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historyfoundation.or.kr/main.asp?idx=79&pageNo=1&state=view&sub_num=128
조 윤 수(동북아역사재단)
법령의 종류와 성립 배경
법령의 의의
한일회담 문서의 의의
2009년 1월 3일 조선일보는 우리 정부가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은 일본 법령 2건을 확보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무력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 2009.1.3.) 일본 법령 2건의 정식 명칭은 1951년 6월 6일 공포된 「조선 총독부 교통국 공제조합이 소유한 일본 재산 정리에 관한 정령 시행에 관한 총리부령(府令)」(소화 26년-1951년 6월 6일 ‘총리부령 24호’: 이하 ‘총리부령’)과 1951년 2월 13일 공포된 「구령(舊令)에 의해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은 자를 위한 특별 조치법 제4조 제3항 규정에 기초한 부속 섬을 정하는 성령」 ‘대장성령(大藏省令)4호’ (이하 ‘대장성령’) 이다. 조선일보 보도 이후 국내 매스컴에서는 뜨겁게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이 두 개의 법령은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에 대하여 객관적 입장에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총리부령 24’(1960년 7월 8일 대장성령 43호로 최종 개정되었음)와 ‘대장성령 4호’(1968년 6월 26일 대장성령 37호로서 최종 개정되었음)의 내용 중 핵심 내용은 이하와 같다.
총리부령 24호 |
---|
조선 총독부 교통국 공제조합의 본방내에 있는 재산의 정리에 관한 정령의 시행에 관하여 총리 부령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 제1조 이 부령에 의하여, 「정령제291호」,「특수정리인」,「정리계획서」,「결정정리계획서」, 「조합」 및 「조합원」은 각각 조선총독부교통공제조합의 본방내에 있는 재산의 정리에 관한 정령(소화26년,정령 제40호. 이하 령(令)이라고 말한다.)에 규정되어 있는 정령 제291호, 특수 정리인, 정리계획서, 결정정리계획서, 조합 및 조합원을 말한다. |
대장성령 4호(대장성령 37호) |
---|
령(旧令)에 의해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를 위한 특별조치법 제4조 제3항 규정에 기초한 부속 도서는 아래 열거한 도서 1. 치시마 열도, 하보마이 군도 및 시코탄 섬 |
여기서 이 두 법령의 성격을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총리부령’이란 조선이 식민지였을 당시 일본 재산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정리하기 위한 법령의 하나로서 조선 총독부의 재산 정리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장성령’은 일본 내 조선 총독부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하여 일본 역내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정한 법령으로서 일본 역내에 포함되는 부속도서를 정리한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 이와 같은 법령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추측해 보면, 한일회담 당시의 청구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측은 이승만 정부 수립 직후, 대일배상 요구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전후, 한국 정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대일 배상 문제였다. 정부 수립 직후, 1949년에는 「대일배상청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1952년 제1차 한일회담s 청구권 위원회에서 한국 측은 그동안 준비한 것을 바탕으로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항목’을 제출했다. 8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으로부터 가져온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기타 국보 지도원판 및 地金과 地銀을 반환할 것 |
엄밀히 말하면 이 두 법령은 조선총독부의 재산 정리에 관련된 내용이다. 일본 외무성은 이 두 개의 법령은 영토 및 영해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서 단지 일본 행정권이 적용되는 지역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매스컴의 보도내용을 반박하였다.(조선일보 2009.1.8) 총리 부령에 있는 다섯 그룹의 섬이 가진 성격을 살펴보면, 첫 번째 섬의 그룹은 현재 러시아가 실효지배 하고 있는 섬들의 그룹이며 두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는 전후 미국이 지배하고 있다가 1968년도에 일본에 반환된 섬이다(따라서 ‘대장성령’에는 위의 3그룹이 빠져 있다). 따라서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후 일본의 영유권을 포기한 적이 없으며 계속 지속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 섬들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 번째 그룹의 섬들이다. 이 섬들은 전후 한국 영토에서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는 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측은 이 두 개의 법령은 1949년 당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최고 사령부(GHQ)의 지령인 (SCAPIN)677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점령지를 관할하기 위한 행정적인 조치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였다.(조선일보 2009. 1. 8)
그러나 위 두 개의 일본 법령은 우리에게는 매우 유리하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첫째, 일본 공문서에서 최초로 독도를 일본의 부속도서에서 제외하였다는 점이고, 둘째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동일 열에 배치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은 제주도와 울릉도가 한국 땅임을 명백히 알기 때문에 독도 또한 한국의 영토로 보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 두 가지 측면의 유리한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장기적 차원에서 대비하는 지혜가 더 필요하다. 지금까지 일본의 독도 도발 양상을 살펴보면 역사, 지리, 어업, 해양조사, 국제법, 지명, 환경 등의 다양한 양태로 전개되고 있다. 일본의 독도 도발 문제가 불거지면 한국 국내에서는 정치권-매스컴-국민여론이라는 트라이앵글이 형성되면서 민족주의 담론(대일 강경책)이 경쟁적으로 분출되어 작동된다. 그러나 독도문제의 책임은 일본에 있음을 명심하고 국내에서의 독도문제의 정치화 혹은 정치쟁점화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술적 차원의 역사적 근거를 발굴하고 국제법 논리의 강화를 위해 치밀하고 조직적인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개의 법령은 또 다른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두 개의 법령은 재일교포에 의해서 처음 발견이 되었다. 