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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7권 / 비명(碑銘)
연원부원군 겸 이조판서 이공 신도비명 병서
(延原府院君兼吏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연원(延原) 이공(李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서 인사 행정을 담당한 것은 선조(宣祖) 말년의 일이었다. 머지않아 공이 정승의 자리에 올라 공업을 빛내 줄 것이라고 선비들이 바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다. 이에 공은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16년 동안 하루도 관직을 담당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금상(今上 인조(仁祖)께서 국내의 위난(危難)을 안정시키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날 밤에 곧바로 공을 등용하여 이조 판서를 삼으시니, 임금께서 관심을 기울인 것이 지극하다는 것을 조정과 재야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았다.
그러나 공은 이미 연세가 높아 힘든 일을 맡을 수 없었기에 노장(露章)을 올려 고사하였다. 7년이 지난 기사년(1629)에 훈봉(勳封)을 띠고 재직 중에 별세하였다. 아아, 정승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진실로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로구나.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광정(光庭), 자는 덕휘(德輝)이다. 이씨의 가계(家系)는 연안(延安)에서 나왔다. 상세(上世)에 습홍(襲洪)이 출사(出仕)하여 고려조에 태자 첨사(太子詹事)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후손들이 관직에 계속 올라 대대로 공적이 기록되었다.
6대를 지나 귀산(貴山)은 비로소 우리 조정에 출사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다. 아들 속(續)은 춘천 부사(春川府使)를 지냈는데, 왕실과의 연인(連姻)을 달가워하지 않아 아들 근건(根健)과 함께 폐고(廢錮)되었다. 근건이 휘 인문(仁文)을 낳았으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이분이 휘 말(𡊉)을 낳았으니, 아버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여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있다가 운명하였고, 판서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휘 경종(慶宗)을 낳았는데, 여산 군수(礪山郡守)를 역임하고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휘 주(澍)를 낳았으니, 선비의 행실을 닦아 당세에 이름이 드러났다.
일찍이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을 때 어떤 일에 대해 논했는데,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가산 군수(嘉山郡守)로 좌천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연녕부원군(延寧府院君)에 봉해지니, 이분이 공의 선고(先考)이다.
선비(先妣) 유씨(柳氏)는 본관이 진주로, 정국 원훈(靖國元勳) 순정(順汀)의 증손이며, 군수 사필(師弼)의 딸이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에 공을 낳았다. 공은 6, 7세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찬성공(贊成公 이경종(李慶宗))이 항상 눈여겨보고 말씀하기를 “이 아이가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년(童年)이 겨우 지난 나이에 이미 학문을 성취하여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자, 동료들이 모두 추앙하고 존중하여 나란히 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가정(家庭)의 가르침을 따라 박사가(博士家)의 말을 전념하여 익히지 않았고, 선후로 상사(喪事)를 만났으므로 벼슬길 진출에 차질이 있었다. 만력(萬曆) 경인년(1590)에야 비로소 교관(敎官)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묘년(1591)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사직(史職)에 추천 임명되었다. 이듬해 세자가 책봉되었는데, 춘방 설서(春坊設書)로서 세자의 행차를 따라 관서 지방으로 왜구를 피했다. 길에서 정언 겸 지제교(正言兼知製敎)에 임명되었고, 자리를 옮겨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이 되었다.
또 이듬해 계사년(1593)에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회복하자, 공이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 공을 도와 실질적으로 그 일에 종사하였다. 이윽고 지평(持平)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는데,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고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그 뒤에 이조와 예조와 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좌승지(左承旨)로서 반역의 옥사(獄事)를 맡아 처리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정유년(1597)에 명나라 조정이 오랑캐의 기만을 토벌하기 위해 거듭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나오니, 군수(軍需) 조달을 모두 우리의 도움에 의지하였고, 호남(湖南)은 새로 침략을 당하니 도탄에 빠져 온전하지 못하였다.
당시 공은 부사(副使) 심유경(沈惟敬)의 접반사가 되어 영남(嶺南)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곧바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어 군량을 관장하였다. 그해 겨울에 양원(楊元)이 남원을 버리니, 공이 탈출하여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호남의 군향(軍餉)은 그대로 담당하였다.
