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날 좋고 바람 좋은 저녁!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후원회 회장인 로더미어 자작 부인과 필립스 드 퓨리 옥션 하우스의 시몽 드 퓨리 회장이 등장하자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인 셰리 블레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간다. 그 뒤를 하워드 공작과 부인이 팔짱을 끼고 뒤따른다. 15세기 이래 영국에서 가장 막강한 공작 가문의 전통을 지켜온 도도함과 우아함이 풍긴다. ‘올드 마스터 페인팅 딜러’로도 이름을 날리는 로빌란트 공작과 그의 부인도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즐겁게 인사를 나눈다. 저쪽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카인 로지 스텐서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미셸 오바마 영부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미국의 미술 문화 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패멀라 조이너도 보인다. 그 뒤로 내추럴 블랙 다이아몬드와 스피넬, 루비 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화제를 모은 스위스의 명품 주얼리 브랜드 ‘드 그리소고노de Grisogono’의 그루오시 회장이 웃고 있다. 러시아의 억만장자이자 ‘머큐리 그룹’의 대표 프리 드란드도 와 있다. 홍콩과 베이징의 고급 사교 클럽인 차이나 클럽 대표 데이비드 탕, 전 BBC 앵커 앤젤라 리폰도 참석했다. 오기로 한 배우 러셀 크로와 케이트 블란쳇, 에드워드 왕자의 얼굴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어? 한국에서는 영화 배우 김성수도 왔다. <보그>, <더 스펙테이터>, <콩드 나스트 트래블러>, <이브닝 스탠더드> 등 수많은 매체의 기자들이 터뜨리는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다. 여기는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이 아니다. 영국 런던 첼시 킹스 로드에 위치한 사치 갤러리에서 열리는 ‘코리안 아이 문 제너레이션’ 전시 현장이다.
1 일일 평균 관람객이 약 2500명에 이르는 사치 갤러리의 전경.
2 전준호의 ‘무제’. 미라가 예수의 사진을 보는 비현실적 설정으로 ‘무척 재미있다’는 반응을 얻었다.
3, 4 이용백의 ‘Plastic Fish’와 김아영의 ‘Accept North Korea into the Nuclear Club or Bomb it Now’
‘코리안 아이 Korean Eye’의 재발견 블랙 타이에 턱시도, 드레스를 차려입은 세계 각국의 저명 인사가 한국 현대미술과 음식을 맛보기 위해 사치 갤러리에 모였다. 6월 20일 오픈한 이래 2주간 무려 4만 명이 다녀간 전시지만 이날 열린 ‘코리안 아이 만찬’ 만큼 뜨겁진 않았다. 세계 각국 유명 인사의 발걸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국에서도 최고의 ‘파티 전문가’가 날아왔다. 농림수산식품부 산하 한식세계화추진단의 자문위원인 노희영 히노 컨설팅 대표의 스타일링 지휘 아래 CJ 푸드빌이 선보인 8가지 코스 요리를 눈앞에 두고 사람들이 가벼운 탄성을 지른다. “뷰티풀! 판타스틱!” 컨템퍼러리 일본 퀴진으로 유명한 런던의 최고급 레스토랑 ‘주마Zuma’의 수석 주방장 로스 쇼한 역시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스타일의 비빔밥, 구절판, 신선로, 잡채, 갈비, 오미자 화채를 맛보며 연신 감탄한다. 50여 명의 만찬 참석자는 한국에서 직접 날아온 요리사와 디자이너 이영희의 한복을 입고 도우미를 자처한 전문 인력이 보여주는 친절함에 모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이렇게 잘 짜인 한식을 맛본 것은 처음이다. 디스플레이 등 푸드 스타일도 매우 훌륭하다”라는 기분 좋은 평가가 줄을 이었다.
이번 전시와 만찬 행사는 한국 현대미술을 프로모션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의미가 있다. 영국 PMG 그룹의 회장 데이비드 시클라트라는 우연히 한국 현대미술을 접한 후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다는 판단 아래 ‘코리안 아이Korean Eye’라 명명한 조직위원회를 발족했고, 한국을 대표할 만한 30명의 작가를 최종 선발했다. 독특함과 창의력이 돋보이며 세계적 아트 페어나 경매에서 주목받은 작가를 우선 채택했다. 크리스티, 소더비에 이어 세계 3대 미술품 경매사인 필립스 드 퓨리가 파트너로 참여하면서 판은 더욱 커졌다. 지난 3월까지만 해도 필립스 드 퓨리 & 컴퍼니의 전시장이 ‘런웨이’가 될 예정이었으나 영국 현지의 뜨거운 관심을 등에 업고 무대는 사치 갤러리로 전격 결정되었다. 사치 갤러리는 영국의 세계적 컬렉터이자 딜러인 찰스 사치가 설립한 사설 갤러리로, 영국 최고의 스타 작가 데미언 허스트를 비롯 게리 흄,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의 젊은 작가 군단을 후원한 곳이다.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 화랑으로 인정받으며 1일 평균 관람객이 약 2500명에 이른다.
