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놓고 맨 위 가운데에 반성문이라는 세 글자를 쓴다. 학년과 이름을 쓰려다가 그만 둔다. 학교에 내는 것도 아닌데 굳이 학년과 이름까지 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엄마, 아빠 두 분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명 중에 내 것이라고 따로 구별 해 볼 필요가 없으니 이름은 생략하자. 뭐라고 쓸까? 뭐라고 써야 단박에 두 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계시는 엄마를 곁눈질 한다.
엄마가 내 이런 생각을 안다면 또 혼만 날 것이다. 엄마는 내게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무얼 잘못했는지 생각 해 보고 진심으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반성문을 써라. 또 다시 어른들을 속이려고 잔머리를 굴렸다간 그 땐 매질을 할 거다.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치고 반성할 줄 알아야 좋은 인간이 되는 법이다.
엄마의 말씀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내 마음을 찡하게 하는 부분이 있는 멋진 말씀인 것만은 분명하다. 엄마가 나를 마주하고 제법 긴 말씀을 하실 때 나는 그 말 하나하나의 뜻보다 엄마의 목소리에 깔려 있는 힘과 야릇한 감동이 더 느껴진다. 그 분위기와 엄마는 너무나 완벽하게 어울려서 나는 감히 대항할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네,네, 하고 대답을 주억거린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지 아니면 다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엄마 말씀의 색깔이라도 알면 된다는 것인지 한숨을 폭 쉬시고는 그럼 됐다, 그만하자, 고 하신다.
유년시절에는 꾸중을 들어 본 기억조차 없는 내가 요즈음은 날마다 엄마의 잔소리에 아빠의 설교까지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때로는 이런 상황 속에 놓여진 내가 불쌍하게 여겨지고 동화 속의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뭔가 잘못 된 운명이 씌워 진 것 같아 생각을 정리 해 보기도 하지만 항상 결론을 짓기 전에 나는 잠이 들거나 다른 것들이 떠올라 그 기분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잊어버릴 때가 많다.
오늘 이 반성문은 정말 잘 써야 한다. 엄마 말씀대로 진실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그 내용을 써야 한다. 오늘은 다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 쪽으로 빠지지 않게 나를 잘 붙잡아 메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힘들다. 책이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눈앞에 일리아드 오딧세이가 접혀져 있다. 아까 읽다가 빼앗긴 책이다. 이미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내용을 알고는 있지만 세밀한 그림들이 들어 있고 인물들이 특이하게 그려져 있어서 내가 무지 좋아 하는 책이다. 반성문이 통과 될 때까지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 이번 잘못에 대한 벌이다. 너무 가혹한 우리엄마. 내가 책을 얼마나 좋아 하는지 알면서 그런 벌을 내리시다니....휴....책읽기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팍 친다. 엄마는 언제나 내게 말씀 하셨다. 넌 아는 게 병인아이다. 책 많이 보지 마라. 나는 반성문에 드디어 한 줄을 쓴다.
저는 책을 너무 많이 봅니다. 책을 읽으면 거기 빠져 들어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일 학기 때 나는 친구들에게 몰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친구들 말인 즉 내가 청소 시간에 게으름을 부려 자기들만 청소하게 한다고 빗자루로 나를 후려치면서 고함을 질러 댔다. 너는 미워. 넌 게으름뱅이야.
나는 청소를 안 한 적이 없었다. 비질을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확실히 나는 청소에 서툴렀다. 비질을 해도 찌꺼기가 남아 있었고 다른 친구들이 마주 들어 가뿐히 옮기는 책상도 끙끙거릴 뿐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렇다고 청소를 안했다는 것은 정말 억울한 누명이다.
집으로 들어 가 가방을 던지자마자 엄마를 찾았다. 서재 문을 여니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계시던 엄마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셨다. 나는 울적한 마음이 더 울적해져서 문을 가만히 닫고 돌아 나오려고 했었다. 성질 같아선 문을 힘대로 닫아 내가 지금 보통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지만 그런 짓을 두고 볼 엄마가 아니시다.
“아가, 학교 잘 갔다 왔니?”
엄마의 말씀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 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엄마는 뒤에도 눈이 있어요?”
“ 아니, 다 아는 수가 있지.”
“아하, 엄마가 나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안 봐도 내가 온 걸 아시는 거죠?”
