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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처사 대곡 신공 행장(處士大谷愼公行狀)
공은 휘가 후윤(後尹)이고 자가 동로(東老)인데, 전의(全義)의 대곡(大谷)에 살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공을 대곡(大谷) 선생이라 일컫는다. 시조 수(修)는 개봉부(開封府) 사람이니 상선(商船)을 타고 동쪽으로 와서 고려의 좌복야를 지냈는데, 그대로 거창(居昌)을 관향으로 삼았고 높은 벼슬아치들이 이어졌다.
우리 조정에는 찬성 이충(以衷)이 있고, 또 4대가 내려와 참찬 희복(希復)이 있으니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이분이 좌랑 휘 재(在)를 낳고, 이분이 주부 휘 수호(秀豪)를 낳고, 이분이 휘 영집(英集)을 낳았는데 후사가 없어 종제(從弟) 영망(英望)의 아들을 데려와 후사로 삼았으니 바로 공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진중하고 과묵하며 장난치지 않아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16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밤낮으로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관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장사를 지낸 다음 묘소에 손수 소나무와 회나무를 심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당시 타우(打愚) 이 선생[李先生: 이상(李翔)]이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공은 백부의 명으로 선생에게 가서 수학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게 되었다. 모친이 살아계셨기 때문에 과거공부를 병행하였으나 시부(詩賦)를 익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시부를 익히라고 권하면 공이 말하기를,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장차 자신이 공부한 바를 지극히 쓰려고 하는 것인데, 선비 된 자가 먼저 부박한 것을 익힌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얼마 뒤 선비의 습속이 더욱 어긋나는 것을 보고 개연한 마음이 일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서 여러 성리(性理) 서적들에 전심하였는데 궁벽한 고을이라 서적이 적었기 때문에《중용장구》.《대학장구》.《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가례(家禮)》를 손수 베껴 써서 걸어다닐 때나 앉아있을 때나 항상 몸에 지녔다.
본생부(本生父)의 상례 때에 지나치게 슬퍼하다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의 둘째 아우 덕윤(德尹)이 팔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한 덕에 살아났다. 모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공은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약에 섞어 올려드렸고, 상을 치를 때에는 예제(禮制)를 집행하는 것이 더욱 확고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에 우암(尤菴) 노선생(老先生)이 바닷가에 위리안치되고 타우 선생 또한 영해(寧海)로 유배를 가게 되자, 공은 동지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우암의 무고를 변론하고 또 타우를 따라 적소(謫所)에 가서 강학(講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도(世道)가 크게 회복되자 공은 또 사계(沙溪)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논의를 주창하여 동지들과 함께 궐문에서 호소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 9)에 타우 선생이 화양(華陽) 산중에서 우암과 종유할 적에 공이 따라가《심경》을 강학하였다. 우암은 공이 손수 베껴 쓴 책을 보고 그가 부지런히 공부한다고 칭찬하였다. 타우 선생이 화양에서 겨울 한철을 머무는 동안 다른 자제들은 없이, 공이 곁에서 나태하지 않고 부지런히 모시며 편찮으시거나 가려워하시면 주무르고 긁어주어 모두 그 공경을 다하였다.
선생이 돌아와 서자에게 말하기를
“신 아무개가 나를 섬기는 것이 비록 효자가 부모를 섬기더라도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은 화양에서 우암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보고 느낀 것이 더욱 깊어져《중용장구》의 심오한 뜻과 사례(四禮)의 의문 나는 것들을 여러 차례 질정하였고 이에 대해 노선생은 일일이 가르쳐주며 공을 더욱 장려하고 칭찬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수차례 공의 학행(學行)을 조정에 추천하고 대관들도 번갈아 공을 천거하였으나 공은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타우 선생의 아우 상서공(尙書公이익(李翊))이 한번은 전의(全義)에 이르러 공을 만나보고자 하였는데, 공은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혐의로 여겨 사양하고 만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윤증(尹拯)이 사문(師門)에 죄를 짓자 타우 선생이 편지를 보내 절교를 고하자, 반대쪽 사람들이 선생을 미워하고 원망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4)에 대사헌을 사직하는 선생의 상소가 올라오자선생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이때를 기회로 삼아 날조하여 무고하기를 끝없이 하였는데,공은 동지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선생의 억울함을 변론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우암이 화를 당하자 공은 이조(李竨) 공과 함께 궐문에 엎드려 상소를 올려 사문(斯文)이 무함을 받은 일을 극진히 말하였다. 이듬해 타우 선생이 옥사하자 공이 그 상례를 맡아 한결같이 예법대로 치렀는데, 당시 화(禍)의 기운이 하늘에 닿아 선생의 서자와 다른 문생들이 줄줄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지만 공은 태연하게 개의치 않았다.
