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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범 |
- 어쩌다가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사회적 관계에서의 의’를 잃어버린 걸까요?
그건 본질이 변질된 결과겠지요. 예를 들어, 유교의 핵심은 인(仁)과 의(義)예요. 여기서 인은 기독교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잘못 교육받은 것이, 유교 하면 충효를 떠올리는데 유교는 충효를 말하지 않았어요. 인과 의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편입되면서 거기서 충효가 나온 거예요. 인의가 유교의 본질이자 핵심인데,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는 충효를 뽑아와서 이게 유교인 양 되어버렸어요. 기독교도 그래요.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일관되게 평화를 이야기하는데, 구원이라는 개념 하나를 쏙 뽑아서 그게 전부이자 전체인 양 만들어버린 거예요. 실상 ‘구원’이라는 개념은 바울이 가장 많이 썼어요. 요한복음에는 한 번도 안 나오고, 마태복음에는 일곱 번 정도 나오지만 의미가 전혀 달라요. 구원이라는 말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바울보다 먼저 썼어요. 로마의 황제가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고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가져온 세이비어(savior, 구원자)라는 거지요. 예수님 나시기 40년 전에 이미 그런 개념을 쓴 거예요. 그런데 100년 뒤에 바울이 “무슨 소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이비어’이시다”라고 한 거지요. 이런 맥락에서 ‘구원’ 개념이 강조되다 보니 마치 구원만이 기독교와 성경의 핵심인 양 되어버렸어요.
- ‘충효 이데올로기’가 유교를 본질에서 멀어지게 했듯이, ‘구원’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기독교를 ‘영혼 구원’에만 몰두하는 협소한 종교로 만들었다는 말씀인지요?
본래 공자와 맹자가 얘기한 인과 의는 사랑과 정의를 의미하는 거예요. 즉, 인은 타인에게 행해야 할 사랑이고, 의는 사회적 불의를 바로잡는 정의 실현이에요. 인과 의는 기독교 개념으로는 ‘아가페’에 해당해요. 그리스어로 아가페는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뜻하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인과 의를 ‘충효’로 뒤바꾸어놓았단 말이에요. 기독교는 평화, 샬롬이에요. 기독교에는 ‘구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샬롬을 이루는 하나의 개념인 구원을 지나치게 과대 포장했어요. 죄로부터의 해방, 자유 등 여러 개념이 있는데, 구원 하나만 크게 부각시켰어요. 이것이 한국교회를 빈약하게 만든 거예요.
- 그러면 잘 산다는 것은 바로 그 인과 의, 아가페와 샬롬을 행하는 삶일 텐데요.
어떤 것을 정의할 때, ‘~이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 어법을 통해 더 분명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인과 의, 아가페에 반대되는 게 ‘이’(利)예요. 이利는 개인적으로는 탐욕이고, 집단적으로는 이기주의예요. 이利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를 낳게 되어 있어요. 이利의 추구가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형태 중에 국가 이기주의가 있는데, 이게 제국주의잖아요. 이利를 추구한다는 건 힘을 가지려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종류의 힘이든, 힘을 가진 자가 자기 힘으로 타인을 누르고 착취하는 건 모두 제국주의인 거예요. 그러니 이利를 위해 사는 건 결코 잘 사는 게 아니에요. 거창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내신 원경선 선생님은 “기독교의 적은 불신앙이 아니라 이기주의”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어요. 이기주의는 곧 사회적 불의인데, 선생님은 불신앙보다 불의를 더 싫어하셨지요. 팔복에 따르자면,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잘 사는 삶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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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의 말씀은 널리 알려지고 자주 전해지는 (설교) 내용인데, 현실에서는 정작 그런 삶의 모델들을 찾기가 힘든 건 왜일까요?
돈에 취해 있어서 그래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돈에 취한 교회예요.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층이 왕의 녹을 먹으면서 제사장 업무를 감당하잖아요. 바로 그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성전 지도자 그룹이 예언자들을 죽여요. 예언자 아모스의 뺨을 때린 것도 그들이에요. 그러다 나라가 망했어요. 성경에 나오는 17명의 예언자들이 모두 나라가 망한다고 말했고, 그 말대로 망했어요. 그러면 깨달아야 하는데, 성전 권력자 그룹은 결코 돌이키지 않아요. ‘제도가 된 종교’가 그런 거예요. 포로기 이후에 회복될 때도 있었지만, 예수님 당시에까지도 그 성전 권력층 문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어요.