엄마가 그때서야 의자를 돌리며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셨다.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엄마가 내 등을 쓸어 주시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배고프지? 간식은 뭐로 줄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배고픔을 못 느꼈다 기 보다 내가 오늘 당한 황당한 사건을 빨리 엄마에게 말씀드리고 나를 때리고 비로 쓸어버린 녀석들을 혼내주는 일에 마음이 더 쓰였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엄마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고 계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설명 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또다시 오늘 일을 설명했다.
“아가, 엄마는 이런 생각이 든다. 친구들이 그런 짓을 한 것은 분명 나쁘지만 괜히 그랬을 거 같진 않구나. 청소시간이 언제니?”
“ 점심 먹고 청소해요.”
“그럼 분명 네 잘못이 있겠다. 넌 밥을 늦게 먹지? 네가 맨 나중에 먹을 거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을까? 아무튼 귀신같은 우리엄마.
“ 네가 밥 먹고 가면 청소가 거의 끝나가지?”
“네.”
“ 자, 봐라. 넌 고의로 그러지 않았지만 네가 밥을 늦게 먹고 교실로 가기 때문에 네가 해야 할 청소 몫을 친구들이 하게 된다. 그러니 친구들은 네가 청소를 안했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 넌 청소 하다가 책을 볼 때도 있지?"
나는 그만 엄마를 보며 헉, 하고 외마디를 내 뱉는다. 그걸 어찌 아셨을까? 내 반응을 보시던 엄마는 다시 말씀하셨다.
“ 넌 집에서도 책만 보면 하라고 한일도 다 잊고 고함소리가 나야 움직이지. 아마 학교에서도 그럴 꺼다. 비질하다가 책이 눈에 띄면 서서 그 책을 다 볼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러니 친구들은 네가 청소를 안 한다고 할 수 밖에.”
“하지만 늘 그러진 않아요. 나도 청소 열심히 한단 말이에요”
“ 그래. 그러나 그건 네 기준이다. 늘 청소하는 친구들이 볼 땐 넌 청소 안하는 아이 인 게야. 그러니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너를 때린 것 같구나. 하지만 친구들이 너를 집단으로 때린 일은 잘 했다고 볼 수 없다. 이 일은 선생님께 말씀드릴 테니 앞으로 넌 청소시간에 책을 본다든지 늦게 밥을 먹는다든지 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유치원에 다닐 때만 해도 책 읽는 나는 선생님께 칭찬만 들었는데 초등학생이 되자 상황이 완전 바꿔 버린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책 읽기를 멈출 수 없다. 책을 읽게 되면 내가 모르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선생님은 항상 내가 똑똑하다고 칭찬 해 주셨는데 우리 엄마는 너무 아는 체 하지 말고 발표할 기회를 친구들에게도 주라고 하신다. 그게 진정 똑똑한 사람이란다. 그러나 선생님이 질문하시는 것에 대한 대답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가 참기란 얼마나 힘든지 엄마는 모르시는 것 같다.
유치원 때 집 앞에서 개 한 마리가 내게 다가오는 걸 보고 기겁을 하여 울었다. 엄마가 이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셨다. 그리고 울고 있는 내게 고함을 치셨다.
“ 무서워하지 말고 개를 쫒아라. 발로 차든 지 돌로 던지든 지. 개는 너보다 작으니 네게 덤빌 순 없다.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 엄마아~~. 개가 나를 물면 광견병 병균이 몸에 들어와 내가 미쳐 버릴 지도 몰라요. 아앙. 무서워.”
엄마는 내게 다가와 손을 잡고 개 옆을 지나게 해 주셨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많은 감정들이 느껴지던 표정. 행복한 표정은 분명 아니었다. 그날 밤 내가 잠자리에 눕자 엄마는 아빠에게 개에 대한 내 생각을 말씀하셨다. 아빠는 그 소릴 들으시고 웃으셨다. 웃음 뒤에 아빠가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묘했다. 저애는 아는 게 힘이 아니라 아는 게 병이군.
나는 책을 많이 봐서 아는 게 많은데 그것이 잘못됐습니다. 알아도 아는 척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또 한 줄을 썼다.