얼마 뒤에 흉당들의 계사로 공을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유배시켰다. 모부인이 당시 70여 세의 나이였는데, 공이 인사를 고하며 온화한 기운으로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불초자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천도(天道)는 곧잘 돌아오는 법이니 어찌 사면되어 돌아오는 날이 없겠습니까.”
하고,
그의 아들 이전(爾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나를 따라온다면 누가 다시 늙은 모친을 모시겠느냐.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말아서 우리 모자의 정을 위로하도록 하여라.”
하였다.
타우 선생을 막 양근(楊根)에 안장하였을 때라 조카 이눌(爾訥)을 보내어 제문(祭文)을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하고, 적소(謫所)에 이르러서는 곡위(哭位)를 설치하여 곡을 하였는데 기년(朞年)이 지난 뒤에 그만두었다. 공은 고통스럽고 험난한 상황에 처해서도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기를 하루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우암의 문인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또한 북쪽에 유배되었는데 편지를 주고받으며 강론한 것이 많았다. 배우기를 청하는 선비가 있으면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가르쳤다. 변방으로 강제 이주된 사족(士族)으로 장성해서도 아직 없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안타깝게 여겨 고을 수령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장가들게 하여 마침내 삶을 이루어주었다.
함경도 관찰사 권시경(權是經)이 공과 인척(姻戚) 관계라, 수령을 시켜서 공에게 곡식을 주면서 아무런 편지도 없었기에 공이 그것이 명분이 없음을 혐의하여 물리쳤다. 수령은 이미 곡식을 주었다고 먼저 보고한지라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여 강고하게 청하니, 공이 어쩔 수 없이 받고는 모두 흩어서 곤궁한 이들을 구휼하였다.
얼마 뒤 그 일을 후회하며 말하기를,
“내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었으니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정국이 바뀌자 비로소 풀려나 돌아왔다. 적소의 남은 재물을 내놓아 모두 유배객들한테 주고 자신은 오직 심의(深衣)를 지을 베 한 필만 사서 돌아갔다. 도중에 베를 판 이가 염가(廉價)로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즉시 전송하러 온 학도(學徒)에게 도로 맡겨서 그 사람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북방에서 지낸 5년 동안 공의 덕에 감화된 이들이 매우 많았기에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공을 전송하였고 어떤 사람은 공의 언행을 기록하여 모범으로 삼았다. 공이 돌아오고 15년이 지나서내가 평사(評事)가 되어 북방을 순행하였는데,신 선생(愼先生)의 안부가 어떠한지를 내게 찾아와 물어보는 유생이 많았다. 공이 돌아왔을 적에 모부인은 여전히 무탈하였으니 공은 축수의 잔을 올리고 색동옷 입고 춤을 추며 힘써 모부인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다.
경진년(庚辰年, 1700, 숙종 26)에 모친상을 당하자 연로함에도 예법을 집행하는 것이 오히려 해이하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사우들과 함께 타우 선생의 사당을 세워 선비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삼는 일을 논의하였는데, 미처 완수되기 전에 대관(臺官)으로 있던 정식(鄭栻)이 그곳을 훼철하기를 청하고 그 유생들에게 죄를 물었다. 공이 실제 그 의리를 주도하고 공의 아우 제윤(齊尹)이 그 일을 맡았는데, 제윤은 공이 연로한 나이로 다시 유배될까 걱정하여 자신이 공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진실로 그런 심정이겠지만 내 의리에 있어 구차히 피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자수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정해년(丁亥年, 1707, 숙종 33)에 풀려나 돌아왔다. 계사년(癸巳年, 1713, 숙종 39)에 병으로 누웠으나 정신은 또렷하여, 자식과 조카들이 한담이나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 많으면 마음을 해친다.”라고 경계하고, 문인들 가운데 바른 자세로 앉아 있지 않은 자가 있으면“머리를 곧게 세우라.”라고 큰소리로 말하였으며, 병중에 자신이 쓴 관(冠)의 모양이 바르지 않으면 바로잡으라고 명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지만, 사문(師門)의 억울함이 풀리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듬해(1714년) 1월 6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3년 뒤에 타우 선생이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또 2년 뒤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과 학문을 포상하여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였다. 공은 천성이 돈후하고 지조가 확고하여 스승을 섬기는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독실하였다.
