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1일
영화 ‘박하사탕’ 개봉(-3.24)
영화 박하사탕. 사진은 영화배우 설경구.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극장에 걸리기도 전에 클래식이 됐다. 몇 차례 시사회와 부산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상찬의 대상이 된 이 위대한 영화는 너무 눈부셔서 더 이상 헌화가 무의미할 정도다. 2000년 1월 1일 0시 개봉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들뜬 새 천년 시작이 공허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극단적 회한과 정신착란에 가까운 환멸로 벼랑에 선 40대 남자 영호의 현재에서 시작된다.
‘무엇이 이 남자 삶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나’라는 물음 하에 시간 역순으로 과거를 더듬어가는 이 영화의 독특한
형식이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빗 존스의 83년작 ‘배반’의 혼란스런 전개와 달리, 이감독은 7개 에피소드를
그 자체로 완결시켜 선명히 주제를 드러냈다. 거기에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인과론적 고리를 장마다 살짝 끼워넣어 못 자국
하나없이 멋지게 조립했다.
첫사랑 연인 순임의 남편 앞에서 천막집 문을 열려할 때 영호는 열쇠가 너무 많아 찾지 못하고 쩔쩔맨다.
제때 찾지 못했을 뿐, 삶에서 열쇠는 얼마나 많이 널려있었던 걸까. 순임 남편이 대신 문 열어주는 장면은 영호의 회한에
가득찬 현재가 역사 소용돌이에서 주체성을 잃고 휩쓸려온 한 사내 삶의 비극적 종점임을 말한다. 이처럼 이 영화의 꼼꼼한 축조술은 상징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하사탕부터 기차에 이르기까지 숱한 상징들은 논리적 완결성과
생명력을 가지고 관객의 발견을 기다리며 곳곳에 숨어있다. ‘나 어떡해’에서 ‘내일’과 ‘Tell Laura I Love Her’까지,
영화 속 노래들마저 장면의 의미를 함축한다.
쓰디 쓴 아이러니도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젊은 날 꿈의 상징인 카메라를 이십여년만에 순임에게서 받은 뒤 4만원에 팔고,
그 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먹을 때 그 아이러니는 극에 달한다. 그때 뽑아 망가뜨린 필름에는 꿈이 찍혀있었어야 했다.
‘초록 물고기’에서 한석규 최고 연기를 끌어냈던 이창동은 이번엔 신인 설경구를 과감히 선택, 잊을 수 없는 명연을 조각해
냈다. 순수와 공포, 냉소와 정신분열을 한 얼굴에 담아낸 설경구의 연기는 그에겐 가장 빛나는 훈장인 동시에 이후 떨쳐내기 힘든 무거운 짐으로 남을 것 같다.
5월 광주 계엄군으로, 그리고 고문 경찰로 두차례에 걸쳐 오른손에 피와 똥을 묻힌 뒤 영호는 자존을 삶에서 놓아버린다.
서툰 순수 대신 능숙한 타성을 얻은 한 남자의 꿈 많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여정의 종착점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미래가
지나가지 않은 과거란 점에서, ‘박하사탕’이 아직 미래가 남아있다고 믿는 관객들에게 던질 계몽 효과도 적진 않을 것이다.
그 해, 오늘 무슨일이… 총107건
첫댓글 박하사탕
첫장면은 지금도 생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