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2:41-53
찬송가 117장 ‘만백성 기뻐하여라’
한국인이 애송하는 시 중에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이 이러합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시의 해석이야 다양하겠지만 오늘 본문이 다루는 두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두 갈래 길 중에 다른 길을 택한 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달라진 삶을 맞이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좇아 사람이 적게 간 좁은 길을 걷기로 작정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매 순간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살도록 붙잡아 주시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호사밧의 통치 (41-50)
(41-42)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니 여호사밧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이미 여호사밧은 22장 초반에 등장하여 아합과 연합군을 이루어 전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왕기는 일반적인 역사 서술과 다른 방식을 택하기에 이제 여호사밧 왕을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 제사년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성군으로서 그의 자세한 통치 기록은 역대하 17장부터 20장을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인 아사가 41년을 재위했고 여호사밧도 25년이라는 상당한 기간을 왕위에 있습니다. 이 사실만 봐도 남유다는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안정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3-44)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했다고 증거합니다.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눈에 곧게 행했다고 표현합니다.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 더 나아가 다윗의 길을 걷고 돌이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을 보시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라는 뜻의 코람과 하나님을 뜻하는 ‘데우스’를 합쳐 만든 라틴어로서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로서 경건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달리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즉 인간 앞에서의 태도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볼 때는 경건한 척을 하다가 사람이 없으면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외식의 형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겉은 깨끗하되 안은 더러운 잔과 같고,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무언가 불편하고 거리끼십니까? 아니면 가슴이 따뜻하고 든든하십니까? 만약 전자라면, 그리고 하나님도 이런 건 눈 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로마서 2장 6-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CCTV 앞에서도 태도를 바르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호사밧에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당을 없애지 못한 일과 이스라엘과 화평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의 역사 중에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왕이 여럿 있었으나 산당을 제거하고자 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뿐입니다. 그 점에서 여호사밧도 하나님께 온전하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합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 산당은 원래 우상을 숭배하는 곳이었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난 뒤에는 많은 경우 여호와를 섬기는 지방성전 역할을 하며 토착화해 갔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완공한 후에도 민간신앙에 뿌리 깊이 내린 산당 중심의 이스라엘의 토착신앙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으며, 지방 산당에서 일하던 엄청나게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처리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지방산당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지방 유지들과 토착민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오래된 습관과 얽매이기 쉬운 죄 때문에 굴복하고 만 불신앙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이기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또 믿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또 이스라엘과 화평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지만,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증거합니다. 즉 가능한 모든 이와 화평을 지켜야 하지만 거룩함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은 아마도 엄청난 민족주의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원대한 꿈을 꾸었을 수도 있고 아합을 돌이키고자 하는 좋은 뜻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명민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연합하였다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화평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주님을 볼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45-47)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가 부린 권세와 그가 어떻게 전쟁하였는지는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그 때에 에돔에는 왕이 없고 섭정 왕이 있었더라
역대하 17장 5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하지만 이에 비해 열왕기 기자는 마치 여호사밧이 부린 권세나 전쟁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는 듯이 잠시 언급하고 맙니다. 다만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냈음을 의미 있게 다룹니다. 그들은 우상의 신전에 있는 남자 창기로서 여호사밧은 담대하게 그들을 축출하여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게 했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중요한 것과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다름을 보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에돔에 대한 지배력을 잃지 않고 섭정 왕을 두어 다스리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이는 모압이 바로 이스라엘을 배반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어 여호사밧의 통치가 하나님께 인정받음을 나타냅니다.
(48-5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하지만 곧이어 성경은 여호사밧의 약점을 다룹니다. 즉 예전에 솔로몬이 했듯이 무역을 통해 더욱 큰 부를 이루려고 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가 파선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악을 향하는 그의 마음을 막아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증거합니다. 돈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돈을 사랑해서 부를 이룬 사람은 자신이 똑똑해서 이 사회에서 승리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돈이 없는 사람은 이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을 모르는 패배자라고 생각합니다. 즉 돈을 사랑함이란 궁극적으로 돈을 버는 능력을 지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무분별한 욕구를 막아주심으로 여호사밧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때로는 돈 버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입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아하시야가 함께 다시 무역을 하자는 제의에 거절을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에 깨달음을 얻고 회개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돈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사밧은 죽어 장사됩니다. 한 사람의 삶을 외부에서 재단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삶의 순간마다 어떠한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이 정직했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여 삶의 갈래길에서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이스라엘로 넘어갑니다.
아하시야의 통치 (51-53)
(51-53) 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아합이 전쟁터에서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을 다스립니다. 여러 모로 여호사밧과 아하시야는 극렬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했다면, 아하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여호사밧이 다윗의 길을 걸었다면, 아하시야는 궁극적으로는 여로보암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은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또 열왕기상을 마무리하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호사밧과 아하시야 두 인물은 모두 왕으로서 출발합니다. 어떤 왕이 되어야 할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준비했겠습니까? 훌륭한 왕이 되어야겠다고 얼마나 다짐했겠습니까? 하지만 둘은 다른 길을 택하고 정반대로 걸어갑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 그 차이는 미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점점 더 멀어져 전혀 다른 삶으로 안내합니다. 해양 환경 정보와 대기오염 유발 물질 관측 정보를 보내도록 2020년도에 발사한 천리안 2B호 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3만6000km 고도에서 0.1도만 틀어진 채로 측정을 해도 지상에서는 약 63km의 오차가 생긴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자세 제어를 위해 엄청난 계산과 기술이 요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이 단 0.1도만 틀어져도,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아주 사소한 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느냐,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는 바알을 예배하느냐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 굴복하면 내일도 굴복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준이 중요합니다. 사소한 한 가지 삶의 선택을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입니다. 오늘 말 한 마디를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느냐, 사람 앞에서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느냐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느냐, 아니면 내 의지를 신뢰하느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닮아질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선택을 내리고 거기에 만족하여 진정한 의미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두 왕이 택한 두 갈래 길을 봅니다. 연약해도 주님께 붙어 있으려고만 하면 주님의 섭리 가운데 붙들어 주시고 정직하고 곧게 걸을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살아 계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예수님만 사는 우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로 살고 있습니까?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로 살고 있습니까?
2. 여호사밧과 아하시야가 택한 두 갈래 길이 무엇이었습니까?
3. 나는 어떤 길을 택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