무술년(1598)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초배(超拜)되고,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에 다녀왔다. 기해년(1599)에 호조와 공조의 판서가 되었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또 호남(湖南)의 군향을 맡게 되었다. 전후로 바닷가 고을을 출입하며 왕명을 수행하느라 노고가 많았으므로, 선조(宣祖)께서 탄복하셨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호조(戶曹)와 예조(禮曹)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는데, 사직한 뒤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가을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청렴하고 엄격하며 방정하고 근면하여 몸가짐이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어떤 편비(褊裨)가 아버지를 위해 추위에 입는 갖옷을 샀는데, 이윽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의 사사로운 일 때문에 우리 공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하였다. 이에 통역하는 사람 가운데 이익만 추구하던 이들이 서로 경계하여 범하는 일이 없었다.
공이 연경에 있을 때, 임금께서 공의 이전 공로를 인정하여 이미 한 자급(資級)을 높여 주도록 명하셨다.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오자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직급을 더해 주고 노비를 넉넉히 하사하였으며,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하셨다.
겨울에 또 예조에서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염퇴(恬退)를 숭상하고 사알(私謁)을 막아, 만약 사사로운 청탁이 있으면 비록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반드시 배척하였으므로, 골목 밖에 한 사람의 자취도 없었다. 용렬하다느니 못났다느니 하며 사람들이 비방해도 공은 개의치 않았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임금께서 공이 호종(扈從)한 공로를 기록하여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이라는 호를 내리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하셨다. 그해 가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이때부터 18년 동안 훈신(勳臣)으로 지내다가, 광해군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다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은 선대 조정의 구신(舊臣)으로, 조정이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 것과 조정의 명령이 날마다 새로 바뀌는 것을 보고, 드디어 병든 사정을 아뢰어 벼슬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오직 때때로 봉조청(奉朝請)만 받았을 뿐, 문을 닫고 손님을 받지 않았으며 화평한 자세를 스스로 고수하니, 위험과 모욕이 미치지 않았다.
이윽고 금상(今上 인조(仁祖))께서 공의(公議)를 따라 장차 공을 크게 쓰고자 하셨는데, 공은 물러날 나이임을 들어 면직을 청하고 전혀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임금께서 평소 공을 중시하였으므로, 연이어 공조와 형조의 판서를 맡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번번이 사직하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병인년(1626, 인조4)에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그 지역은 옛 도읍으로 사람들은 이굴(利窟)로 여겼지만, 공은 더럽고 추잡한 것들을 척결하고 맑은 물로 씻어내듯 일신하였다. 가을에 해직되어 돌아올 때, 평소 사용하던 자잘한 물품까지도 모두 관부(官府)에 돌려주었으니, 그곳의 부로(父老)들이 그리워하는 시를 읊었다.
이때에 나라가 다시 파천(播遷)하게 되었는데, 공이 자력으로 호종하면서 일찍이 늙었다거나 병들었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정묘년(1627)에 강화도로 들어가게 되자, 풍토병에 더욱 시달려 3년 뒤에는 병이 깊어지니, 임금께서 태의(太醫)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돌보게 하셨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회를 멈추고 부의를 더해 주었으며, 염습(斂襲)과 반함(飯含)으로부터 상사에 필요한 모든 일을 유사(有司)가 담당하여 관청에서 도와주었다. 파주(坡州) 관아의 남쪽 노곡(弩谷) 등성이에 장사하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아아, 공이 운명하자 진신대부(搢紳大夫)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에 어찌 공처럼 청명하고 온손(溫巽)하며 조정에 나가기를 어려워하고 초야로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사람이 있겠는가. 명리(名利)가 한 세상을 풍미하여 그 절조를 빼앗는데, 공은 전아한 도리를 깨끗이 닦아 편안한 자리에 있을 때나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나 변함이 없으셨다.