그 법령들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한일회담 문서의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노력에 의해 일부 공개된 한일회담 제5차 청구권 회담에서의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였다. 2005년 한국 외교통상부가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의 공개는 일본에서 전후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2005년 12월 일본에서는 ‘일한회담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日韓会談文書 全面公開を求める会)이 결성되어 계속해서 일본 외무성에 한일회담 관련 모든 공문서에 대한 공개를 청구하였다. 2007년과 2008년 4월 및 5월에 걸쳐 약 60,000장의 외교문서에 대한 공개가 결정되었지만 전면 공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2005년 공개된 한국 외교문서 35,000장의 두 배에 가까운 분량이다. 이 외교 문서는 먼저 기본관계, 재산청구권, 재일조선 법적지위, 어업, 문화재, 독도, 재일조선인, 청구권 등 한일회담의 과제를 망라한 것이다. 전체 문건을 성격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한국 외교문서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는 일본 외무성의 대책, 시안, 협정안, 훈령 및 각 부처의 의견 등이 포함되어 있고, 두 번째는 회담의 기록, 회담 요지 등 의사록, 그리고 비공식 회의 기록 등이 있으며, 세 번째는 과거의 회담 경위, 문제점과 과제, 네 번째는 출장보고와 현지 상황 보고, 한국의 동정, 각국의 태도, 한국 신문자료 번역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독도 문제 등에 관한 외교 문서에 먹칠이 된 부분이 많고 공개 불가 비율이 20%를 넘는 등 미비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개된 외교 문서는 일본 외무성이 관리하는 한일회담 관련 외교 문서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공개 상황을 검토하면 공개 매수 59,763장, 공개 문건 수 1,369건, 공개 불가 문서 23건, 부분 공개 문서 524건이다.
일본 외교문서의 양이 방대하지만 다음과 같은 필요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서 공개한 한일회담 문서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국 측 외교문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본 정부 내부의 정책 결정 과정, 미국과의 조율과정 등 한일회담시기 일본의 대한 정책 수립 과정과 집행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을 정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일회담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정책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매우 시급한 작업이다. 또한 지난번 여러 매스컴에서 확인해 주었듯이 독도이슈의 경우에는 전후 자료를 보강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먼저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와 비교, 대조하여 한일회담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일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쟁점은 기본적으로 한일협정에 대한 양국 입장의 차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배상 문제, 일제하 강제동원자에 대한 배상 문제, 사할린 동포의 한국 귀한 문제, 재일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배상 문제, 독도 문제 등 한일 과거사 관련 현안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증적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셋째, 조만간 본격 재개될 것으로 보이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진행과정 및 결과를 예측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도 한일회담 및 한일조약의 체계적인 이해는 필수적이다. 북일 수교 교섭은 1990년 가네마루 방북단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과 3당 선언에 의해 개시된 이래 15년간 결렬과 중단, 재개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상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 논의될 중심 현안은 과거의 한일회담과 마찬가지로 옛 조약에 대한 인식 문제, 식민지 배상 및 재산청구권 문제,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제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한일회담에서 이 문제들이 어떻게 다루어졌고 타결되었는지를 공개된 1차 자료를 활용하여 체계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향후 도래할 북일 조약의 모습을 예측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사 인식문제, 재산청구권 문제 등 한국과 북한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는 향후 남북한과 일본으로 이루어지는 3자간 협의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과거 한일회담과 한일조약에 대한 실증 분석은 북일 국교정상화의 향방 및 영향을 파악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넷째, 한일국교 정상화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재검토는 단지 한일외교사의 사례 연구에 그치지 않고 한일조약이 지닌 국제정치학적인 함의를 검토하는 작업으로 연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아시아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틀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또한 한일조약이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의 한 사례로서의 성격을 가질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탈식민화 과정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일회담 및 한일조약에 관한 연구는 냉전기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역학은 물론 전후처리 및 탈식민화 과정에 관한 실증적 사례 검토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향후 동아시아 지역의 협력 및 공동체 형성과정 속에서 전후처리와 과거사 인식의 문제가 지닌 위치와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