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안이고 다 내력이 있고 굴곡이 없는 집안이 없겠지만, 내가 아는 한 장상우 회원도 남 못지 않은 곡절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은 애월리에서 옛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친척이 있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 가서 6년제 중등학교 재학 중, 미군의 동경대공습으로 고향제주로 피난왔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일본 갈 길이 막힌 부친께서는 오현중학교를 1회로 졸업했고 교원양성소를 거쳐 국민학교 교사로 봉직했습니다. 해방공간인 1947년 부터 교직을 가지신 부친은 4.3사태 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우리 친구는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하가, 귀덕 등지에서 살았고 애월국민학교 5학년 때 제주시로 가서 제주일중에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아버님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 가시는 바람에 사실상 가장 노릇을 하며 힘든 사춘기를 보내야했습니다. 아버님의 고향이 애월 당동네이고 지금도 애월에 인연을 갖고 있으니 친구의 고향마을이라 하겠습니다.
애월리(涯月里)
애월리 중심가
700여가구에 2,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애월읍 서부지역 최대 마을인 애월리는 제주시 중심부에서 서쪽 21km지점에 위치한 읍사무소 소재지로서 이 부근의 행정, 교육, 산업의 중심지이며, 예술의 고장이라고도 불리웠다. 애월읍 유일의 연안항인 애월항이 자리잡고 있고 취나물주산지로서 유명하다. 해안절경이 뛰어난 한담동 해안가와 사철 맑은 물이 솟아나는 하물 등 뛰어난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주산물로는 취나물이 유명하며, 양배추, 쪽파, 마늘, 양파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마을 애월리이다.
마을약사
옛 이름은 ‘곳돌(아래 하)'일 것 같으나, 일찍부터 한자화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애월이라는 음성형만 확인할 수 있다. '곳(아래 하)'은 해안가라는 뜻인데, '돌(아래하)'은 월(月)의 뜻인지 확실하지 않다. 애월개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애월리가 붙여졌다.
애월은 곽지 일원과 더불어 선사시대의 조개무지와 민무늬토기 파편 등이 발견되어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애월현 또는 애월진·애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애월리가 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애월읍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후기 이후 주민들이 바다와 밀접한 연관을 갖기 시작하면서 차츰 애월진이었던 현재의 터 주변으로 모여 거주했다. 일주도로를 경계로 해안 쪽은 주거지, 내륙 쪽은 농지로 구분된다.
애월리의 설촌유래는 역사적 기록이나 유적과 구전 등 그 근원을 파악할 고증자료가 미미하여 이를 밝히는데 한계가 있으나 1969년 곽지리 인근 과오름 기슭에서 확인된 지석묘와 고내봉 기슭의 지석묘를 비롯하여 1973년 곽지리경 패총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곳에서의 무문후토기와 같은 파편등으로 보건대 애월, 고내일원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탐라기년』과『탐라지』등에 의하여 고려 원종 12년(1271)에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서 애월에 목성을 구축한 것과 고려 충열왕 26년(1300)에 동서도현 가운데 애월현이 설치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애월마을의 설촌은 지금으로부터 750년 이전 삼국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취락의 거점은 현 애월마을의 동남변 속칭 숙구미와 웃수영, 곰베마실경에 씨족 단위의 삶터를 군집으로 토착화해 나가는데서 비롯하여 이 일대의 구릉과 암반대를 자연방패로 삼아 고난을 피하면서 주변의 비옥한 토지와 인근의 풍부한 지하용천 및 연안일대의 해산물을 생활경제기반으로 하여 농업과 목축, 어업을 영위하면서 정착촌을 개설하여 생활권을 확대해 나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애월진성이 구축됨에 따라 진졸들과 소수어업에 의존하여 생계유지하려는 주민들이 고려후반기쯤부터 진과 포구부근에 점점히 정착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외적선 침범이 빈번해지면서 해안방어의 필요성이 점차 확대되어 포구가까이 이주하여 대처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말을 타고 성내로 다가오다 제지당한 승려가 마을발전의 묘안이라고 일러준 말을 믿고 탑 바위를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가뭄과 흉년의 재앙이 그치지 않았다는 탑아진밭의 전설이 있고, 숙구미 일대를 불칸터라 부를만큼 대화마가 휩쓸고간 이후의 폐허속에 실의에 빠진 주민들이 화난을 피하여 일부는 중산간마을로 이주해 갔습니다. 대다수 주민들은 새로운 삶터의 확보및 향토의 수호와 해안선 방어의 불가피성 때문에 현 애월리의 하물을 중심으로 집단정착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해상진출과 해안 방호의 기틀을 마련하여 포구취락의 형태로 큰 부락을 이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변천은 세종 9년(1434) 흉년이 들어 기아자가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쯤해서 上애월에서 下애월에로 생활터전을 옮기는 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숙종28년(1702) 이형상 목사때 제작한 『탐라순력도』의 애월조점에 그려진 포구 주변을 비롯한 성곽 및 현 애월의 취락 형성을 나타낸 모습들과 성정군 245명, 목자보인 181명, 말 1,040匹 등의 기록은 현 위치에 집단정착촌을 이룩한 애월마을의 변천상 그대로를 확인해 볼수 있게 합니다. 이후 1970년대 이르러 농촌 근대화 일환으로 신설동을 비롯하여 동광동 그리고 최근에는 용해동에의 확장 등 마을의 세가 날로 발전추세에 있습니다.