작위(爵位)는 높았으나 지나칠 정도로 허리를 숙였으며, 권세의 길을 마치 겁쟁이가 함정을 피하는 것처럼 멀리하셨다. 아아, 어찌 이보다 더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있겠는가.” 학사와 후배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에 어찌 공처럼 인심(仁心)으로 바탕을 삼아 엄격하고 신중하게 스스로를 단속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겸손함이 아랫사람에게도 미쳐서 한마디 말씀을 할 때도 오히려 남을 상심하게 할까 두려워하셨다. 그러나 내면이 굳세고 방정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아, 높은 관직에 계신 것이 거의 30년이었지만 평소의 신조가 한결같으셨다.
아아, 어찌 이보다 더 덕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향당(鄕黨)과 종족(宗族)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고 공손하였으며, 더욱이 친족 사이의 정의가 가장 자상하셨다.
공이 어려서 부모님을 섬길 때, 세심하게 자제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귀한 자리에 올라서는 미처 봉양을 다하지 못했다며 항상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다. 아우 창정(昌庭)을 보살폈는데, 흰머리가 되도록 늙어서도 어릴 때와 같이 하셨다.
아우가 세상을 떠나자 대단히 슬피 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5개월 동안 상선(常膳 평상시 먹는 반찬)을 물리치셨다. 종족들은 그 어짊을 우러르고, 마을 사람들은 그 의리에 탄복하였는데, 이제는 어떻게 이런 분을 볼 수 있겠는가.” 하인들과 마졸(馬卒)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처럼 미천한 사람들이 어찌 감히 공에 대해 알겠는가. 그러나 권세가와 요직에 있는 사람의 집에서 일찍이 공의 수레를 보지 못하였고 뇌물이나 청탁이 일찍이 공의 집에 이르지 않았으니, 우리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대한 간절한 바람은 공에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어찌하여 그 바람대로 되지 못하였단 말인가.”
이에 나 민구(敏求)는 삼가 여러 사람들의 칭송을 따라 공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은 진실로 중흥(中興)의 훈신(勳臣)이며 현신(賢臣)이다.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절의를 다하고 청렴한 자세로 행실을 닦았으니, 신하로서의 도리가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성균관 유생에서 시작하여 이끌어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낭관(郞官)을 거쳐 은비(銀緋)의 반열에 올랐다. 연달아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되어 마침내 성대한 지위에 오르고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어찌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겠는가.
혼란한 시대를 만나 신하 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아낀다면 어찌 직분을 다할 수 있겠느냐며, 말고삐를 잡고 온갖 수고를 다하면서도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중외(中外)에 임금의 명령을 선포하느라 화살과 돌이 날아다니는 전장을 뛰어다니면서도 일찍이 집안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공이 고굉(股肱)의 신하로서 직분을 다하고 충정(忠貞)을 다한 것이 이와 같았고, 임금께서 공에게 보답한 것도 또한 지극하셨다. 그러나 세상에 드문 지우를 받고서 만일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싹튼다면, 이것은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역임한 자리는 모두 세상 사람들이 이(利)를 주관하는 직책이라 한 번만 출입해도 그 집이 부유해진다고 여겼지만, 공은 빙벽(氷蘗)과 같은 지조를 더욱 깨끗하게 하여 봉록(俸祿) 이외에는 조금도 늘리지 않았다. 평소 곡식을 빌려 마련하고 제사도 지내지 못할 정도였으며, 해진 옷을 입고 여윈 말을 타며 시종 한미한 선비처럼 사셨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일찍이 공을 염근리(廉謹吏)로 기록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게 하였으니, 공은 순수한 덕과 아름다운 덕망을 지니고, 겸손함으로 복을 누리고 절조(節操)를 편안하게 여긴 분이라고 하겠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첫 번째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풍덕 군수(豐德郡守) 휘 순(荀)의 딸로,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 5)에 태어나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휘 잠(潛)의 딸로,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2)에 태어나 57세에 별세하였다. 두 부인 모두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을 지녀서 종족들이 모범으로 삼아 본받았다. 공은 모두 3남 8녀를 두었다.
아들 가운데 참지(參知) 현(袨), 그리고 정랑 유성민(柳聖民)과 승지(承旨) 한형길(韓亨吉)에게 시집간 딸들은 청송 심씨의 소생이다. 아들 가운데 군수(郡守) 분(衯)과 좌랑(佐郞) 주(裯), 그리고 보덕(輔德) 민광훈(閔光勳), 사인(士人) 박문빈(朴文彬), 홍우원(洪宇遠), 이익배(李益培), 박함장(朴諴長), 박수행(朴粹行)에게 시집간 딸들은 양천 허씨의 소생이다.
