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하고픈 양양의 위상#
<참고/양양 소식지>
1)강원도의 옛 명칭으로 가늠하는 양양의 위상
①조선 개국 태조 3년에 교주강릉도에서 강원도로 명명.
'강원도'라는 명칭은 강릉과 원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만일 삼강오륜에 걸리는 범죄나 반역죄를 지으면 다른 고장의 머릿글자를 따서 개명했었기에
원양도. 강양도. 강춘도. 원춘도.....이렇게 변경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양양의 머릿글자가 도의 명칭이 되었던 시기는 현종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현종 7년(1666) 2월 18일 좌부승지 민희가 강원도를 원양도로 개칭하라는 내용의
승정원 일기 기사에서 발췌>
②이 후에도 도의 명칭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위의 명칭에서 보듯
양양이 강릉 원주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변방의 작은 지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양문화원에서 양양 소식지에 올린 것을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2)*낙산사를 비롯 빼어난 자연경관과 기후조건. 태평류를 비롯한 관아가 있는 양양.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불굴의 항쟁 정신을 발휘한 양양.
*3.1만세 운동을 강렬하게 외쳤던 양양.
*남북 분단의 고통과 아픔을 간직한 고장 양양.
3)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는 곳. 양양.
예)힐링의 이상향 양양에 은일(隱逸)한 매월당/김시습.
*생육신 나효온의 추강진에 의하면 "매월당이 48세 되던 해 서울에서 관동으로 돌아간다기에 그를 전송하다"
"매월당 김시습이 강릉을 떠나 양양에 들어와.......마을 청년들과 교류하며 곤궁하게 살았다.
"낙진촌에 머무르다"
*부사 이해조(1709. 숙종35)는 명암집 6권 현산 30경 시문에 기록...검달동에 머무르다
"두 번째는 검달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이 양양에 7,8년 거주하면서
양양을 위해 민원을 해결한 여러 사연들은 뒤로 하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법수치 계곡에 그의 발자취가 있음에 이 글을 시작한 것입니다.^^
[검달동:현북면 법수치리 산 26-27]
#매월당 김시습 시성이 머물렀던 골짜기#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하면 오시는 길목 대승폭포의 노승은 매월당일 것입니다.^^
양양법수치계곡의 대승폭포는크지는 않지만
법수치마을 주민들의 자랑이며 법수치마을의 내력을 지켜 봐 온 폭포입니다.
2002년 루사 이전엔 높이가 7~8m 됨직했는데
태풍 [루사] 이후 길을 높이는 바람에 길 아래로
폭포수가 떨어져 높게 보이지 않지만
여름날 곁에 있으면 물방울을 맞는 상큼함과
시원한 낙수소리가 더위를 싹 가져간답니다.
매월당 시성이 계시던 법수치 계곡에 살고 있음에 자랑스럽습니다.
산수가 고와서 법수치 주민들의 인정 또한 곱습니다.
자연과 인심 덕분에 늘 감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