내가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가만히 듣다가 거짓말이지? 그게 뭔데? 하고 물었다. 나는 거짓이 아니라고 밝히기 위해 어떤 책에서 봤다, 고 답했다.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아무 말도 안하거나 잘난 척 하지마라. 라고 쏘아 붙였다. 나는 잘난 척하려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저 알고 있는 사실대로 이야기 했을 뿐이었다.
엄마말씀과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아는 것이 많은 건 자랑스러워 할 것만은 못 된다 싶다. 그러나 몇몇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내가 이런 말들을 하면 똑똑하다고 감탄하기도 하던데. 아는 것도 말할 때를 가려야 하는 가 본데 그 때가 언제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적당한 때를 가릴 줄 알아야 정말 똑똑 해 지는 가 보다.
아, 배가 너무 고프다. 부엌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고픈 배를 더 고프게 한다. 더 이상 생각도 나지 않는다. 반성문 모퉁이에 생선 한 마리를 그린다. 강아지 한 마리도 그린다. 마주 보게 고양이 한 마리도 그린다. 나는 고양이를 무지 좋아한다. 그래서 고양이를 생선 가까이에 그린다. 둘 중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 인형 야옹이를 찾는다. 인형들이 모여 있는 선반위에 엎어져 있다. 나는 야옹이를 내려 가만히 볼을 대어본다. 보드랍던 털들은 오랜 세월 내 손에 닳아 거칠게 뭉쳐져 버렸다. 까맣고 둥글던 눈동자도 닳아서 흰색이 더 많아 보인다. 다 낡은 불쌍한 야옹이를 앉고 있으니 조금은 마음이 좋아진다. 한 때는 야옹이가 없으면 잠을 못 잤다. 지금은 내가 컸으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간혹 잠이 안 오거나 슬플 때 야옹이를 품에 안으면 슬픔이 없어지거나 잠이 쉽게 든다.
엄마는 내가 두 살 때 야옹이 인형을 사다 주셨다고 한다. 내가 우유를 먹으며 눈썹을 쓰다듬거나 짧은 머리만 보면 만지는 통에 뭔가 만질만한 것을 사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야옹이를 골라오셨다고 하셨다. 이것은 내 처음 야옹이가 아니다. 처음 내게 온 야옹이는 색깔이 상아색이었다. 밤에 열이 올라 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그곳에 두고 온 후 엄마는 털이 더 보드랍고 긴 강아지 인형을 내게 주셨는데 나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눈썹을 만졌다. 다른 인형들을 아무리 사다 주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자 엄마는 그 가게에 하나 남은 짙은 갈색 야옹이를 사 오셨다.
그 때 까지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나는 말을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내가 말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비디오나 책을 읽어 주는 동화 테이프, 엄마에게 읽어 달라고 매일 같이 가져다 준 책 내용까지 다 외우고 있어서 말들이 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다만 언제 어느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뿐이다.
엄마, 고맙습니다. 야옹이를 받으며 내가 말을 시작하자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모두 다 놀래었다. 단어도 아니고, 완벽한 문장을 써 버렸기 때문이다. 아울러 책을 보며 글자도 읽었다. 한번씩 엄마는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말이 늦어 걱정했는데 말하면서 동시에 글을 읽더구나. 우리는 그 순간 얼마나 네가 대견했는지 모른다. 엄마가 내게 해 주신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야옹이를 다시 사다 주신 것과 내가 책을 다 읽을 라 치면 미리 다른 책을 준비 해 주셨다는 것이다.
내 동화책 중 12지신에 대해 나온 책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동물들 중에 고양이가 없었다. 왜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가 12지신의 자랑스러운 자리에 못 올라갔는지 속이 상했다. 엄마에게 물으니 개가 고양이를 속여서 날짜를 잊어 버려 지금도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안 좋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그렇다 치고 곰이나 다람쥐들은 왜 못 들어갔냐고 물었더니 그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이야기를 지어 낸 사람이 누군지 12지신을 만든 사람이 누군 지 모르지만 왜 하필 고양이를 빼 먹었느냐 말이다. 개하고 바꾸었으면 우리 야옹이도 12지신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몇 번이나 그 점에 대하여 말하고 묻자 엄마는 급기야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
현실과 동화는 다르다고 몇 번이나 말 했는데 아직도 그 이야기를 계속하니? 엄마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많다. 그걸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정해져서 내려오고 모두다 그걸 따라가지. 그런 질서는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잘 바꿀 수 없다. 어떤 것들은 세월이 흐르며 변하기도 한다만 12지신은 이미 우리 속에 정해 진 질서라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잊어버려라.