아아, 공은 몸가짐과 집안 단속에 엄격하여 흠이 없었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바른 도리로 하였다. 자신이 다 쓰지 않은 복을 미루어 길이 후세에 드리워, 세 아들이 과거에 이어 합격하여 재능이 한 시대에 드러났다. 그리고 내외의 많은 자손들은 찬란하게 모두 빼어나 번성함이 끝이 없었다.
여기에서 군자들이 또 하늘이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복으로 보답함이 대체로 더욱 성대하여 무궁함을 알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신하가 임금 섬김에 / 臣惟事君
대강을 세워야 하니 / 立爲大綱
어떻게 해야 도리를 다할까 / 曷用自盡
성실하고 청렴해야지 / 曰誠與淸
정성스러운 이공은 / 肫肫李公
진실로 착함을 실천하였으니 / 允蹈其臧
진실로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 匪允蹈之
능히 마음에 체득하였네 / 克體在衷
집안 다스려 / 治于有家
효성과 우애 피어나고 / 孝友爰發
조정에 나아가 국정 도우니 / 出贊王猷
황조의 뜻과 맞았어라 / 皇祖是契
운뢰가 위난을 만들어 / 雲雷構屯
왕께서 서쪽 의주로 파천하시니 / 王播西灣
변방의 일 걱정스러웠는데 / 恤恤其圉
공이 어려움 막아냈지 / 公扞于艱
십만 군사가 / 師徒十萬
팔 년 동안 싸우니 / 八年于征
끊임없이 군량 마련하느라 / 驛驛其餉
공이 그 길을 담당하였네 / 公司厥程
창고마다 전대마다 / 倉廒囊橐
가득 차서 나라 살림 넉넉했는데 / 實裕邦計
돌아와 집안 살림 살펴보니 / 歸視其家
죽으로도 끼니 잇지 못할 지경 / 鼎粥不繼
앵앵거리며 이익 좇는 사람들 / 營營者人
공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네 / 莫問公廬
공을 한미한 선비라 했지만 / 謂公寒士
총재이며 사도였네 / 冢宰司徒
온화하고 아름다운 위의로 / 溫溫令儀
자만하지도 않고 고집하지도 않았도다 / 不盈不持
공을 조용한 사람이라 했지만 / 謂公靜者
능연각과 운대에 새겨질 분이네 / 煙閣雲臺
자질 풍부해도 다 쓰이지 못했지만 / 豐資嗇用
하늘이 내려다보아 안다네 / 有監自天
공께서 그 증서를 잡아 / 公操其券
자손이 번성하였네 / 旣多子孫
겸손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복 받으며 / 非謙胡受
씨 뿌리지 않았다면 어찌 거둘 수 있을까 / 非種胡穫
내가 이 돌에 새기노니 / 我鑱斯石
후대의 사람은 본받을지어다 / 惟後人式
[註解]
[주01] 얼마 …… 않았다 : 이광정이 광해군(光海君)의 재위(在位) 기간에 출사하지 않았음을 말한다.[주-D002] 정승 : 삼사(三事)는 하
늘을 섬기고 땅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신하라는 말로,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가리킨다. 공상(公相)은 공경(公
卿)과 재상(宰相)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광정이 정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므로, 정승으로 풀이하였다.
[주03] 덕휘(德輝) : 이민구는 이광정의 자를 직접 밝히지 않은 채 모(某)라고 하였는데, 이준(李埈, 1560~1635)의 기록에 근거하여 보
충하였다. 《蒼石集 卷16 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延原府院君李公墓誌銘》
[주04] 이귀산(李貴山) : ?~142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흥서(興瑞), 호는 괴은(槐隱)이다.
[주05] 아들 …… 폐고(廢錮)되었다 : 한백겸(韓百謙)의 《구암유고(久菴遺稿)》 하 〈영응이선생행장(永膺李先生行狀)〉에 “태종대왕이
포의일 때 교제하였으므로, 후궁의 소생으로 혼인하기를 바랐으나 공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자에게 대답한 말이 자못 거만하여 죄를 받았다.[太宗大王與之爲布衣交, 以後宮所出求爲婚, 公不肯, 對使者語頗倨, 獲罪.]
