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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교회서신과 목회서신 다음에 있습니다.
교회서신은 로마서부터 시작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까지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의 목회서신 뒤에 히브리서가 나옵니다.
이미 말씀 드렸지만 히브리서는 ‘건너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건너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죽음의 강을 완전히 건너온 사람, 다시 말하면
요단강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세례를 받아 십자가 건너편에 넘겨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례와 결합된 믿음을 고백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 사함과 의롭게 됨과 성령을 선물로 받아들이게 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이란 말은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림자인 이스라엘로 대비해서 보면 물세례로 말미암아
홍해를 건너왔고(고전10:2)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는 살아서 건넜지만 요단강은 1세대는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나서 애굽을 모르는 자들만 요단강을 건넌 것처럼 물세례는 살아서 건너게
되지만 성령세례는 반드시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장사되고 난 다음에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잠기는 것입니다(고전12:13)
그리고 우리가 믿는 믿음 위에 성령이 보증을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예정하신 우리의 기업이 보증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성령이 책임지십니다. 성령이 탄식하며 허무한데 굴복하는 우리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늘도 계속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롬8:26) 그래서 우리 믿음은 들은바
그 말씀을 반드시 주님 앞에 시인해서 그 시인한 믿음이 성령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마가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제자들도 이미 부활의 예수님으로부터 숨을 후
내쉬며 성령을 받아라 하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요20:22-23)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열흘 동안 간절히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성령세례로 임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하여 신앙의 광야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그리고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야만 비로소 완성됩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율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는 애굽을 잊지 못합니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선 애굽은 잊어버렸으나
광야는 잊지 못합니다. 늘 뒤돌아봅니다. 이것이 신앙의 큰 문제입니다.
은혜는 받았다고 하는데 사건만 만나면 좌충우돌하는 사람들은 애굽 생각이
나서 아직 가나안의 안식의 땅에 못 들어가는 이스라엘과 믿음이 흡사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온 사람이 우리가 은혜 안에 있고 진리 안에 있다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말은 하지만 광야 때에 이기적이고 새콤달콤하고
재미있던 신앙생활을 못 잊어 말씀 안에서 심고 거두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 걸려 있습니다. 바울은 그 강을 건너가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선언합니다(갈6:14)
1장 1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성경은 옛적과 이 모든 날 마지막으로 확실히 구분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서론인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 묻기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사실 우리가
언제 건너온 것은 모르지만 건너 온 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리 믿음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괄적으로 십자가를 다 건넜습니다.
다 건넜지만 복음이 전달되는 차서와 정도에 따라 먼저 믿은 사람이 있고,
나중에 믿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포도원의 일꾼이 다 한 데나리온의
형상을 받지만 먼저 된 자도 있고 나중 된 자들이 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 사실이 점점 확실해집니다. 뚜렷해집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멸했다 함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었고 그의 살으심과 합하여 그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의식이 점점 새로워져 옛 사람은 점점 쇠하고 새사람은 점점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로 인해 산 자라하는 정체감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애굽을 생각하느냐 하면 애굽이 좋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습성화되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됩니다. 노예근성입니다.
여러분이 사단과 싸워야 하지만 여러분 안에 배어있는 악성과 악습과도 피 흘리도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가시와 엉겅퀴며 마음속의 쓴 뿌리입니다.
우리 속에 사망과 음부의 요소가 있다고 시편6편은 말씀합니다.
이것들과 싸우기 위해서 다윗은 침상이 썩기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옛 자아와 싸워야 되느냐 하면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만 살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긴 세상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애굽에 있는 것으로 살던 습성 때문에 광야에서
애굽의 것을 늘 바라는 노예의 근성과 습성,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도덕이나 윤리의 죄 문제가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죄라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그 죄가 세상으로 미끄러지도록 하고 맙니다.
1절에서 중요한 것은 전에는 사건이나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
이제는 아들을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능력이 생깁니다(롬12:1-2)
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성경에서 바울은 '이제는' 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것은 옛적과 지금의
분기점입니다. 바울에게는 옛적과 지금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합니다(다메섹의 체험).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에게서 하나님께로 확실하게 옮겼음을 확신했습니다.
아직도 이 부분에서 긴가. 민가 하면 물세례의 의미는 깨달았다 하더라도
성령세례는 의미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란 증거입니다.
성령이 내 영과 더불어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십니다(롬8:16)
따라서 성령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적이 없는 지금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의 분명한 분깃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전과 지금의 확실한 신분의 변화가 없는 신앙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지만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들의 2세들만 가나안땅에 인도해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거듭난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전보다 조금 나아져서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출석하는
습성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또 선한 행동을 반복함으로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적인 열심이 새 사람이 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확실한 구분입니다.
그러나 아직 연약에 쌓여 있어 세상이 나를 잡아당기면 나도 모르게 굴복합니다.
따라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삶인가?
이 점을 항상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무지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하나님의 통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요, 진리의 영이십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셨습니다.
옛적엔 하나님이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표적으로, 질병을 낫게 하심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등등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하십니다.
말씀(요1:1)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말입니다.
율법에서 이제는 자유와 안식으로 들어왔습니다. 율법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와 안식의 진리 안에서 율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입을 댈 수 없는 수준에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도 심고 거두는 것이 없으면 곧 믿음의 증거가 없으면
늘 광야와 애굽의 근성이 쳐들어 옵니다. 그래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맙니다.
가나안의 사람임에 분명한데도 늘 다시 내려가고 맙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오길 반복합니다. 빙빙 도는 회전목마를 타듯이 말입니다.
죄 사함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땀 흘리며 설명하면 그때는
할렐루야 해 놓고 또 나가서 넘어지고 또 다시 주여 하며 올라오기를 반복합니다.
견고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입장과 우리 입장을 같이 보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지만 우리의 구원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자신이 부활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11:25-26) 오병이어를 통해 5000명에게 떡과 고기를 나눠주신
모습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나눠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나눠준 그 자체가 말씀이신 그분의 다른 사역입니다. 시청각의 말씀이십니다.
문둥이를 치료하심은 죄인인 우리를 그 말씀(호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앉은뱅이를 치료하심은 영적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말씀하십니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를 치료하신 것은
영적인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를 치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말씀하십니다.
말씀이신 그 분이 다른 모습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표적과 기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말씀이신 그 분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표적이나 기사에 붙잡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의 다른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레에마'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6:63)
예수그리스도의 변화(동선)를 추적해서 그 분과 그 분이 하신 일을 다 듣고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를 테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에 그와 함께 앉히셨다(엡2:1-6)는 사실을 몽땅 믿~~음으로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는다(엡2:8)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이
행하신 모든 사역을 듣고 믿어 수용하므로 의롭다 함을 받고 성령의 인침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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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남은 육체의 때를 살아야 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