성명(性命)과 도덕(道德)의 설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특히 계구신독(戒懼愼獨)의 공부에 힘을 기울여 만년의 공부가 더욱 숙련되었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의 행실은 부모님을 섬김에 물심양면으로 지극히 봉양하였고, 형제들에게는 화목하고 즐거운 정을 다하였다.
재산을 나눌 적에는설포(薛包)의 고사처럼 자신은 늙은 하인과 황폐한 전답을 가져가고, 의지할 데 없는 생질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항상 옛사람이 형제들과 함께 사는 의리를 사모하여 형과 한집에 살았는데, 온 집안이 엄숙하면서도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은 화기애애하였다.
새벽이면 가묘(家廟)를 알현하였고, 병이 들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 새벽닭이 울 때에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상기를 마친 지 오래되어도 선친을 언급할 때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조천(祧遷)한 신위를 옮길 적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으며, 여러 종친들을 가르쳐 의론을 세워 해마다 친진(親盡)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향당에 있어서는 예로 사귐이 공손하고 말 기운이 온화하여, 충애(忠愛)의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고 정성스런 감정이 말하기 전에 있었다. 이 때문에 남의 허물을 꾸짖음에 남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남의 선(善)한 일을 인정함에 남들이 모두 권면되었다. 후학들을 인도할 적에는 비천하거나 나이 어린 자를 가리지 않고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자를 따지지 않고서 각기 그 재능에 맞추어 지성으로 가르쳤다.
선비의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성현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다.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순서를 두어 엽등(躐等)하게 하지 않았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고 실질에 힘쓰며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근래에 배우는 자들이《소학》을 일삼지 않고는 고원함을 얘기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며, 제 몸과 마음은 살피지 않고 언어와 문자를 공부하는 것이 큰 폐단이다.”
하였다.
일찍이 서원에서〈은병학규〔隱屛約束〕〉를 수정하여 후학들의 준칙으로 삼았으며, 또 별도로 서당(書堂)을 만들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세워 동재에서는 《소학》 및 여러 성리서를 강학하고 서재에서는《춘추(春秋)》및 사(射)ㆍ어(御) 등의 절문(節文)을 강학하고자 하였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항상 사문(師門)의 억울함 때문에 지극히 애통해하여 당세에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시대를 걱정하고 시속을 개탄할 때면 의기(意氣)가 격렬해져 반드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으며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만년에《춘추》읽기를 좋아하였는데,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의리는 복수하는 일이 아니겠는가.《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건시(乾時)의 전투는 비록 패하였으나 오히려 영예롭다.’라고 하였으니, 우옹(尤翁)이 평생토록 간직한 뜻이 바로 여기에 근본한 것이다.”
하였다.
본래 시를 읊조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복수에 대한 일은 여러 번 시에서 드러내었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에 성상께서 멸망한 명(明)나라를 애통해하며교서를 내리자, 공이 받들어 읽고 감개하여 한 통의 상소를 지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 진술하였는데, 실제 올라가진 못하였다. 아! 이를 어찌 속인들과 함께 쉽게 이야기하겠는가.
평소《소학》과《근사록》을 독실하게 믿고《심경》에 귀의하였으며, 또《대학》과《가례》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말처럼 암송하였다. 제례(祭禮)는《격몽요결(擊蒙要訣)》을 위주로 하였고 상제(喪制)는《상례비요(喪禮備要)》로 판단하였다.
