너무도 신기하게 느낍니다. 남자들은 몰라요. 경험을 해 봤어야 알지요! 생명에 대해선 여자들이 전문가입니다. 생명에 관해서는 남자들은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들이 가지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낳을 때는 좀 힘들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 부부는 정말 많이 웃었을 것입니다. 정말 많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쓴웃음에 대해 미안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아이를 이삭이라 했는지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외칩니다. 기쁨 가운데 외칩니다. 아들이 할례받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소리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 God has brought me laughter! God has brought me joy! 하나님께서 내게 기쁨을 주셨다.'
저의 두 딸이 요즘 새로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쁜 짓'입니다. 제가 '예쁜 짓'하면 큰딸은 두 손을 턱에 착 대고 방긋 웃습니다. 작은딸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면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감동이 막 밀려옵니다.
얼마 지속되지 못하는 사람이 주는 기쁨도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떻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자신이 그런 기쁨,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게 샘솟는 기쁨'이 찬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3장에 가나의 혼인잔치 얘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처음 기적을 베푸신 곳입니다. 이 사건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포도주도 만들어 주셨다 우리도 막 마시자.' 그것이 메시지입니까? 핵심을 바로 아셔야합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3장 10절을 보세요.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날로 더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기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joy보다 나중에 오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보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기쁨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제 막내 동생의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그 녀석은 소천하신 어머니의 사랑을 유달리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투병하실 때도 휴학을 하며 옆에서 간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의 졸업식을 보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투병하실 때 고통스런 모습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어머니 생각 때문에 제 영혼이 많이 침체가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본문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웃음.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기쁨. 더욱더 넘치는 기쁨. 그렇다. 믿음으로 사신 어머니는 주님 앞에서 이 기쁨을 누리고 계신다. 그 분이 너무 기뻐하고 계시는데, 그 분이 주님이 주시는 샘솟는 기쁨과 넘치는 평화로 지내고 계시는데, 내가 침체될 이유가 없다.내가 이럴순 없다.'
그 때부터 제 마음에 큰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소망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기쁨을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찌라.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님의 기쁨이, 주님주시는 웃음이 제게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청년 여러분, 기쁨을 원하십니까? 날로 넘치는 주님의 기쁨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좋은 듯하다가 나중에는 아무 것도 아닌 웃음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세상나라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꾀는 것들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소망하십시오. 그 기쁨은 나날이 새롭습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쭉 계속되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에선 이리가 어린양과 거합니다.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습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습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여러분,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십시오. 주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 분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죄를 씻으시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으로 죄와 싸우십시오. 죄를 토해 내십시오.
주님이 뭘 약속하십니까? 주님은 유쾌한 시간을 약속하십니다. Times of refreshing! Joyful day! 기쁨의 날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그 기쁨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만 옵니다. 값싼 것으로 그것을 대체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웃음이 진짜 웃음입니다. 그 웃음을 웃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복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되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여
주님은 은혜로우십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주님의 시간을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되게 인도하시옵소서. 주님 주시는 웃음과 그 기쁨 사모하는 저희들되게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