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肝腸]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다려 아모리 한들 어찌하리요
게를 들라 하신들 아모쪼록 아니 드오시지 어이 필경에 들어 겨시던고.
만고에 없는 설움 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號哭]하되 응하오심이 아니 겨신지라, <한중록[閑中錄]>에서.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분노로 거기(뒤주)에 갇힐 때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단장[斷腸]의 슬픔이 담긴 구절입니다.
12월 14일 수요일,
뒤주 속에 갇혀 9일 만에 죽은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정조 임금의 효심이 어우러진, 수원 화성을 찾아 갔습니다.
성의 둘레는 5, 7km , 풍납토성(3.5 km)보다 한 배 반 더 길고, 몽촌토성(2.3km)보다 두 배 반 더 긴 큰 성입니다.
사적 제3호. 동쪽은 창룡문, 서쪽은 화서문, 남쪽은 팔달문, 북쪽은 장안문.
장안문과 팔달문의 남북 성문은 일직선의 큰 길로 이어져 정연한데,
서쪽 화서문은 팔달산이 버티고 있어 북쪽 장안문 쪽으로 가깝게 다가가 동서 성문의 위치가 약간 어긋나 있습니다.
북문인 장안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로[敬老]니까 입장료를 안 내는데, 안내 팜플렛을 건네는 매표소 근무자의 고개가 갸웃갸웃하는(?) 것을 보니,
내 얼굴이 남의 눈에 아직 젊은 모습으로 비치는 것 같아 기분이 베리 굿, 덩달아 수원 화성이 정겹게 느껴집니다. ^^^
돌로 쌓은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성문인데,
성문을 보호하는 반원형의 옹성을 거쳐 무지개문을 통해 2층 문루로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지붕은 우진각 맞배지붕, 들보도 우람하고, 단청도 화려하고, 남대문보다 더 크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입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윤2월 9일,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가마에 모시고 그 뒤에서 말을 타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으로 가는 정조의 능행차를 그린 <화성 능행 반차도>는 도화서에 소속된 김홍도를 비롯한 화원[畵員] 들이 그린 8폭의 기록화입니다.
청계천의 벽화로도 재현된 보물 1430호인 이 그림을 보면 수행원만 1799명, 군사까지 합치면 6천명이 넘는 장엄한 행차.
바로 여기 장안문을 통과하여 화성 가운데 있는 행궁으로 향하던 당시를 상상하니 행차의 규모만큼 크나큰 정조의 효심이 바짝 다가옵니다.
동쪽 창룡문을 방향으로 정하고 성벽을 끼고 토성길을 걸어가니 포루[砲樓] 가 나타납니다.
대포가 향하는 곳은 북동쪽,
정면 성벽 구멍 사이로 내다보니 양쪽 건물 사이로 난 길에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참 위험합니다. ^^^
날씨는 차지만 바람이 불지 앉아 사라진 역사를 되짚어보는 초겨울 답사가 쓸쓸해서 분위기가 좋습니다.
이어서 나타난 것은 기와 지붕을 이고 있는 적대[敵臺] ,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운 치성 같은 시설입니다.
또하나의 포루를 지나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원천
[水源川] 위에 세운 화홍문이 나타납니다.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수원천의 옛 이름 ‘버드내’를 따 화성을 버들잎 모양으로 만들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수원천을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깃든 그 하천입니다. 겨울이지만 아직 물이 흐르고 있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 보니 팔뚝만한 잉어 수십 마리가 물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보여 춥지나 않을까 쓸데 없는 걱정도 했습니다.^^^
화홍문 바로 옆에 세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붙은 2층 누각에 올라갔습니다.
이름 속에 '꽃과 버드나무'가 들어 있듯, 봄이 되면 목련과 철쭉꽃, 그리고 여인네 머리결처럼 푸른 버드나무가 바람에
한들한들, 용이 산다는 호수 위에 비친 아름다운 풍경화를 볼 수 있는 화성 제일의 정자입니다.