당시 예루살렘까지 와서 짐승을 사서 제사를 지내야 죄가 없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세례를 주었어요. 종교 권력자들이 볼 때는 짐승을 사서 제사 지내지 않고 물로 죄사함의 세례를 주는 건 용납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세례 요한을 죽이잖아요.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가 안 되니까. 자기네가 가진 그 특권(이익)이 위태로워지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까지 잠잠하던 예수님은 물 세례도 안 주고 병을 고치고는 죄사함 받았다고 선포하시거든요. 종교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이건 더 죽일 놈인 거예요. 이렇게 제도가 된 종교, 권력이 된 종교가 예언자를 죽이는 거예요.
- 그러면 ‘돈에 취한 한국교회’를 어찌해야 할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혼돈과 어둠이 먼저 나와요. 그리고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를 하나님이 빛으로 밝히신단 말이에요. 어둠을 깡그리 없애지 않아요. 가라지 비유에서도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 하셨잖아요. 가라지 뽑다 알곡도 뽑을 수 있다고요. 어둠에 동화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완전 박멸도 안 돼요. 공존하되 우리가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것이지, 어둠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에요. 요한복음 표현을 빌리면, 빛이 세상에 오니까 어둠이 싫어하더라는 거예요.
‘돈에 취한 한국교회를 없애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한다’예요. 우리 주위에 분명 빛이 되는 젊은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빛은 어느 시대나 수도 적고 밝기도 약해요. 세력이 작다고 해서 큰 어둠을 못 이기는 건 아니에요. 작은 빛, 온유한 집단이 역사를 바꾸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들 편이시잖아요. ‘적은 무리들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32)고 하셨잖아요. 두세 사람과 함께 있겠다고도 하셨고요. 대형 교회의 문제점 등을 다룬 교회 비판서들이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우리가 먼저 빛이 되는 게 더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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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구체적으로 선생님의 기도 생활과 말씀 묵상을 말씀해주세요.
우선 성경 묵상과 관련해서 설명을 하자면 다독(多讀)해야 해요. 통독을 하되 여러 번, 많이 읽어야 해요. 그러면서 따로 짬을 내서 정독(精讀)하는 것도 중요해요. 내가 하는 정독 방법은 이래요. 어느 오후에 시간을 내서 마태복음이든 로마서든 성경 본문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쭈욱 읽는 거예요. 하루에 몇 장씩 읽는 식은 그냥 평소에 통독하는 거예요. 그렇게 다독하고 정독할 때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해요. 이걸 ‘심독’(心讀)이라고 해요. 그렇게 읽을 땐 너무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읽으면 돼요. 그다음에는 그 말씀들을 실천에 옮겨봐야 한다는 거예요. 이걸 ‘행독’(行讀)이라고 해요. 심독에서 행독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설명할 수 없는 성경의 의미를 알게 돼요.
현재 출간된 기도에 대한 책들은 오히려 기도에 대한 오해를 낳고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퇴임 후 제 기도는 한국의 기독교와 불교를 위해, 학교와 교사들과 졸업생들을 위해, 자녀들 및 기도해주기로 약속한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계속 해나가요. 기독교와 불교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두 종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교인데 그 둘이 건강해야 우리나라가 살 수 있잖아요. 돈에 취한 게 기독교만 아니예요. 불교도 돈의 노예에서 해방되어야 해요. 불교는 부처님의 근본 정신으로, 기독교는 예수님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하는 건 내겐 중요한 일이에요.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무엇보다 스스로 돌아보는 기도를 하게 돼요. 내 속을 들여다볼수록 너무 추하고 부끄럽지요. 내 마음 하나도 여전히 잘 다스리지 못해요. 그래서 요즘 들어서 나를 다스리는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돼요.
- 얼마 전 중국의 세계적인 인터넷유통기업 알리바바 회장 마윈이 “서른다섯 살까지 가난하면 네 책임이다”라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었는데요.