”라고 하였으니, 이 내용에서 이속(李續)이 폐고된 원인을 알 수 있다.
[주06] 유순정(柳順汀) : 1459~151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이다. 1506년(중종 원년) 이조 판서로서 중
종반정을 모의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 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주07] 유사필(柳師弼) : 1501~1559. 본관은 진주, 자는 희현(希賢)이다. 온양 군수(溫陽郡守)를 역임하였다. 《忍齋集 卷3 有明朝鮮
國通訓大夫溫陽郡守柳公墓碣銘 幷序》
[주08] 이듬해 …… 피했다 :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한 일을 가리킨다.
[주09]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愚伏集 卷20 漢陰李公行狀》
[주10] 심유경(沈惟敬) : ?~1597. 명(明)나라 사람으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주11] 양원(楊元)이 남원을 버리니 : 양원은 명나라 장수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왔었고,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1597
년에 다시 참전하여 남원성을 방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주12] 마귀(麻貴) :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제독이다. 같은 해 12월에 도원수 권율(權慄)과 합세
하여 울산에 내려가서 도산성(島山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주13] 가을에 …… 되었는데 : 《선조실록》 35년 4월 22일 기사에 중궁고명주청사(中宮誥命奏請使)를 임명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광정
이 상사(上使)이고, 장만(張晩)이 부사였다.
[주14] 조정의 명령 : 상위(象魏)는 본래 궁궐 밖에 세웠던 궐문(闕門)인데, 조정의 명령을 선포할 때 이곳에 내걸어 보였으므로, 나라의
법이나 명령을 의미하게 되었다.
[주15] 봉조청(奉朝請) : 조선 시대 전직 관료를 대우하여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사임한 뒤에 특별히 주는 벼슬이다. 실무는 보지
않고 의식이 있을 때에만 조정에 나가 참여하며 종신토록 녹봉을 받았다.
[주16] 물러날 나이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대부가 70세가 되면 일을 그만둔다.[大夫七十而致事]”라고 하였다.
이광정은 1552년(명종 7)에 태어났으므로, 인조(仁祖)가 즉위했을 당시 72세였다.
[주17] 겸손함이 아랫사람에게도 미쳐서 : 이광정의 겸손함을 말한 것이다. 《주역》 〈겸괘(謙卦) 단(彖)〉에 “천도는 아래로 내려와 구제하
여 밝게 빛나고, 지도는 낮지만 위로 간다.[天道下濟而光明, 地道卑而上行.]”라고 하였다.
[주18] 은비(銀緋)의 반열 : 은은 은대(銀帶)로서 정3품에서 정6품까지의 문무관의 띠이며, 비는 금대로서 당상관(堂上官)을 말한다.
[주19] 고굉(股肱)의 신하 : 임금을 충실히 보좌하는 신하를 말한다. 《서경》 〈군아(君牙)〉에 “지금 그대에게 명하노니, 그대는 나를 도와
나의 다리와 팔과 심장과 등뼈가 되어, 그대의 조고가 옛날에 하던 일을 이어, 조고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今命爾, 予翼, 作股肱心
膂, 纘乃舊服, 無忝祖考.]”라고 하였다.
[주20] 제사도 …… 정도였으며 : 불능구이궤(不能具二簋)는 두 그릇의 음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로,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주역》 〈손괘(損卦) 단(彖)〉에 “두 그릇의 음식으로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二簋可用享]”라고 하였다.
[주21] 운뢰(雲雷)가 위난(危難)을 만들어 : 이광정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여러 차례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는 말이다. 《주역》 〈둔괘
(屯卦) 상(象)〉에 “구름과 우레가 둔이니 군자가 보고서 천하를 경륜한다.[雲雷屯, 君子以, 經綸.]”라고 하였다.
