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섭,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아버지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고, 우물을 판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음수지원(飮水知源)은 인간의 도리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자유·자존과 번영의 근원을 생각하고,
이를 누리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선진 사회의 조건이다.
최형섭은 1920년 11월 2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대전고-와세다 대학-
미국 노틀담· 미네소타 대학을 거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소장과
최장수 과기처 장관을 역임하고 2004년 5월 29일 서거하여
대전 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서 영면하고 있다.
비석에는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 으로 새겨져 있다.
국가기록원은 최형섭의 주요 공적을 과학기술행정가, 과학기술정책이론가, 연구관리자,
금속공학자로 건조하게 소개한다.
이 모든 경력은 최형섭의 진가(眞價)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1743~1826년)의 묘비에는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 작성자,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자'로 되어 있다.
대통령 경력은 빠져있다. 토머스 제퍼슨처럼 묘비명을 고인(故人)이 직접 썼다면 어떻게 썼을까?
추측하건대 최소한 과학기술처장관으로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1995년 출간)에는
'한국 과학기술 여명기 개척자의 소임을 다한 과학자'로 겸손하게 썼다.
최형섭 업적의 정수는 한국 과학기술 발전 체제; 즉 운영체제(시스템)와 정신문화(유전자)를 만들고,
이를 금속연료종합연구소(1961년) - KIST 초대 소장(1966~1971년) -
과학기술처장관(1971~1977년)을 맡아 널리 복제·확산·정착시킨 것이다.
KIST에서 한국선박연구소, 한국해양연구소, 한국통신기술연구소 등이 분리·독립해 나왔으며,
한국화학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 등은 KIST의 연구인력과 운영 노하우를 받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 점에서 최형섭은 한국 주요 국책연구소의 아버지이자,
철강, 기계, 조선, 화학 등 한국 주력산업의 설계자요, 초석을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 여명기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후진적 굴레나 장애가 많았다.
최형섭이 대학(일본 와세다대 채광야금학과)에 진학할 떼만 해도(1939년)
공과 계통은 목수나 미장이 정도로 여겨 온 가족이 반대했다.
1950~60년대는 미국에서 이공계 학위를 따고 귀국해도, 연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일할 곳도 없고, 연구 설비·장비도 없고, 사회적 인정도 대우도 열악했다.
당시 기업주들은 기술이 필요하면 '일본에서 기능공 몇 사람만 데려오면 되지
연구는 무엇 때문에 하냐?'는 식이었니, 후진국의 두뇌 유출 문제는 해결 난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진국도 후진국으로부터 유학생을 받아도,
자국 학생이 선호하지 않는 기초연구 쪽으로 받는 경향이 있었다.
후진국이 정작 발전시키고자 하는 산업과 유학파의 전공·전문 분야의 괴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조선의 유습 때문에, 해외 학위를 가진 사람들조차
산업현장에서 연구개발을 하기보다는 정부, 대학, 국책연구소 등에서
고위 경영·관리직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최형섭은 1959년 8월, 6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부평의 스프링 제조업체인 국산자동차 부사장에 취임하여,
공장 내 작은 단칸방에서 2명이 숙식을 같이 하면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도 월급을 제때 받는 것이 행운이었다고 한다.
1961년 9월 대한중석 등 국영 광업 회사 4개가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금속연료종합연구소장을 맡아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계약을 통해 수행하는 '계약연구'를 주도적으로 도입·실행하였다.
근대적인 산학협동 연구기관의 효시로 만든 것이다.
최형섭은 과학기술은 기업(현장)이 부딪힌 기술적 난제 해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면서,
기초 과학보다는 응용기술(기계·금속, 화공, 전기·전자 공학)을 중시했다.
기술자 못지않게 기능인도 중시했다. "우리가 해야 할 연구는 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이 원하고, 기업에서 필요한 것이라야 한다“라면서,
KIST의 설립 목적을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토대로 산업발전, 특히 공업화와 관련된 기술을 연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프로젝트를 따오는 장사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자신을 중용한 박정희와 관계가 좋았다.
1965년 경공업 수출로 연간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에게 계집애들 머리카락을 팔아 번 돈이 뭐가 자랑스럽냐고 찬물을 끼얹었다.
기분이 상한 박정희에게 일본의 전자제품 수출은 10억달러가 넘는다며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것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연구소의 임금이나 예산 문제에 있어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형섭이 원하는 데로 연구소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직 은퇴 이후 과학기술정책 자문을 받으며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최형섭은 정부가 예산 지원은 하되,
연구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KIST 운영체제를 만들어,
국책연구소의 표준으로 정착시켰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공부하고 경력을 쌓은,
소수정예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살 집과 당시 한국에는 없는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을 통해 제공하고,
봉급도 미국에서 받던 것의 1/4을 지급하였다. 그런데도 당시 대학교수 봉급의 3배요,
대통령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이 수두룩했다.
당연히 대학교수와 공무원의 반발이 심했으나, 최형섭과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최형섭은 산학연 융합을 중시하여, 1970년대 초에 대덕연구학원도시를 구상했고,
1990년대 초에 대덕연구단지로 다소 축소 구현되었다.
과학기술자나 연구자를 존중하는 사회풍토를 중시하여
소장·원장 보다 더 높은 예우를 받는 연구위원제도를 만들었다.
기업이 돈을 벌게 하는 연구개발을 중시했지만, 정작 최형섭은 구도자나 수행자 같은 자세를 강조했다.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연구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화려하고 안이한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부귀영화에 집착하면 안 된다.
특히 돈을 번다는 것과 연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며,
어중간하게 연구하면서 돈도 벌어 보자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착각이다.”
그가 유언처럼 강조한 연구자의 덕목은 묘비석에 새겨져 있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등.
후진국 국가원수치고 과학기술 발전에 관심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간혹 있어도 최형섭처럼 탁월한 과학기술 행정·관리 능력자가 없었다.
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자신들은 강고한 굴레를 아직도 끊어내지 못했는데,
대한민국은 최형섭과 박정희의 지도력으로 이를 일찍이 끊어내어 세계사적 기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원자력연구소 한필순 소장(1983~1990년)이
원자력 기술 자립의 거목이라면, 최형섭 과기처 장관은 거목 수십 그루를 품고 있는 큰 산이며,
박정희 대통령은 큰 산 수십 개를 품고 있는 산맥 같은 존재다.
지난 5월 30일 최형섭과 생전에 다양한 교류를 통해
그의 인품과 리더십을 깊이 흠모해 온 일본의 과학기술정책 대가 히로사와료(平澤冷, 1938년생)
도쿄대 명예교수가 자비로 노구를 이끌고 참배를 왔다. 2004년 이후 거의 매년 기일에 맞춰 왔단다.
한국 과학기술계는 최형섭을 거의 잊고 있는데! 음수지원(飮水知源)이 생각나는 6월이다.
중국의 산업·과학·기술 굴기에 휘청이면서도
좀체 활로를 찾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가신 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뭐라 하실까?
수훈.
5.16 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상,
닛케이 아시아 국제대상, 대통령상 발명상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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