나는 그 이후로 엄마에게 다시는 12지신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불만이다.
“저녁먹자. 아빠 오시라고 말씀드려라.”
나는 서제로 달려가 아빠 손을 잡고 와서 식탁에 앉는다. 생선 두 마리가 노릇하게 구워져 있다. 노릇하다, 라는 표현이 내 마음에 든다. 이 단어는 엄마의 글에서 훔쳐 본 것이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글을 읽지 못하게 하신다. 어린이가 보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엄마 방에 가면 모니터를 무심코 보게 된다. 내가 처음 대하는 단어는 금방 머릿속으로 들어 와 버린다.
엄마는 얼마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그 동안 일하시느라 바빠서 못하고 계시다가 일을 그만 두시고 집에 계시면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셨다. 내가 글 짖기를 잘 하는 것은 아마 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 엄마가 일을 그만 두시자 우리 집에는 변화가 생겼다. 엄마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학교 마치면 나를 돌봐 주는 이모네 집으로 가지 않아서 좋았고 맛있는 간식을 매일 같이 만들어 주시는 통에 나는 빨리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고 싶을 정도였다.
엄마가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하던 간식 메뉴와 식사 때의 반찬들이 몇 가지로 한정 되 버렸다. 또 나랑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시고 내 그림에 관심을 가져 주시더니 지금은 책을 보고 계시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실 때가 더 많다.
내가 아빠에게 엄마가 요즘 내게 관심을 안보여주고 쌀쌀맞다고 일러 준 적이 있었다. 내 편을 들어 줄줄 알았던 아빠는 나를 무릎위에 앉혀 놓고 긴 설명을 하셨는데 그 내용이 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어린애가 아니니 이제 혼자서 자신의 일을 처리해야 하기에 엄마가 전처럼 해 주지 않는다는 것과 엄마의 글쓰기는 내 책읽기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고 엄마도 이제 나와 아빠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되고 엄마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엄마가 행복할 수 있다니 내가 참아야 한다.
엄마 나는 커서 무엇이 되면 좋겠어? 라고 물었을 때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하진 않다.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단다. 나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엄마가 행복하다면 내가 좀 참아야 할 것 같다.
“엄마, 글로 도배 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도배는 벽지 바르는 건데 그럼 글로 벽지를 바른다는 거예요?”
“너 엄마 글 또 봤구나.”
“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에요.”
“ 알았다. 글로 도배한다는 건 글을 도배할 정도로 많이 썼다는 뜻이지 진짜로 벽에 도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표현을 비유법이라고 한단다.”
“아하, 다른 것에 붙여서 나타내는 것을 비유법이라 하는군요.”
“맞다. 그런 표현은 특히 시를 쓸 때 많이 사용한다.”
“그럼 공중화장실이란 화장실이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인가요?”
“뭐?”
두 분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시며 웃으신다. 뒤이어 설명도 해 주신다. 설명을 듣고 나니 내가 이해하고 있던 공중 화장실이 터무니없게 느껴진다.
“ 어서 밥 먹어라. 넌 밥만 들면 생각이 많아져서 말도 많아지니 밥 먹는 게 그리 늦지. 밥 먹을 땐 밥 먹는 데만 열중할 것!”
아빠의 말씀에 나는 다시 밥으로 시선을 향하고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살의 부드러운 맛을 즐긴다.
“ 밥 먹고 반성문 다시 써라.”
엄마가 내게 못 박듯이 말씀하신다.
“무슨 반성문?”
아빠가 물으신다. 나중에 설명하시겠다며 밥 먹자고 하시는 엄마를 보며 나는 두 줄 써 내려간 반성문에 붙일 문구를 하나 생각 해 냈다.