그러나 너무 사람의 손이 많이 가서 만든 인형처럼 정이 선뜻 안 가는데,
마침 죽전에 학교가 있다는 3학년 고교생들이 떼로 나타나 풍월주인[風月主人]의 감흥은 아예 사라져 아쉬웠습니다.
수능시험 마치고 역사여행 나섰다는 3학년 8반 학생들, 길에서 만난 인연으로 좋은 결과 이루라고 가만 빌었습니다.
한 굽이 휘어진 성벽을 돌다가 잠깐 성 밖을 보니 경사진 토성에 길처럼 배수로가 두 줄기 파져 있습니다.
성벽에 물이 스며들면 무너지기 쉬우니까 배수로를 어떻게 설치하느냐가 대부분의 성에 나타나는 과제인가 봅니다.
동북포루를 지나자 나타나는 동암문, 계단 아래로 내려가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드넓은 연병장이 나타나고 활과 화살이 놓인 사대[射臺]와 건너편에 놓인 표적판이 보입니다.
장군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여는 동장대 겸 연무대입니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날리는 조선의 기마무사는 사라졌고,
대신 2천원 내고 10 발의 화살을 쏘는 우리들만 남아 전쟁놀이를 흉내내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
화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동북 공심돈[空心墩] 에 올라갔습니다.
돈[墩]은 원기둥 모양으로 쌍은 망루로서 성벽 주변을 감시하며, 성벽에 접근한 적병을 구멍을 통해 총포를 쏘아 사살하는 방어시설입니다. 지붕이 있는 돈의 맨 윗층에 올라가려면 소라 형태의 나선형 계단을 거쳐야 하기에 소라각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특이한 시설입니다.
네모난 구멍을 통해 나오니 전망대, 수원의 동쪽 시가가 눈에 들어오는데 적병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습니다.
공심돈을 나와 조금 걷자 성벽 아래쪽 뚫고 낸 두 개의 지하도가 석촌동 고분 지하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동쪽으로 가면 안양과 서울, 동쪽으로 곧바로 가면 용인과 성남 가는 창룡문 사거리입니다.
문화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이 여기 저기 상처투성이지만 그나마 보존되고 있어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지하차도 위를 지나자 치성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동북노대가 나를 맞이합니다.
노대는 화살을 여러 개 한꺼번에 쏠 수 있고 화살을 더 멀리 보낼 수 있는 살상력이 강한 쇠뇌를 설치한 곳입니다.
드디어 1차 목포 지점인 화성의 동쪽 성문인 창룡문에 다달았습니다.
북문인 장안문을 출발하여 동문인 여기까지 방향으로 계산하면 겨우 4분의 1을 왔을 뿐인데 걸린 시간은 1시간,
2 Km도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지만 많은 구조물을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장안문→북동적대→북동치→북동포루→화홍문→방화수류정→북암문→동북포루→동암문→동장대→
동북공심돈→ 동북노대→창룡문
안내 팜플렛을 보면 화성의 성벽 동서남북 모든 곳에 지금까지 본 구조물들이 촘촘히 설치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쪽 성문인 팔달문 옆 지동시장 안에서 순대국 한 그릇 점심으로 먹은 시간 빼곤,
경사 심한 팔달산 계단을 올라 서장대와 서쪽 성문인 화서문을 거쳐 원래 출발지였던 북문인 장안문까지 5, 7km의 성벽을 한 바퀴 도는데 3시간 반이나 걸렸습니다.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화성을 튼튼하게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1794년1월에 착공에 들어간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으로 있던 정약용을 비롯한 학자들이 동서양의 기술서적을 참고하여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해 1796년 9월에 완공한 성곽입니다.
축성 후 5년 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
달리 생각하면 세계문화유산은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나타나는 이 모든 시설물들이 아니라,
216년전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등록된 것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겨우 한 쪽 성벽만 남은 백제의 왕성 풍납토성과,
깃발 하나 꽂혀 있지 않는 몽촌토성의 언덕을 떠올리면서 허전한 마음을 '효심[孝心]' 두 글자로 채워 넣으며 혼자 몇 시간 걸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