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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기(黃土記)
김 동 리
솔개재[鳶(연)介嶺]에서 금오산(金午山) 쪽으로 뻗쳐내리는 두 산맥이다.
등성이를 벌거벗은 채 십 리, 시오 리씩을 하나는 서북, 또 하나는 동북으로 뛰어내려와서는, 거기 황톳골이라는 조그만 골짝 하나를 낳은 것뿐으로, 그 앞을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며, 동네 늙은이들의 입으로 전하는 상룡(傷龍), 또는 쌍룡(雙龍)의 전설을 이룬 그 지리적 결구(結構)*는 여기서 끝을 맺는 것이다.
상룡설. 옛날 등천(登天)하려던 황룡 한 쌍이 때마침 금오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맞아 허리가 상하니라. 그 상한 용의 허리에서 한없이 피가 흘러내려 부근 일대를 붉게 물들이니 이에서 황톳골이 생기니라.
쌍룡설. 역시 둥천하려던 황룡 한 쌍이 바로 그 전야(前夜)에 있어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지라, 상제(上帝)께서 노하시고 벌을 내리사 그들의 여의주를 하늘에 묻으시매 여의주를 잃은 한 쌍의 용이 슬픔에 못 이겨 서로 저희들의 머리를 물어뜯어 피를 흘리니, 이 피에서 황톳골이 생기니라.
이상의 상룡설 또는 쌍룡설 밖에 또 절맥설(絶脈說)도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절맥설. 옛날 당(唐)나라에서 나온 어느 장수가 여기 이르러 가로되, 앞으로 이 산에서 동국의 장사가 난다면 감히 중원을 범할 것이라 하여, 이에 혈을 지르니, 이 산골에 석 달 열흘 동안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 일대가 황토지대로 변하니라.
1
용내[龍川]를 건너 황톳골 앞들에는 두렛논을 매는 한 이십여 명 되는 사람이 한일(…·)자로 하얗게 구부려 있고, 논둑에는 동기(洞旗)*를 든 사람과 풍물 치는 사람이 네댓 나서 있다.
해는 바야흐로 하늘 한가운데서 이글거리고, 온 들과 산은 눈 가는 끝까지 푸르기만 하다.
깨갱 깨갱 떵땅 괘앵……
풍물이래야 꽹과리 하나, 장구 하나, 그리고 징 한 채다. 그런대로 그들은 논매는 일꾼들과 더불어 끈기 있게 논둑을 타고 다니며 들판의 정적을 깨뜨려가고 있다.
그런데 그들 두레꾼들과는 동떨어진 이쪽 산기슭 쪽에 혼자 논을 매느라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곁에서 이를 본다면 그의 팔다리나 허리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길 뿐 아니라, 어깨나 몸집이 다 그렇게 두드러지게 장대하게 생겼고, 또한 머리털이 이미 희끗희끗 세어 있음을 알리라. 그의 이름은 억쇠다. 그는 몸이 그렇게 보통 사람보다 두드러지게 큰 것처럼 일도 동떨어진 곳에서 혼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억쇠는 논매던 손을 쉬고 논둑으로 나온다. 그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돌려 산밑 쪽을 바라본다. 아직도 분이(粉伊)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논둑에 서 있는 소동나무에서는 매미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억쇠가 담배를 두 대나 피우고 나서 화가 치밀어 숫제 주막으로나 찾아갈 양으로 막 허리를 일으키려는데, 그때야 저쪽 소나무 사이로 조그만 술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는 분이가 보이었다.
“멀 하고 인제사 와.”
가까이 온 분이를 보자 억쇠는 약간 노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멀 하긴, 멀 해.”
분이는 머리에서 술동이를 내리며 마주 뱉는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확 끼치고 양쪽 눈언저리와 귓바퀴가 물을 들인 듯이 발긋발긋하다.
'또 술을 처먹은 게로군.’
억쇠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자아. 옜수.”
억쇠에게 술 사발을 건네는 분이의 입 가장에는 어느덧 그 야릇한 웃음이 떠돌기 시작한다.
억쇠는 분이의 손에서 사발과 술동이를 낚듯이 빼앗는다. 동이 속에서 술이 출렁하며 밖으로 튀어나온다.
사발과 동이를 빼앗기듯이 된 분이는 화통이 치미는지,
“흥, 이년을 어디 두고 보자.”