나는 밥을 너무 늦게 먹습니다. 밥을 먹을 땐 다른 생각들이 엄청나게 떠올라서 자꾸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내가 밥을 늦게 먹으니 친구들은 나를 바보라고 합니다. 이젠 되도록 밥 먹을 땐 밥 먹기에만 열중해야겠습니다. 바보처럼 안 보이면 친구나 오빠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그 오빠가 나를 학교 가는 길에 막아서고 놀이터에서 못 놀게 훼방 놓았을 것 같다. 서현이 오빠가 내게 짓궂게만 안했어도 나도 그런 일을 꾸미진 않았을 것이니 상관이 있는 것도 같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 일웅이는 얼마나 착한지 모른다. 일 학기 때부터 내 짝이었는데 내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내가 말하는 걸 믿어 주고 나를 똑똑하다고 해 준다. 나는 일웅이가 나를 괴롭히지 않아서 너무 좋다. 내게 모르는 것을 물어 보면 나는 친절하게 대답 해 주고 빌려 달라는 것도 아낌없이 빌려준다. 우리는 단짝이다. 나는 일웅이와 결혼하고 싶다.
엄마에게 일웅이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더니 네가 커서도 그렇다면 결혼하라고 하셨다. 일웅이가 공부를 못하는 걸 아시는데도 허락하시는 걸 보니 엄마는 착한 분이다. 친구들은 일웅이가 공부 못한다고 바보라고 놀린다. 나보고도 바보랑 친하다고 바보 친구라고 놀린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엔 신경 쓰지 않는다. 일웅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착하다.
내일은 발렌타인 데이다. 나는 용돈으로 일웅이와 아빠에게 드릴 초콜릿 두개를 사서 포장 해 두었다. 엄마에게 누구에게 초콜릿 사 주실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안 사주신다고 하신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사 주는 날인데요. 내 대답에 엄마가 그런 풍습은 외국에서 들어 온 풍습이고 초콜릿을 파는 사람들이 과장 되게 분위기를 만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 한다, 고 하셨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다른 친구 들은 다 받는데 일웅이만 못 받으면 서운 할 것이니 나는 좋지 않더라도 초콜릿을 줄 것이다.
반성문 쓰기가 다시 막혔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빨리 생각 해 내야 한다. 반성문 쓰기가 끝나야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제 엄마가 같이 목욕 할 때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 왜 그랬냐고 물으셨다. 넘어져서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을 서현이 오빠가 때려서 넘어지면서 난 상처라고 했다. 엄마는 상처를 보시며 오빠가 너를 왜 때렸지? 라고 물으셨다. 몰라. 그냥 이유 없이 때렸어. 엄마는 나를 가만히 보시더니 너 거짓말 하는구나. 오빠가 아무 이유 없이 너를 때리진 않았을 거 같다. 남을 함부로 모함하면 못 쓴다. 고 하셨다. 여기서 엄마가 그 녀석을 혼내야 겠다. 라든지 선생님께 말씀드려 혼내겠다든지 그러셨더라면 나는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는 나를 학교 구석에 데리고 가서 바지를 벗어 봐 라고 하고, 펜티도 내려 보라고 했어요.”나는 엄마의 반응을 보려고 천연덕스럽게 이 말을 했다. 엄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말이니?”
엄마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나는 내 말이 엄마를 움직였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일웅이 오빠가 나를 괴롭힌 것도 일면은 사실이다. 학교 가는 길을 막아서서 못 가게 하거나 놀이기구를 막아서서 못 타게 했던 일도 있었으니까. 이런 일은 일러 줘 봐야 우리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 그러니 좀더 충격적인 사건을 만들 수밖에.
내가 7살 여름에 사촌 오빠가 우리 집에 왔었다. 여름방학 내내 우리 집에서 공부하며 지냈었는데 엄마가 우리 둘만 남겨 두고 슈퍼에 종종 나가시면 오빠는 내게 이상한 짓을 했다. 펜티를 내려 보라고 하고는 내 잠지를 살펴보고 자기 고추도 만져 보라고 했다. 난 그런 짓이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가 종종 뉴스를 보시다가 어린이 성추행이나 성 폭력에 대한 사건이 나오면 나를 불러서 그런 일을 혹시 당했을 때 내가 해야 하는 행동에 대해 말씀 해 주셨다.
그래서 오빠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싫다고 했다. 오빠는 나를 눕히고 고추 비비기를 하려고 하기도 했다. 나는 도망갔다. 그리고 엄마에게 일러 주었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불러 그 일에 대해 안 좋은 점과 왜 해서는 안 되는 지를 설명 해 주셨다. 그 내용은 일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무척 심각하게 이야기 하셨다는 기억은 있었다.
“그게 언젠데?”
엄마는 착 가라 앉은 목소리로 자근자근 물으셨다.
“몰라요, 잊어버렸어요. 여름인가?”
