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산 중 그 장소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울 뿐 했다. 후일 관련 에세이 올리겠음)
날개 잃은 선풍기 山 客 心
사람은 누구나 살아 가면서 좌절(挫折)의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땀을 뺀 적이 있을 것이다. 정도(程度)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없다. 겪어 본 삶은 인생의 가치를 알고 자신이 가야할 목적지로 바로 가는데 징검다리가 되어 무거운 짐 벗어 던지고 갈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균형의 범위에서 잘 짜여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유없는 무덤이 없듯이, 그 자리에 있다. 자연(自然)의 준엄(峻嚴)한 법칙이니라.
긴 장마의 날씨에도 짜증나는 더위는 피할 수 없다. 무더위가 있기에 여름의 낭만도 있고 여름만의 즐거움도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다. 폭탄 전기요금이 무서워 새로 산 에어콘은 덮개를 뒤집어 쓴 채 거실 구석에서 폼만 잡고 있다. 오래된 구식 선풍기가 바람을 몰아준다. 견딜만하다. 그것도 잠시 뿐, 시원한 바람은 어디가고 미지근한 바람이 땀을 부른다. 나이 먹은 선풍기라 소음도 난다. 목이 고장나 아래만 쳐다보는 반쪽 기능이다. 제 몫의 기능은 하기에 버리기는 아까워 그냥 쓰고 있다.
“악” 하는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보니 휴가 나온 아들이 옮기려다 안전망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가 상처를 입었다. 날개도 한쪽이 부서지는 사고였다. 응급 조치를 했다. 큰 상처가 아니라서 다행스러웠다. 선풍기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다음 날, 서비스 센타에 가니 수리는 가능한데 새 것을 사는 것이 좋겠다며 은근 슬쩍 권한다. 수리를 하는 기사가 웃는다. 놀랜다. 이십년이 훨씬 넘은 기종이란다. 맞는 부품이 있을 리 없다. 수리 후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색깔이다. 이리 저리 맞추다 보니 낯설게 보인다. 시원한 바람이 살아났다. 애정(愛情) 섞은 철저한 관리(管理)가, 보살핌이 보여주는 당연한 결과다. “선풍기 장사 굶어 죽겠다”는 기사의 말을 나는 못 들은 척 하고 나왔다. “에끼, 여보시오 당연하지 않소.” 웃었다.
심장(心臟)을 도려내는 슬픔으로 몸부림치는 선배를 위로 하느라 같이 울었던 옛일이 생각난다. 오월의 어느 봄날. 서울의 모 대학에 잘 다니던 선배의 외아들이 하루 아침에 싸늘한 주검으로 부모 앞에 오니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따로 없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치는 일이다. 사고사(事故死)였다. 한쪽 날개를 잃은 선배의 모습은 삶을 포기한 모습, 더 이상이었다. 품 안에만 있다고 생각한 자식이 훨훨 자유를 찿아 하늘로 갔다. 위로의 말은 생각나지 않고 한없이 한없이 같이 울었다. 문득 가슴이 저린다.
금정산 금정봉 아래 소나무 숲이 잘 가꾸어진 쉼터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자식을 부른다. 목소리에 섞인 절규(絶叫)는 심금(心琴)을 울린다. “바우야, 바우야” 아비의 외침은 메아리되어 숲을 울린다. 아들의 이름인지 그렇게 들린다. 사정(事情)을 알아보니 가슴에 아들을 묻었단다. 한달에 한번 이곳에 와서 목이 쉬도록 아들을 부른단다. 그래야 살 수 있단다. 숨도 쉴 수 없는 슬픔이, 말 못할 억울함이 가슴에 사무쳐 잠을 못 잔단다. 더 이상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두 번이나 그 자리에서 목격한 나의 마음도 선배의 아픔이 생각나서 산행길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눈물 찍었다. 삶의 반을 잃어버린 듯한 그 피눈물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그 빈 자리를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고칠 수만 있다면, 되돌릴 수만 있다면” 마음속 간절한 기도가 나온다.
날개 없는 선풍기가 배달되어 왔다. 대형 냉장고를 구입하니 사은품으로 보내온 것이다. 수입해 오는 오리지널이 아니고 복제품이다. 정말 날개없이 바람이 나온다. 기존 상식을 뒤집는 선풍기다. 모양도 멋지고 장식성도 있다. 어디서 나오는지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생각의 관점(觀點)을 바꾸어 이룬 현실의 결과물이다. 날개가 없어도 바람을 만든단다.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아비의 마음도 바람을 다시 낼 수 있을까. 연연(戀戀)하지 말고 주어진 삶, 남은 식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이 모범 답안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을이 온다. 선배도, 그 아비도 또 그 자리에서 아들을 부르는 절규(絶叫)를 토(吐) 하겠지. 고이 영면(永眠)을 빈다.
삶의 여정(旅程)에는 정도(正道)가 있다. 지키며 사는 인생이 참된 삶을 영위한다고 한다. 피할 수 없는 난관(難關)에 부딛혀 지키지 못할 때는 실패한 인생이란 말인가. 삶의 가치성도 같이 추락하여 추한 모습을 보인다. 도리(道理)를 모르니 불행을 부른다.
“희망(希望)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중국 문학가 루쉰의 [고향]중에서 인용해 본다. 나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감사한 마음도 없이 걸어 가고 있다. 부끄러운 삶이다.
첫댓글 날개 없는 선풍기는 사실상 선풍기가 아닐 것인데
그냥 선풍기로 불러 줄 뿐이겠지요.
그런데 인간의 슬픔을 바람으로 날려 보내는 그런 선풍기가 있다면
날개가 있던 없던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잊어 버려야 하는 남의 일?
봄의 끄트머리가 보이는가 날씨가 덥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