그런 무지한 사람과 그런 말은 언급할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어요. 소위 악마의 소리, 사탄의 말이에요. 그건 사탄이 예수님을 찾아와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을 주겠다”라고 한 것과 다를 바 없어요. 부와 성공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여기 지하(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면 죄다 그런 책이잖아요.
누가복음은 축재(蓄財)와 자본을 사탄의 구체적 실체로 보고 있어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부자가 간음을 했거나 계명을 어겨서 지옥 간 게 아니에요. 그는 부자로서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다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 거예요. 그와 달리,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가는데, 그가 올바르게 살았다는 말이 없어요. 축재와 자본을 역사 속에서 사탄이 작용하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경제학자 중에는 마르크스가 그렇게 보았어요.
- ‘거창고 직업선택 10계명’도 잘 사는 삶을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요?
길잡이 중 하나는 될 수 있을 거예요. 사실상 그 직업 10계명(30쪽 참조)이 산상수훈을 젊은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정리한 거니까요. 그렇게 직업 10계명대로 잘 살아가는 제자들은, 자신은 잘 살아간다는 의식도 없이 그냥 살고 있어요. 출판사에서 직업 10계명대로 잘 살아가는 제자들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고 해서 연락을 했더니, 그 녀석이 그래요. ‘제가 잘 살고 있지 못한데 어떻게 책에 그 이야기를 하냐’고.
- 오랜 교직 경험으로 미루어보실 때, 교육을 통해 잘 사는 삶을 가르칠 수는 없을까요?
국가가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에요. 마태복음은 국가를 사탄의 실체로 보는 것 같아요. 예수님이 당하신 세 가지 시험 중 마지막 시험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과 달라요. 마태복음에서는 사탄이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가서는 자기에게 절을 하면 천하 만국을 다 주겠다고 시험하잖아요. 이때 예수님이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고 말씀하시거든요. 국가를 역사 속에 현존하는 악으로 보는 거지요. 일본의 천황, 이승만, 박정희 등 모두 ‘내가 곧 국가다’라고 하면서 교육과 종교를 통해 충성 이데올로기를 퍼뜨렸잖아요. 종교와 교육, 이 두 가지 수단을 장악해야 권력이 안정되니까, 서양이든 동양이든 이를 적극 활용했어요. 고대부터 그랬어요. 이집트의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 로마의 황제는 아폴로 신의 아들, 동양의 천자(天子)라는 개념은 사실상 고대 국가 때부터 나온 거예요.
- 평소 인생에 대해, 잘 산다는 것에 대해 자녀들에게는 어떤 얘기를 해오셨는지요?
대화야 많이 해왔지만, 그건 굳이 물어보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해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거예요.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경 묵상해라.”
- 선친께서 생전에 “내 교육은 실패했다”고 하신 말씀을 화두 삼아 살아오셨다고 하셨는데요(《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여는 글’). 교육자로서 선생님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내가 정년퇴임할 때 인터뷰를 하러 찾아온 이들이 있었는데, 모두 40년 교직생활에서 보람 있는 일화를 물어봐요. 어리석은 질문이에요. 그때쯤 되면 잘못한 것, 후회스러운 것만 기억나지 잘한 일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 학생에게는 내가 너무 엄하게 대하지 않았나, 또 다른 학생에게는 더 엄하게 꾸짖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만 들어요. 함석헌 선생님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누군가 “선생님의 생애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죄인이야” 하시더래요. 그게 진짜예요. 우리 아버지께서 “내 교육은 실패했다”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나도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어요.
교육의 길, 교직에 몸담은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그러나 교육자로서 나는 실패했어요. 너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돌아보고 싶지가 않아요. 낙제점이지요. 다시 태어나서 교직을 하게 된다면 전보다는 좀 잘할지도 모르겠어요. 인생을 오래 살다 보면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지닌 참된 의미를 알게 돼요. 그 빚은 갚을 길 없는 단위예요. 지금으로 하면, 조 단위의 빚이에요. 그런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삶을 살았는데도 잘 깨닫지 못해요.
※ 거창고 직업선택 10계명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로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진행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