지명유래
하물
◇ 하물 : 마을 중심에 있음. 1987년 한국자연보호협회와 경향신문사가 공동으로 조사 선정한 <한국명수 100곳 >중의 한 군데. 여기에는 명패가 붙여지고, 영원히 보존케 된다. '맑고 맛있는 물'을 더 늦기 전에 찾아 내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마련한 이번 선정 작업에는 원류·계곡 44, 샘 46, 호소(湖沼) 연못 10곳 등이 뽑혔는데 도내에서는 원류·계곡으로 제주시 도두동의 오래물과 서귀포시 색달동의 천제연, 상효동의 돈네코, 그리고 샘으로 사계리의 산방굴사 약수, 아라2동의 금산물, 서홍동의 지쟁샘, 외도동의 수정사지 경내샘 등이 함께 지정되었다.
하물은 큰물이란 뜻이다. 하물은 바위틈에서 용출하는 용천수로 그 양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아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 애월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
하물은 마을 중심에 있으며 주민들의 생활용수와 부녀자들의 빨래터와 노천 목욕탕으로 사용했었다. 이곳은 마을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장소이며, 특히 마을에 경조사 발생시 물부조라고 해서 한 집에서 한 허벅씩 물을 길어다 주고 부조를 대신했을 만큼 마을의 인정을 넘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하물은 가뭄 때에도 용출량이 줄어들지 않아 인근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중산간 지역인 납읍과 어도 지역 주민들도 우마를 이용해 물을 길어 가기도 했다. 1981년 하물 주변을 공원지구로 지정하여 관리하였고, 최근 재정비하였다. 1일 용출량은 약 5,500㎥이다.
[참고문헌]
• 『제주의 명수 이용과 보전방안』(Ⅱ) (제주발전연구원, 2005)
장공물
◇ 장공물 : 장군물, 장궁물 이라고도 부른다. 하물곁에 있으며 과거부터 남자들의 목욕터였다. (하물은 여자목욕터) 어떤 사람은 과 진시대에 '장군이 먹던 물'이라고 하고 한편 김신현(金信鉉)씨의 재정지원으로 장익준(張翼駿)공이 치수를 했기 때문에 장공물이라고 부른다고도 전한다. 현재 이 샘에는 치수비가 보존돼 있다.
한담(가린돌)의 옛 모습
◇ 가린돌
한담동에 위치한 관광지로서 천혜의 수렵한 자연 환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미니해수욕장이있어 여름철에 가족단위해수욕장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 남당
애월항 서쪽에 위치한 어부및 해녀들이 1년풍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다.
◇ 배수숭이 소금밭
너븐여에서 약 200m 지점에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그냥 바닷물을 증발시켜 진한소금물로 만드는 소금밭 약2,000평정도, 하나는 쇠솥을 이용 진한 소금물을 만드는 곳 소금밭이 약 100평 정도이다.