[주22] 총재(冢宰)이며 사도(司徒)였네 : 이광정이 이조 판서와 호조 판서를 역임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23] 능연각(凌煙閣)과 …… 분이네 : 이광정이 뛰어난 업적을 지닌 공신이라는 말이다. 연각(煙閣)은 능연각으로, 당 태종이 훈신(勳
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 걸었다. 운대(雲臺)는 후한 명제(明帝) 때 등우(鄧禹) 등 전대(前代)의 명장 28인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놓고 추모한 공신각(功臣閣)의 이름이다.
[주24] 공께서 …… 잡아 : 하늘이 내려 주는 복을 이광정이 받는다는 말이다. 권(券)은 계약 증서와 같은 것인데, 고대에 계약할 때는 계약
증서를 둘로 나누어 한 조각은 채권자가 가지고 다른 한 조각은 채무자가 가졌다. 이것을 조권(操券)이라고 하였다.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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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延原府院君兼吏曹判書李公神道碑銘 幷序
延原李公之位冢宰。操衡秉政。當宣祖季年。士朝夕望晉宅鼎軸。卒彰其功施。而未幾時事大變。公屛閒退處。迄十六年未嘗一日在事。至癸亥今上定內難旣踐阼。卽其夜起公爲吏曹判書。則朝野灼然知人主注意至到。而公已年邁不任劇。露章固辭。歷七稔己巳。以勳封。考終于位。嗚呼。三事公相固有命哉。謹按公諱光庭。字某。李姓出延安。上世襲洪發跡。麗朝官太子詹事。組紱相檀。連代載烈。六傳貴山。始事我朝爲都觀察使。子曰續。春川府使。不肯連姻王室。與其子根健俱得罪廢。根健生諱仁文。僉知中樞。是生諱𡊉。仍父子登第。卒三陟府使。贈判書。生諱慶宗。礪山郡守。贈贊成。生諱澍。飭儒行。顯名當世。嘗任正言。論事觸時忌。斥守嘉山郡以卒。贈領議政延寧府院君。是爲公考。妣柳氏。籍晉州。靖國元勳順汀曾孫。郡守師弼之女。以嘉靖壬子生公。自年六七歲受書。贊成公恒目屬曰。是將大吾門。甫離童。已業成發解。癸酉。升上庠。儕流咸推重莫之齒。服膺庭訓。不專習博士家言。後先居齊斬。故偃蹇進取。萬曆庚寅。始以敎官捷文科。辛卯。由承文正字薦拜史職。明年。儲宮建。以春坊說書從駕。避寇西土。道拜正言。兼知製敎。遷郞禮兵。又明年癸巳。天兵復箕京。公佐接伴使李公德馨實從其役。尋以持平赴召。改兵曹正郞。擢授同副承旨。其後歷吏禮兵三曹參議。乙未秋。以左承旨掌讞叛獄。陞嘉善。爲國子成均大司成。丁酉。中朝討夷酋詐款。再發兵東征。軍興調度。悉倚辦于我。湖南新中寇。魚爛不全。時公儐沈副使從嶺表還。旋拜戶曹參判。往釐軍食。其冬。楊元棄南原。公脫身歸朝。握南餉如故。戊戌。特超資憲。隨麻提督于蔚山。己亥。判度支,工部,漢城府尹。又命督餉湖路。前後出入海澨。奔奏積勤勩。宣廟歎之。壬寅。由度支春官授吏曹判書。辭遞爲大司憲。秋。奉表朝京師。淸嚴方厲。用身範下。有褊裨爲父買寒裘。旣而不可曰。奈何以己私溷我公。於是舌人之仰機利爲業者。率相戒毋犯。公之在燕。上用前勞已命陞一級。使還。