하며 이를 오도독 갈아붙인다. 설희(薛姬)를 두고 하는 욕질이지만 당치 않은 수작이다.
억쇠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술을 따라 마시고 있다. 그동안 잔뜩 독이 오른 눈으로 억쇠를 노려보고 있던 분이는,
“연놈을 한칼에 푸욱…….”
하고 또 한 번 이를 오도독 간다.
“이년아, 말버릇이 그게 뭐여 .”
억쇠가 꾸짖자 분이는,
“어디 임자보고 말했나. 득보 말이지.”
한다.
더욱 모를 소리다.
“득보면 너의 아저씬가 무엇이 된다면서 그건 무슨 소리여.”
이에 대하여 분이는,
“홍, 아저씨? 아저씸 어쨌단 말요?”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풀 위에 발랑 드러누워버린다. 걷어올려진 베치맛자락 밑으로 새하얀 다리를 드러내 보이며 그녀는 어느덧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소동나무에서는 또 한바탕 매미가 운다.
억쇠는 세번째 술을 따라 든 채, 멍하게 소동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아까 분이가 “연놈을 한칼에 푸욱…….” 하던 것이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를 두고 하는 강짜*란 말이냐. 억쇠는 어이가 없었다.
억쇠가 술동이를 밀쳐놓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을 때다. 득보가 나타났다. 한쪽 손에 멧돼지 한 마리를 거꾸로 대룽거리며 그쪽 산비탈에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새 산에 갔던갑네.”
억쇠가 인사 삼아 묻는 말에 득보는,
“빈손으로 갔더니…….”
하며 멧돼지를 억쇠 곁에다 던지고, 누워 자고 있는 분이 앞에 와서 털썩 앉아버린다.
그도 보통 사람과는 딴판으로 몸집이 크게 생긴 사나이다. 키는 억쇠보다 좀 낮은 편이나 어깨는 더 넓게 쩍 벌어졌다. 게다가 얼굴은 구릿빛같이 검푸르다. 그 검푸른 구릿빛이 어딘지 그대로 무서운 비력(臂力)*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머리털도 칠흑같이 새까맣다. 나이도 억쇠보다는 예닐곱 살 젊어 보인다.
“한 사발 하겠나?”
억쇠가 턱 으로 술동이를 가리키며 묻는다.
득보는 잠자코 술동이를 잡아당긴다. 그리하여 손수 한 사발을 따라 마시고 나더니,
"좋구나.”
한다. 그는 연거푸 또 한 사발을 따라 마시고 나더니,
"얼마나 있누.”
하고 억쇠를 노려본다.
“아직 많이 있다.”
“그럼 낼 모두 걸러라.”
득보는 이렇게 말하며 의미 있는 듯한 눈으로 억쇠를 노려본다. 순간 두 사나이의 눈에서는 다 같이 불길이 번쩍한다. 그것은 땅속의 유황이라도 녹일 듯한 무서운 불길이었다.
2
이튿날은 여름 하고도 유달리 더운 날씨였다.
하늘에는 가지각색 붉은 구름들이 연기를 머금은 불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안냇벌은 황톳골에서 잔등 하나 넘어 있는 아늑한 산골짜기요, 또 개울가이었으므로 거기엔 흰 모래밭과 푸른 잔디와 게다가 그늘진 노송까지 늘어서 있어, 억쇠와 득보들같이 온종일 먹고 놀고 싸우고 할 자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곳이었다.
두 사람은 짤막한 잠방이 하나만 걸치고는 몸을 벌거벗은 채, 소나무 그늘 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처음엔 돼지 족(足)도 한 가리씩 의논성스럽게 째어 들었고, 술잔도 서로 권해가며 주거니 받거니 의좋게 건네다녔다. 한 철에 한 번씩 이 안냇벌에서 대개 이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지만,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럴 때처럼 가슴이 환히 트이도록 즐겁고 만족할 때가 없다. 그것은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보람이요, 그리고 거룩한 향연이기도 하였다. 이에 견준다면 분이나 설희의 자색도 한갓 이 놀이를 돋우고 마련키 위한 덤에 지나지 않을 듯했다.
두 사람은 술이 얼근해짐을 따라 말씨도 점점 거칠어져갔다.
“얼른 들어마셔라, 이 백정놈아.”
“도둑놈같이, 어느새 고기만 처먹누.”