◇ 연듸
연대의 와잔 애월성에서 서쪽 약 500m 지점에 원형 그대로 있다. 애월석성 축성 시 이 연대와 남도리연대 고내봉정상에 봉수대를 축도하고 애월진에서 관리하였다.
◇ 탑아진밭
옛날 애월리를 상애월과 하애월로 번창하도록 만들었던 탑이 있었던 밭이다.
◇ 관질
잡피막 거리에서 곽지쪽으로 가는길 옛날의 일주도로로서 관공서가 전용으로 다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숙구미
배영골에서 약 200m 남쪽에 있다. 군이 주둔했고 상애월리라고 전해오고 있다
◇ 배영골
큰돌선밭과 숙구미로 가는 북쪽 일주도로까지를 배영골이라 함.군사가 주둔하는 병영이 있었다하며 이 당시에는 바닷가였으므로 이곳에서 배를 마들었다고 전한다.
◇ 개당
큰돌선밭 동쪽 50m정도 밭 귀퉁이에 자취만 남아있으며 바닷가에 있었던 당인데 바다부분이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 큰돌선밭
애월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남쪽 약 200m 지점 아진질 길가 밭에 품자형 큰돌 세 개가 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다 돌을 던져 큰돌위에 앉으면 그날 재수가 좋다하여 돌을 던지며 소원성취를 기원하였다. 이 돌에 전해오는 전설 대석 지하에 일대천손 지지가 있다고 전해온다
◇ 성창
큰성창 셋성창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수전소 소관인 전박을 정박시키는 곳, 현재 동하동이다.
◇ 돈지
애월진소속 수전소(해군)이 주둔지였던 장소인데 현재 동하동이다.
◇ 진동네
애월진(石城)에 인접된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 동하동이다.
◇ 세질가름
동동네 당에서 현재의 셋질동네까지 작은 셋길이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였다고 해서 붙여진이름다. 현재 서상동이다.
◇ 당동네
현재의 당동네 중간지점에 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무슨 당인지 불명. 현 서상동이다.
◇ 무르동네
150년전 문헌에 茂路洞이 나와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진에서 연대로 왕복하는 길목이며 현 서상동이다.
◇ 벌원
지금의 동상동 일원 옛날에는 이 일대가 넓은 벌판으로 애월진이 병사자격(활)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큰 벌원과 작은 벌원으로 구분되어 있다
車가 안 보이는 옛 제주 일주도로
傳說
‘塔아진밭’과 ‘비둘기’ 이야기
옛날 지금의 애월읍사무소 정문쪽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었다. 이 하마비에는 <司令 以下 下馬>라고 새겨져 있어서 사령 아래의 사람들은 모두가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날 스님 차림의 사람 하나가 말을 탄 채 이 하마비 앞을 지나 涯月鎭 가까이까지 다가왔기 때문에 진졸과 마을 사람들이 합세하여 중을 말에서 끌어내렸다.
“고안놈,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타고 지나가려 하느냐. 이놈!”
그러자 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소승이 몰라 뵙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마을이 잘되게 할 묘책을 알려드릴 터이오니 한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 묘책이란 게 무어더냐?”
마을 사람들은 귀가 번쩍해서 대들었다.
“예. 저기 과오름 앞의 등녀오름 서편 탑을 헐어버리면 마을이 번창할 것입니다.”
스님은 태연하게 대답하고 위기를 모면하여 갈 길을 가버렸다.
스님이 가버리자 마음이 급해진 마을 사람들은 <탑아진밭>으로 밑둥을 치자 우루루 탑이 무너지며 거기서 세 마리의 비둘기가 피를 흘리며 나와 한 마리는 於道쪽으로 날아가고 한 마리는 上加, 한 마리는 지금 涯月港의 거욱대코지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 탑이 허물어진 때부터 애월에는 불이 많이 나고, 불이 나면 바람을 타고 줄불이 붙어서 上涯月은 폐촌이 되어버렸다. <출처: “제주의 마을” 시리즈>
애월진성 (涯月鎭城)
애월진성에는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84명, 유직군 86명, 서기 7명 등 총 180명이 병력이 있었다. 관할은 1봉수(고내 봉수), 2연대(남두 연대, 애월 연대)였다.
