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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맹호사단 제1진 초대 재구대대장인 나는 책임전술지역[TAOR]을 배당 받자 제일 먼저 반듯한 야자나무를 베어다가 국기게양대를 만들어 태극기를 게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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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선에서, 맹호사단 초대 재구대대장 시절: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안고 많은 부하장병을 살리고 살신성인한 고 강재구 소령의 정신으로 싸운 재구대대 제1진은 전 기간을 통해 대대단위 최고의 수훈을 전사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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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진 맹호사단 재구대대 장병은 고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과 부하사랑 정신에 감화되어 한층 투철한 사명감으로 단결하여 전투에 임함으로써 월남전 전과정을 통해 대대단위 최고 수훈을 기록하였다. 세계 유명 메스컴은 '월남전에서 새 신화를 창조' 했다며 경쟁적으로 재구대대 전황을 보도 하였다. 영국의 유명 일간지 '런던 타임즈' 를 비롯하여 미국의 유력 일간지 ' 시카고 트리븐' 지는 재구대대 승전기록을 특집기사로 보도하였다. 특히 '시카고 트리븐'지는 그 특집기사를 미 국회 의사록에 게재하기 까지 하였다. 이 기사의 내용과 상세 정황은 채명신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에 수록돼 있다. 이 사진은 월남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1번도로에서 평정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승리의 기쁨에 포즈를 취했다.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직업군인으로서 승리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이 1번도로 개척작전에서 고 강재구 소령과 서울고등학교 및 육군사관학교 16기 동기생인 제9중대장 용영일 대위가 발군의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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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구대대 CP (Command Post-지휘소)를 방문한 VIP. 오른쪽부터 주월한국군 부사령관 이훈섭 장군,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 내무부장관 김일환. 연대장 김정운 장군, 재구대대장인 나. 원래 연대장은 대령이지만 김정운 대령은 제1연대 작전 성공으로 현직에서 장군으로 진급 했다. 이후 귀국하고 그 후임으로 전성각 대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재구대대CP 현판은 내가 한국에서 출국전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인데 이 현판이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많은 VIP가 꼭 이 현판앞에서 사진 촬영을 원했다. 한때 나는 이 현판 때문에 욕도 먹었다. 전투 대대장이,PR에 치중한다고.....,그래서 한동안 치워버렸지만 그 소식을 듣고 채명신 사령관이 헬기로 사이공 사령부에서 날아와 ''말도 안돼, 강재구 정신을 앙양해야 돼" 하고 다시 달기를 지시해 복구했다. 사이공 사령부에서 재구대대는 서울에서 부산보다 멀다. 재구대대 현판이 유명해진 것은 그 디자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때문이기도 했다.현판 양쪽 기둥에 주시하기 바란다. 현판 네모꼴 위까지 흰 기둥이 한 뼘 가량 올라가있다.이 사진에서는 주시하지 않는 한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곧 군대부호에서 대대를 의미한다.하나는 중대고 두개는 대대, 셋은 연대이다.여단 이상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부호는 별을 상징하는 X표로 사용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이 현판은 재구대대 지휘소라는 명확한 상징이 된다. 한편, 영어의CP는 미군을 위시한 영어권 군대와 한자의 [在求]는 한자문화권인 월남군대와 함께 한다는 뜻을 갖는다. 자주 한,미,월 합동작전을 실시 하기 때문에 3국 간의 유대가 필요한 전장이었다. 따라서 이 현판은 재구대대의 승전보와 함께 외신에 보도되는 기본 메뉴 역할까지 해냈다. 이 현판 앞에서 사진 촬영한 VIP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월남 티우 대통령 장기영 국무총리 월남 키 수상 등 국가 수반과 장관급 그리고 고위 장성, 정치인 , 박순천 여사 모윤숙 시인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재구대대가 유명해지자 내 후임 자리를 놓고 경합이 치열했다.