이렇게 그들은 서로 욕질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연방 술은 서로 따라주고 고기 뭉치도 던져주곤 하였다.
“옜다, 이거 마저 뜯고 제발 인제 뒈지거라. 늙은 놈이 계집을 둘씩이나 끼고 거드렁거리는 꼴 정 못 보겠다.”
하며 득보가 족발 하나를 던져준다.
“네 이놈, 말버르장머리 그러다간 목숨 못 붙어 있을 게다.”
억쇠는 득보 잔에 술을 따라주며 이렇게 으르댄다.
싸움은 대개 득보가 먼저 돋우는 편이었다. 그것도 으레 분이나 설희를 걸어서 들었다. (득보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계집 핥듯이 어지간히 칙칙하게도 핥고 있다, 더럽게 늙은 놈이,”
하고 득보가 먼저 술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자, 억쇠는 뜯고 있던 족발을 득보의 얼굴에다 내던지며,
“옜다, 그럼 이놈아, 네가 마저 뜯어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때부터 싸움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긴장이 서린다.
득보는 주먹을 쳐들어 억쇠의 얼굴을 겨누며,
"얼씨구절씨구 가엾어라, 이 늙은 놈아, 내 한주먹 번쩍하면……”
아주 노랫조로 목청을 뽑으며 껑충껑충 억쇠에게로 뛰어들어왔다, 물러갔다 하는 것이다.
“네 이눔, 새뼈 같은 주먹으로 멋대로 한번 때려봐라.”
억쇠는 그를 아주 멸시하듯이 태연자약하게 버티고 서 있다.
“내 한주먹 번쩍하면…… 네놈 대가리가 박살이라……”
순간, 득보의 주먹으로 억쇠의 왼쪽 눈과 콧잔등을 훌쳤다.* 그것을 억쇠는 대강밖에 막지 않았으므로 금시 펴렁덩이가 들며 눈알에는 핏물이 돌기 시작하였다.
“네 이놈, 새뼈 같은 주먹으로 많이 쳐라…… 실컨…… 자아.”
할 때 득보의 두번째 주먹이 또 억쇠의 오른쪽 광대뼈를 쥐어질렀다. 세번째 주먹이 또 먼저 때린 눈을 훌쳤다.
억쇠는 저만치 물러가 있는 득보를 바라보고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허연 이를 드러내며 큰 소리로 껄껄껄 웃어대었다.
득보는 저만큼 물러선 채 아까와 마찬가지 노랫조로 목청을 뽑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네번째 주먹이 오른쪽 눈 위를, 그리고 다섯번째 주먹이 또다시 콧잔등을 때렸을 때, 그러나 억쇠는 역시 먼서와 같이 큰 소리로 껄껄껄 웃어만 주었다.
“너 이놈, 그 새뼈 같은 주먹으로 저 산을 한번 물려 세워봐라.”
여섯 번, 일곱 번 득보는 몇 번이든지 늘 마찬가지 내 한주먹 번쩍하면을 되풀이하며 뛰어들어서 억쇠의 면상과 목과 가슴과 허리를 힘껏 지르는 것이었으나, 그때마다 억쇠는 간단한 몸짓으로 그것을 받아내었을 뿐, 적극적으로 득보에게 주먹질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득보에게 같이 주먹질하지 않고 그냥 얻어맞기만 하는 것이 그지없이 즐겁고 만족한 모양으로, 상반신이 거진 피투성이가 되도록 끝내 큰 소리로 껄껄껄 홍소(哄笑)*만을 터뜨리고 서 있는 것이었다.
득보는 더욱 힘이 솟아오르는 듯 주먹질과 함께 곁들이는 발길이 번번이 억쇠의 아랫배와 넓적다리 근처에 와 닿는 것으로 보아 그 겨냥이 무엇이라는 것은 억쇠도 곧 짐작하였다..구래서 그의 발길만은 그대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도 그 옛날에 붕새란 새가 있었나니, 수격 삼천 리 니일니일 얼씨구야 지화자자 저절씨구.”' .
득보는 입에 하나 가득 찬 피거품을 문 채 이렇게 목청을 뽑으며 덩실거리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억쇠는 피로 물든 장승처럼 뻣뻣이 서서 뛰어들어오는 득보의 주먹질과 발길을 받아낼 뿐이었다.