애월진성은 처음에는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들어와서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목성(木城)이었다. 이를 방어 시설로 계속 이용하다가, 1581년(선조 14) 김태정 목사가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애월포구 가까이에 돌로 성을 쌓아 진을 옮겼다.
(애월진성)
(애월진성)
처음 성을 쌓은 고려 때는 목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애월포구 가까이로 옮겨 둘레 549척, 높이 8척의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남·서 두 문에는 문루를 두었고, 객사와 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재 바다와 접한 북측 성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미석(楣石)·총안(銃眼)·회곽도(廻廓道)·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어 당대 해안성의 방어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남측 성벽은 복원을 하였으나, 당대의 성벽인 북측 성벽과는 축조 방법의 차이를 보인다.
애월진성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1736번지)
[참고문헌]
• 『제주의 방어 유적』(제주도, 1996)
• 김봉옥, 『제주통사』(세림, 2000)
• 『제주의 역사와 문화』(국립제주박물관, 2001)
애월연대
지정번호 : 제주도기념물 제23-17호
지정년월일 : 1996년 7월 18일
소재지 :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1975번지
애월진에 소속된 애월연대(涯月煙臺)는 애월성에서 서쪽 500m 지점, 애월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600m정도 떨어진 속칭 ‘연디왓’에 있다. 이 부근은 옛무덤이 많아 지금도 자기파편이 많이 발견된다. 해안에서 450m쯤 떨어진 동산 위에 축조되었는데, 상부 8.3m×8.2m, 하부 9.3m×9.4m, 높이 4.8m로 도내 연대 중에서는 비교적 웅장한 연대이다.
이곳 연대에는 별장 6명, 직군 12명이 있어 하루 24시간을 6번으로 나누어 해안선을 지켰다고 한다.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통신을 했으며, 평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해안으로 접근하면 3개, 적이 상륙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올려 급한 상황을 동쪽으로 남두연대(직선거리 4.2km), 서쪽으로 귀덕연대(직선거리 3.2km)와 교신하였다.
涯月浦
애월포는 지금의 애월읍 애월리에 있는 큰돈지·샛돈지·족은돈지를 두고 이른 말이다. 애월포는「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애월촌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취한 포구 이름이다.
『남사일록』에 의하면 애월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육포구 중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남사록』에서는 이곳에 당시 명월방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제주삼현도」에서는 애월촌 앞에 애월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애월포는 제주에서 전라남도 목포와 가장 가깝다. 그래서 예로부터 북쪽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기 위한 전략요충지로 터를 잡았다.
『탐라순력도』에서는 애월포와 애월진성의 위치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고지도를 보면 애월포는 초승달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당시 전선 1척을 두었고 격군 180명, 사수 8명, 포수 7명이 주둔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애월포는 일찍이 해상 활동의 요충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월포가 개발 바람을 탄 것은 1913년으로 당시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도대불 지경의 북방파제를 쌓아 포구로서의 틀을 갖추었다. 또한 애월포는 이 마을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술 제조 공장을 비롯하여 통조림, 단추 공장 등이 있었다.
애월읍 애월리는 일찍부터 애월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의 바다 밭은 동쪽 가시림원에서부터 서쪽 테들인개까지이다. 이 마을은 뒷개와 큰돈지라는 두 개의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애월포는 넙여코지와 도릿여코지, 그리고 도채비엉덕 사이의 후미진 곳에 있다. 바깥에서부터 안쪽까지 큰돈지-샛돈지-족은돈지로 짜여져 졌다. 수량이 풍부한 하물이라는 우물의 물이 족은돈지로 흘러든다.
샛돈지와 족은돈지가 태풍 등 비상시의 칸살이라면, 큰돈지는 일상적인 칸살이다. 큰돈지는 조간대에 걸쳐 있어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훌륭한 포구이다.
애월포는 지난 1971년에 1종 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수산청은 수산 진흥 차원에서 어업항으로 개발하고 있다. 포구가 크게 확장되면서 옛 자취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1993년에는 이 일대를 가로 질러 해안도로가 개설되었다.