그 가운데 하나회 실세 노태우 중령은 내 다음 다음 대대장으로 부임했지만 재구대대의 명성을 유지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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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한국군의 최초 사단급 작전인 맹호5호작전에서 재구대대가 최고 수훈을 기록하자 맹호사단장이며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재구대대 전 장병에게 치하를 하기위해 격전장을 방문하였다. 채명신 장군에게 경례하는 재구대대 장병. 맨 앞 중앙에서 경례하는 대대장인 나. 전 대대 장병이 도열하고 있다. 당시 대대 병력은 증강된 대대로 약 100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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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서 계속 승전보를 올리니 또 무공훈장이다. 맹호5호작전 후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 내 가슴에 충무무공훈장을 달아주고 있다. 내 옆에는 재구대대 제11중대장 이재태 대위가 다음 훈장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공훈장을 수훈할 때마다 부하 장병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천명 가까운 장병들에게 혜택이 돌아갈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안타까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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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의 중앙은 재구대대장인 나. 좌측은 10중대장 이규봉 대위. 우측은 11중대장 이재태 대위. 이 들 중대장은 모두 육사 16기이며 훗날 장군이 되었다. 이 사진은 맹호5호작전이 끝난 후 각각 영예의 무공훈장을 수훈, 가슴에 달고 기쁨의 기념촬영. 원래 훈장제도는 프랑스 나폴래옹이 창안(이 서재 연재코너 [국가와 훈장] 참조)한 것인데 그 매력이란 생명과도 견줄때가 있으니 그 마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부하 장병이 잘 싸워준 덕택으로 월남전에서 가장 훈장을 많이 수훈한 대대장으로 기록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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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부하장병에게 미안하다. 이 사진은 내가 작전지휘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대대장 쯤 되면 부하장병 후방에서 이런 식으로 작전을 지휘한다. 그런데도 무공훈장은 내가 제일 많이 수훈했다. 전사한 부하들에게 미안한 마음 지금껏 잊지 못한다. 다행이 내가 지휘한 제1진 재구대대는 대대 단위 통계상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래서 당국은 나를 월남전 4대영웅으로 호칭한다. 송구스러울 뿐이다. 사진 좌로부터. 월남군 연락장교, 재구대대 제12중대장 방서남 대위, 대대장인 나 , 재구대대 제11중대장 이재태 대위, 재구대대 정보관 권준택 대위, 끝으로 포병 연락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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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국에서의 대대장 지휘용 찝차는 고물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똥차였다. 고장나기가 일쑤였고 휘발유가 모자라 세워두는 경우가 허다했다. 월남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두 대의 새 찝차가 보급되었고 휘발유는 무진장이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풍족한 군수 지원에 흡족한 웃음을 짓는 나. 어디 찝차와 휘발유 뿐이랴. 포탄(당시 대대에는 155미리 곡사포 3문과 105미리 곡사포 1개포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을 비롯하여 각종 실탄 등 전투에 필요한 장비 및 물자는 요청하는대로 무제한 공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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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월남전에서 전투보다 대민 구호 및 심리전에 치중했다. 그 일차적 성과로 월남에 촌락을 건설하여 피난민을 수용했다. 빈딩성 당국은 푸캇군수를 시켜 그 촌락 이름을 재구촌으로 명명케하고 대대장인 나에게 빈딩성장(도지사에 해당)의 감사장을 군수인 LOC대위가 전달했다. 재구대대의 대민 구호 및 심리전으로 많은 베트콩이 귀순해와 적의 정보를 거의 수집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재구대대의 성공적 작전의 수행은 이들 귀순자로부터 얻은 정보의 덕택이었다. 군수 LOC대위 뒤 노인은 재구촌 원로이며 그 뒤에 재구촌 주민이 우리 일행을 환영하고 있다.사진 앞쪽의 뒷모습은 감사장을 받는 대대장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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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재구대대를 방문, 직접 대대장인 나에게 충무무공훈장을 달아주며 전공을 치하하고 있다. 