어떤 이가대하척(帶下尺)을 사용하지 않자 공이 말하기를,
“《가례》에 비록 없으나,《상례비요》에 이미 기록되어 있으니 사용함에 무슨 의문점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문인들이《상례비요》를 따라 상례를 집행한 것은 공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공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만년이 지은《사생수수록(師生授受錄)》한 권은 사기(辭氣)가 평담하고 의리가 깊이 담겨있으니 진실로 덕 있는 자의 말이었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문익공(文翼公이경억(李慶億))의 딸로, 공보다 먼저 경진년(庚辰年, 1700, 숙종 26)에 세상을 떠났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전(爾典)이고 딸은 송선길(宋善吉)에게 시집갔다. 이지(爾志) 및 김일용(金一庸)과 홍치서(洪致叙)의 아내는 측실 소생이다. 이전의 아들은 무위(無違)이고 사위는 최여성(崔與聖), 신의하(申義夏)이다. 사위 송선길의 두 아들은 진태(鎭泰), 진대(鎭岱)이다.
나는 식견이 어둡고 학문이 미천하지만 노년의 공을 만나보니, 옛사람의 이른바 “진실한 마음으로 각고의 공부를 하는” 사람은 바로 공 한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근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윤리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공은 생사가 갈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스승을 위해 지성으로 노력하다가 남쪽과 북쪽으로 유배되어 곤경 속에 떠돌아다니며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는 바가 없었으니, 이는 옛날의 역사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일이다.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는 공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밝아졌으니 세도(世道)에 보탬이 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공의 언행을 모아서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선택을 기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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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처사 …… 행장:
저자가 신후윤(愼後尹, 1640~1714)을 위해 쓴 행장이다.
[주02] 선생을 …… 하였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부친을 살해하고 계모와 간음한 변고가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는데, 옥사를 담당하는 이들이 모두 느슨하
게 다스렸다. 이상(李翔)은 이 일이 풍교(風敎)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여 사직상소에다 형정(刑政)이 느슨해진 잘못을 대략 언급하
였다.
윤증(尹拯)의 무리가 항상 선생을 음해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무리 가운데 관찰사로 있는 자
로 하여금 비밀리에 여러 죄수들을 꾀어 제멋대로 날조하여 옛날의 판결문을 모두 뒤집고, 계모와 간음한 옥사를 선생에게 뒤집어씌
워 증거로 만들어 선생을 해치려고 하였다.《陶菴集 卷46 從祖打愚先生墓誌》
[주03] 내가 …… 순행하였는데:
저자는 1709년(숙종 35)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가 되었다.
[주04] 머리를 곧게 세우라:
원문의 두용직(頭容直)은 군자의 몸가짐을 경계한 구용(九容) 가운데 하나이다.《禮記 玉藻》
[주05] 설포(薛包)의 고사:
동한(東漢) 여남(汝南) 사람으로 자는 맹상(孟嘗)이다. 계모가 그를 미워하여 내쫓았는데도 대문 밖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부모의 봉
양을 극진히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재산을 분할하면서 자기는 나쁜 것을 갖고 좋은 것은 모두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小學 善行》
[주06] 은병학규〔隱屛約束〕:
은병학규(隱屛學規)를 말한다.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천(石潭川)에 은거하면서,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았던 것을 본떠서 1576년(선조9) 석담천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만든 규약을 말한다.《輿地圖書 黃海道 海州》
[주07] 춘추전(春秋傳)에 …… 영예롭다:
노(魯)나라 장공(莊公) 9년에 제(齊)나라 군대와 건시(乾時)에서 전투하다가 노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이 일에 대해 호안국(胡安
國)은《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서 “여기서 패배했다고 굳이 말한 것은 원수와 전투하면 비록 패하더라도 또한 영예로운 것이
기 때문이다.[此其言敗者, 爲與讎戰, 雖敗亦榮也.]”라고 하였다.
[주08] 갑신년에 …… 애통해하며:
갑신년(甲申年, 1644)에 명(明)나라가 멸망하였다.
[주09] 대하척(帶下尺):
질대(絰帶)가 매어지는 허리 부분을 감싸서 치마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한 자 길이의 옷감을 저고리의 아래에 덧붙이는 것
을 말한다.
[주10] 진실한 …… 하는:
주희(朱熹)의 문인이었던 황간(黃榦)이 임천현(臨川縣)에서 하기(何基)를 제자로 받아들일 적에 “학문은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각고의 공부를 해야만 가능하다.[必有眞實心地, 刻苦工夫, 然後可.]”라고 당부하였다.
[주11] 생삼사일(生三事一):
부모와 스승과 임금을 똑같이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사람은 세 분에게서 살게 되었으니 이분들
을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주시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나를 먹여 주셨다.[民生於三, 事之如
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國語 晉語》《小學集註 明倫》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