[참고문헌]
• 좌승훈,『포구』(나라출판, 1996)
• 고광민,『제주도 포구연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03)
도대불
애월읍 애월리 애월포 일대는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서 항파두성을 쌓고 관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애월목성을 축성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1581년(선조 14)에 김태정 제주목사가 애월진성을 석축하였는데, 그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의 애월리 도대불은 1930~1935년 사이에 마을 어부들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월리 도대불은 일부 지역에서 도대불을 관망대로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밤에 조업을 나간 배를 유도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애월읍 애월리 애월포 선창가 암반 위에 있다. 해안 도로가 개설되면서 해안 도로 안쪽으로 들어섰다.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현무암을 이용하여 사다리꼴 형태로 축조하였다. 바른층 쌓기 방식을 이용하였고, 하단부에만 속채움을 하였다. 밑에서 허리 부분까지는 급격히 오므라져 있고, 상단부까지 같은 너비를 유지하며 축조하였다. 윗부분에는 불을 켜는 도구를 넣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벽돌을 쌓듯이 축조되어 간단하면서도 튼튼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한 쪽 면에는 불을 켤 때 올라가기 편리하게 계단을 만들었다. 도대불은 마을 진흥회에서 관리했으며 등화시에는 석유 등피를 이용하여 불을 밝혔다.
애월리 도대불은 해안 도로 건설 이후 해체되어 지금은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최근에 조성된 도대불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 『북제주군의 문화유적』 1(북제주군, 1998)
가린돌-漢潭
제주도 전체의 축소판
(제주환경100선)모래사장과 노두,돌담을 모두 만나는 곳
2010년 06월 15일 고현준 기자 <제주환경일보>
작지만 너무 훌륭한, 아름다운 비경이 또한 신비로운, 숨어있는 절경이 있다. 제주시 애월과 곽지해수욕장 사이의 '한담'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해안 산책도로. 차는 다닐 수 없지만, 사람들은 마음놓고 걸어다니며 제주를 만끽할 수 있는 곳.
한담이란 지명에 대해 애월읍에 거주하는 김권익 선생은 "옛날 어떤 詩客이 이곳을 지나다가 물이 높고 너무 고와 가마를 내려서 한담(漢潭)이라고 지었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제주도의 모든 곳을 종합적으로 전시해 놓은 자연이 빚어놓은 숨은 보물같은 곳이다.
김녕이나 협재해수욕장 같은 하얀 모래사장이 있고 월평포구나 대포리해안과 같은 아름다운 용암절경이 늘어서서 사람들을 반기는 곳이다. 화산활동의 흔적이며 오름의 속살을 볼수 있는 수월봉과 두도봉의 노두를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가 하면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송악산과 남원 큰엉해안을 만나는 것 같다.
일제시대의 진지동굴이 숨어 있는가 하면 예쁜 돌담이 제주를 말없이 빛내주듯 다소곳이 반기기도 하는 곳이다. 제주도를 하나로 엮어놓은 듯한 제주종합판 절경은 제주도 전체 관광지의 축소판으로 불릴 만 하다.
예부터 한담은 멜(멸치)어장이 형성되는 유명한 곳으로 애월코지라고 불리는 여도 숨어있다고 한다. 김권익 선생은 이곳은 가린돌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리는데 '가린돌이란 큰 돌이 가려진 어장터라고 불렸다는 데에서 유래한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특히 돌담이 아름다운 이곳은 방어용으로 돌을 쌓았지만 4.3사건 이후 성을 많이 없앨 때 다 허물어 버려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게 됐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밭을 가꿀 때 해풍을 막아주는 용도로 사용된다고 한다.
애월과 곽지해수욕장 사이의 산책도로는 개발보다 그저 지나면서 자연을 마음껏 감상하는 코스로 남겨두면 좋을 둣 하다.
첫댓글 아름다운 고장에서 태어나 심성이 고우시구나!!!!
명당에서 나고 자란 장선생이기에 언제나 밝고 맑고 정직하기에 늘 당당하고 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장상우 화이팅!!!
장선생하고 나허곤 괜당이라 어릴때 어렴풋 기억하지만 장선생 보면 짐작하겠지만 부모님이 미남,미인으로
아버님의 일본 외유만 없섯다면 하고 생각해보네, 어렵지만 굿굿하게 살아온 장상우 지금은 친구들이 다부러워하는
의지의 제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