“그럼 넌 왜 그 일이 있었을 때 바로 말 안했니?”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넌 서현이가 네게 왜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내가 미워서 그랬을 거예요.”
이 말에 엄마는 한숨을 내리 쉬시더니 성추행과 성 폭력에 대해 다시 설명해 주시면서 누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하면 싫다고 분명히 말하고 도망치라고 하셨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네, 하고 대답했다.
오늘 오후에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엄마는 그 일이 사실이냐고 다시 물으셨다.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서현이네 집에 전화를 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아이들 세계란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서현이에게 한번 타일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제 오빠는 자기 엄마에게 혼날 것이고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 동안 내가 당했던 억울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녁 무렵 서현이 오빠와 오빠의 엄마가 집을 방문하셨다. 오빠의 엄마는 아무리 다그쳐 물어도 그런 일이 없다고 해서 확인하러 왔다고 하셨다. 엄마는 나를 다시 다그치셨다. 사실대로 말하라고. 나는 할 수 없이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했다. 왜 거짓말했냐는 질문에 나를 괴롭혀서 골탕 먹이려고 그랬다고 실토했다.
엄마는 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거짓을 꾸며서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은 더 나쁘다고. 그리고 서현이와 그 엄마에게 몇 번이나 사과하셨다. 엄마의 말씀 중에 내 귀에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내 맘을 잘 표현 해 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고 그 상상을 현실처럼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딸이 아직 어려서 그런 말을 지어 내리라곤 생각을 못했네요. 이제 제가 알게 됐으니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서현이도 다시는 어린 동생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네가 이런 누명을 쓰니 억울한 것처럼 네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도 그 일이 그 정도로 억울하고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이 일로 둘 다 사람을 어찌 대해야하는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얼마나 그럴싸한 말인가? 우리 엄마는 글도 잘 쓰시더니 말씀도 잘 하셨다.
나는 이 일로 반성문을 쓰게 됐다. 반성문을 또 한 줄 쓴다.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은 잘못한 일입니다. 서현 오빠에게 사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제 엄마 아빠는 내 말에 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 내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 거짓말이 하고 싶더라도 참아야겠다. 내 책 중 늑대와 소년이라는 책이 있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해서 정말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나도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아이가 될 것이다. 그건 너무 슬프다. 나는 다시 반성문을 한 줄 쓴다.
거짓말을 해서 아무도 믿지 않는 아이가 되는 건 슬픈 일입니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더니 잠이 오고 피곤하다. 이렇게 오래 한 가지 생각을 해 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 나는 반성문을 읽어 보고 뿌듯해 져서 엄마를 부른다. 충분히 반성한 것 같다.
엄마가 내 반성문을 읽어 보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신다.
“우리 아가 많이 컸네. 이만하면 됐다. 네 책상위에 붙여두고 아침마다 큰 소리로 읽어라.”
나는 테이프로 반성문을 붙인다. 가슴이 쑥 자라나는 것 같다. 나는 드디어 유년기를 벗어나려나 보다. 엄마는 내가 지식은 아이 수준이 아닌데 행동이나 상황 판단은 유아수준이라고 늘 걱정하셨다.
피아노 학원에서 나보고 아기 짓 한다 던 친구에게 내가 그랬다. 0세부터 6개월까진 신생아, 6개월부터 12개월까진 영아, 1살부터 3세까진 영 유아, 3세부터 7세까진 유아, 8세부터 10세까진 초년기, 11세부터 13세까진 소년기, (참 왜 소년기만 있고 소녀기는 없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여자애들은 이 나이를 뭐라고 부를까? 소년은 남자 아이를 뜻하는데.) 14세부터 17세까진 청소년기, 18세부터는 청년기 이렇게 되는데 내가 왜 아기냐? 나는 8살이니 초년생이다.
친구는 난 그런 거 모른다,하고 화가 나서 나가버렸는데 이제 진짜 어른스러워져서 그런 소리 안 들어야겠다.
야옹이를 안고 아까 읽다만 일리아드 오딧세이 책을 들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다시 책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 오딧세이의 모험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그런데 요정은 인간일까, 신일까? 넥타르와 암브로시아의 맛은 어떨까? 한번만 먹어 봤으면 좋겠다.
첫댓글 감동있게 잘 읽었습니다, 대단한 장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