加崇政階。優賜臧獲。判敦寧,義禁兩府。冬。又自禮曹移長天官。崇恬退屛私謁。苟有蹊逕紹介。雖才必斥。巷門外無一跡。闒茸宂散交口流謗。不恤也。甲辰。上錄扈從功。錫號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封延原君。其秋。進輔國崇祿大夫延原府院君。自是處勳秩十八年。爲光海辛酉。復拜戶曹判書。公以先朝舊故。見朝政日壞。象魏日益新。遂謁病不肯拜。唯時時奉朝請已。則杜門謝客。恬穆自守。殆辱亦不及焉。旣今上循公議。欲將大用公。而公乃引禮年蘄免。無所內顧。而上雅重公。連判工刑。未幾輒辭。最後丙寅。留守開城。其地舊都。人視爲利窟。公刮滌垢汚。濯以淸流。及秋解歸。籍日用纖毫悉還官府。父老詠思。時國家再罹遷播。公自力從衛。未嘗言老病。丁卯。入江都。益感水土。三年而疾遂病。上爲遣太醫齎藥守視。訃聞。輟朝加賵。自斂含以往皆有司官庀。葬于坡州治南弩谷之原。從先兆也。嗚呼。公旣歿。而搢紳大夫曰。世寧有淸明溫巽難進易退如公者乎。名利擊一世敓其操。而公雅道潔修。歷夷險無變。爵位顯隆。俯僂滋甚。形勢之途。如怯夫避穽。嗟哉。胡以範俗矣。學士後生曰。世寧有仁心爲質嚴謹自治如公者乎。謙光下濟。出一言猶恐傷人。而剛方內立。不與物往。居極品幾三十年。素履若一。嗟哉。胡以考德矣。鄕黨族姓則曰。內行篤悌。唯親懿最詳。公少事父母。斤斤修子弟職。旣貴不逮養。恒言涕洟。撫其弟昌庭。白首如嬰兒。死則哭泣甚悲。五月郤常膳。宗黨仰其仁。里閈服其義。已乎何可得也。輿臺馬卒則曰。賤人焉敢知公。迺權門要路。未嘗見公車。苞苴請謁。未嘗踵公門。獨吾儕加額之望屬公未已。今奚以不克諧也。於是李敏求謹次其輿誦。而竊槪公始卒曰。公固中興勛賢臣。以忠竭節。以淸砥行。人臣之誼。若是盡矣。夫起諸生。不藉援引。由郞署躋銀緋。連歲超擢。遂臻盛位。稱遇於人主。豈徒然哉。遭時擾攘。念人臣愛惜筋力。曷以輸分。羈絏焦勞。不擇利病。宣猷中外。奔命於矢石之間。未嘗問家室。公之竭股肱盡忠貞者若是。而上所以下報公者亦至矣。然自以受不世之知。苟萌意濡益。是爲負國。所踐履皆世所稱利柄。一出入而溫其家。而公益蠲其氷蘗。俸祿之外。不長尺寸。居恒稱貸。不能具二簋。敝衣羸乘。終始寒士。朝廷嘗錄公廉謹吏以風一世。公其純德令望。謙亨安節者哉。公凡再娶。先夫人靑松沈氏。考諱荀。豐德郡守。生嘉靖庚戌。卒年三十有七。後夫人陽川許氏。考諱潛。開城留守。生隆慶己巳。卒年五十有七。俱有至行懿德。宗族取法焉。擧三男八女。男袨。參知。女適正郞柳聖民,承旨韓亨吉。爲沈夫人出。男衯。郡守。裯佐郞。女適輔德閔光勳,士人朴文彬,洪宇遠,李益培,朴諴長,朴粹行。爲許夫人出。嗚呼。公持身持家。斬斬無瑕玷。訓誨子弟。一於義方。推其未究於用者。以永後垂。三子繼轢儒科。材能顯一時。而內外子姓甚蕃。琳琅騈秀。有衍不匱。君子又知天以報繁昌之祚。蓋愈盛而未艾也。銘曰。
臣惟事君。立爲大綱。曷用自盡。曰誠與淸。肫肫李公。允蹈其藏。匪允蹈之。克體在衷。治于有家。孝友爰發。出贊王猷。
皇祖是契。雲雷構屯。王播西灣。恤恤其圉。公扞于艱。師徒十萬。八年于征。驛驛其餉。公司厥程。倉廒囊橐。實裕邦計。
歸視其家。鼎粥不繼。營營者人。莫問公廬。謂公寒士。冢宰司徒。溫溫令儀。不盈不持。謂公靜者。煙閣雲臺。豐資嗇用。
有監自天。公操其券。旣多子孫。非謙胡受。非種胡穫。我鑱斯石。惟後人式。<끝>
東州先生文集卷之七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