황송한 표정의 내 오른쪽 가슴에 충무무공훈장이 보인다. 채명신 장군과 내가 앉아있는 의자는 포탄상자로 만든 '야전용 인락의자'이다. 채명신 장군은 사이공에 있는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자주 방문하여 장병을 격려했다. 때로는 총탄이 날아오는 격전장까지와서 작전을 독려했다. 재구대대가 계속 작전에 성공하고 대민 심리전이 성과를 거두자 재구대대 TAOR(전술책임지역)의 안전도가 높아갔다. 따라서 거의 모든 VIP의 방문 코스는 재구대대였다. 아마 이 시절이 나 박경석의 전성기였던 거 같다. 맹호5호작전에 이어 맹호6호작전에서도 재구대대가 발군의 전공을 세워 대대장인 나를 위시하여 제9중대장 용영일 대위, 소대장 김무석 중위, 소대장 김길부 중위가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다. 그외 많은 장병이 충무 ,화랑 , 인헌무공훈장을 수훈, 단일 작전에서 베트남전 최고 무공훈장 수훈을 기록하여 고 강재구 소령의 위대한 살신성인에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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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임무 마치고 귀국 육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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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국 후 육군참모총장 김계원 대장으로부터 국가가 수여한 두번째 을지무공훈장을 전수 받는 장면. 육군본부 대회의실에서.왼쪽이 박경석 중령. 1967년은 분에 넘치는 영예가 나에게 주어졌다. 이해 봄, 을지무공훈장 수여식이 끝난 직후 육군본부 대회의실에서 '월남전의 영웅' 으로 추대되어 KBS 1TV '1967년을 빛낸 사람들' 에 주월한국군을 대표하여 1시간 프로에 출연하였다. 재구대대 장병이 세운 무공의 영예를 나 혼자 누리는 것 같아서 몹시 송구스러웠다. 다음날 동작동 현충원을 찾아 고 강재구 소령을 비롯하여 월남전에서 전사한 제1진재구대대 장병 18명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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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후 예비역 신분으로 세월이 흘러 재구대대 중대장 참모 모두 예편하여 시민으로서의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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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009년 10월 8일.세종문화회관 벨라지오 레스토랑 특실, 베트남전 제1진 맹호사단 재구대대 중대장 참모들로부터 '박경석 리더십 84강좌'축하를 받는 모임에서 내가 당시 대대 정보관 권준택 예비역 소장에게 작품집을 건내는 장면이다.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대대장이었던 나를 중심으로 10명의 재구대대 지휘부 요원이 분기마다 모임을 갖는다.얼마나 의미있고 아름다운 전우애의 만남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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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009년 10월 8일.세종문화회관 벨라지오 레스토랑에서 재구대대 중대장 참모를 대표해서 당시 대대 정보관 권준택 장군이 나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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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참석자는 다음과 같다.맹호부대 제1연대 재구대대 제9중대장 용영일 대위(예 육군중장).제10중대장 이규봉 대위(예 육군준장).제11중대장 이재태 대위(예 육군소장).대대 정보관 권준택 대위(예 육군소장).대대 작전관 이중형 대위(예 육군소장).대대 부관 노영철 대위(예 육군대령). 내빈 - 정봉율 대위, 당시 인접대대 중대장(예 육군소장).내가 파월 재구대대장 이전 제1사단 15연대 2대대장 근무시 대대 작전관 신대진 중위,(예 육군소장).1965년 파월 맹호사단 재편성시 베트남전 출진 주요 지휘관은 모두 해당 지휘관을 성공적으로 끝낸 지휘관 중에서 선발했다.특히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모두 관련 군사학교 도미 유학과정을 이수했다.이로써 이때까지 활개를 치던 일본군 만주군 출신 리더십이 퇴락기를 맞는다.비로소 국군이 선진강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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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념촬영.앞줄 왼쪽으로부터 이규봉 장군(육사16기).정봉율 장군(육사15기).나 박경석(육사생도2기).권준택 장군(육사15기).신대진 장군(육사15기).뒷줄 왼쪽부터 노영철 대령(육사16기). 이재태 장군(육사16기). 이중형 장군(육사16기).용영일 장군(육사16기).- 파월 직전 훈련과정에서 살신성인으로 순직한 고 강재구 소령은 육사16기이다.이 가운데 용영일 장군과 이중형 장군은 고 강재구 소령과 서울고등학교,육사16기 동기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