1 CJ 푸드빌은 비빔밥, 구절판, 신선로 등 8가지 코스 요리를 선보였다.
2 만찬장의 자원 봉사자들은 디자이너 이영희의 한복을 입었다.
얼마 전까지 사치 갤러리와 필립스 드 퓨리 전시장 두 곳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이번 만찬을 계기로 사치 갤러리 한 곳으로 집결했다. 현장 설치에 어려움을 겪었던 최태훈의 ‘Skin of Time’과 수장고에서 찾지 못해 애를 태운 장승효의 ‘Mad for You’도 안전하게 전시장에 도착해 있었다. 이형구의 ‘Homo Animatus’ 역시 보다 좋은 무대로 공간을 옮기며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작품 중 하나는 전준호의 미라 조각 작품이었다. 앙상히 뼈를 드러낸 미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그림 액자를 느긋하게 보는 작품은 영국 컬렉터들에게 “판타스틱하다. 무척 재미있다”라는 평을 받았다. 사실 전준호는 이미 해외에서 인기가 높은 작가다. 애니메이션 성경책을 보는 미라의 모습을 조각한 또 하나의 에디션은 프랑스의 세계적 화랑 테디우스 로펙 갤러리에서 전시를 시작하자마자 10분 만에 팔렸다. 이 밖에도 가짜 플라스틱 물고기를 진짜보다 더 아름답고 컬러풀하게 그려 ‘Fake’, 즉 ‘가짜’에 현혹되는 오늘날의 세태를 꼬집은 이용백의 작품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푸른 눈의 미술 애호가에게 동양의 병풍은 무척 새로웠나 보다. 이이남 작가는 병풍 형식의 틀에 디지털 모니터를 넣어 꽃잎이 떨어지고, 새가 나는 ‘디지털 병풍’을 선보였는데 이곳저곳에서 “매력적이다”라는 평이 터져 나왔다.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추종완, 이림, 이환권, 이형구, 전준호, 박정혁, 강형구 등의 작가 작품은 벌써 판매 예약이 끝났다. 찰스 사치가 전시 현장을 답사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더니 지난 7월 6일에는 전시 기간을 9월 13일까지 연장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평소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찰스 사치는 “좋다, 기한을 연장해라!”라는 짧은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3 전 영국 총리 부인 셰리 블레어도 이날 만찬에 함께했다.
한국 현대미술을 주제로 한 대화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블레어 총리의 부인 셰리 블레어가로더미어 자작 부인(그녀는 영국인 귀족과 결혼한 한국인이다)에게 물었다. “한국미술에 대해서 잘 알지 않아요?” 로더미어 자작 부인이 답했다. “그럼요, 제가 한국인이잖아요. 케임브리지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한국 미술과 문화 연구도 후원하고요. 그런데 지금껏 한국 문화, 한국 미술을 옛것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것인지는 미처 몰랐지요. 이제 저도 한국 현대미술을 컬렉션해야 할 것 같아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셰리 블레어 여사는 “한국 여행길에는 한국 현대미술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곳 런던, 그것도 수많은 스타 작가를 배출한 사치 갤러리에서 한국 신진 작가의 작품들을 접하니 놀라워요. 현대적 형식에 동양적 콘텐츠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기회가 더 많아야 할 것 같아요.”
전시는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실패한다. 다행히 1년 6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친 이번 전시는 해외 저명 인사와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강형구, 김준, 김아영, 고명근, 권기수, 김인배, 박승모, 박선기, 박성태, 박정혁, 심승욱, 이승민, 이환권, 이용백, 이림, 이이남, 이동욱, 이형구, 이용덕, 윤종석, 조훈, 전준호, 장승효, 최태훈, 추종완, 한기창 등 최초로 사치 갤러리를 점령한 한국 작가의 작품이 만찬을 즐기고 간 세계적 명사의 입에 벌써부터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9월까지 혹시 런던에 갈 일이 있거든 꼭 사치 갤러리에 들러보길, 그래서 현대미술의 메카에서 선전하고 있는 우리 미술에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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