득보의 네번째 발길이 억쇠의 국부를 건드렸을 때, 그는 한순간 그 자리에 퍽 쓰러질 뻔하다가 겨우 한쪽 팔로 득보의 목을 후려안으며 어깨를 솟굴 수 있었다.
“이놈아!"
산골이 찌르렁 울리는 억쇠의 목소리였다.
이리하여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그들에 입에서는 어느덧 노래도 웃음소리도 동시에 뚝 끊어지고 다만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뿌득뿌득 밀러나갔다 들어왔다 하며 근육과 근육 부딪는 소리만이 났다. 두 사람의 코에서는 거의 동시에 피가 주르르 쏟아져내렸다. 눈에도 핏물이 돌고 목으로도 피가 터져나왔다. 그 차에 땀으로 번질번질하던 두 사람의 낯과 어깨와 가슴은 어느덧 아주 피투성 이로 변해져버렸다. 득보가 억쇠의 아래턱을 치지르며 막 몸을 옆으로 빼치려는 순간이었다. 억쇠의 힘을 다한 바른편 주먹이 득보의 왼쪽 갈비뼈 밑에 벼락을 쳤다. 갈비뼈 밑에 억쇠의 모진 주먹을 맞은 득보는 갑자기 얼굴이 아주 잿빛이 되어 뒤로 비실비실 몇 걸음 물러나가다 그대로 모래 위에 고꾸라져버 린다.
억쇠의 목과 입과 코에서도 다시 피가 쏟아졌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두 손으로 아래턱을 받쳐 피를 받으며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말고 돌연히 미친 것처럼 뛰어 일어나는 길로 또 한 번 와락 득보에게로 달려들어 쓰러져 있는 그의 바른편 어깨를 물어 떼었다. 어깨의 살이 떨어지며 시뻘건 피가 팔꿈치까지 주르르 흘러내리자 득보는 몸을 좀 꿈적이었으나 역시 일어나지 못하는 채 그대로 뻗어져 누워있는 것이었다.
억쇠는 입에 든 득보의 어깨살을 질겅질겅 씹다 벌건 핏덩어리를 입에서 뱉어내고, 그러고는 다시 술항아리를 기울여 술을 몇 사발 마시더니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누구의 입에서 항복이 나온 것도 아니요, 어느 쪽에서 쉬기를 청한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죽은 듯이 늘어지고 잠든 듯이 자빠졌으나, 아주 숨통이 멎은 것도 아니요, 정말 평온한 잠이 든 것도 아니다.
흐르는 냇물에서 저녁 바람이 일고 높은 소나무 가지에서 매미소리가 서슬질* 무렵이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랜 마주(魔酒)*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떨고 일어나 낮에 먹다 남겨둔 술항아리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녁때의 싸움은 대개 억쇠가 먼저 거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억쇠가 먼저 주먹질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몸뚱이는, 그러나 몇 번 모질게 부딪고 할 새도 없이 이내 다시 피투성이가 되어버리기 마련이었다. 득보는 되도록이면 억쇠의 주먹을 피하려는 듯이 저만치 선 채 춤만 덩실덩실 추고 있는 것이었다.
“새야 새야 붕조새야
북명*바다 붕조새 야
치징 치징 치징
지하자자 저 절씨구.”
“얘 이놈 득보야!”
억쇠는 또 한 번 건너편 산이 쩌르렁하도록 소리를 질렀다.
“간다 훨훨 날아간다
수격 삼천리……:
내 한주먹 번쩍하면 네놈 대가리가 박살이라,
치징 치징 치징
지하자자 저 절씨구.”
득보는 이렇게 목청을 뽑으며 점점 억쇠에게로 가까이 다가들어왔다. 웬일인지 싸울 태세를 갖추지 않고 그냥 춤만 덩실덩실 추며 억쇠의 턱 앞까지 다가들어왔다. 억쇠는 뛰어들어 그의 목을 안았다. 득보도 억쇠와 같이 하였다. 두 사람은 큰 나무가 넘어가듯 쿵 하고 한꺼번에 자빠져버렸다.
득보의 목을 안고 한참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던 억쇠는 갑자기 큰소리로 껄껄껄 웃어대었다.
그의 왼쪽 귀가 붙어 있을 자리엔 찢긴 살과 피가 있을 따름, 귀는 절반이나 득보의 입에 들어가 있고, 득보는 아끼는 듯 그것을 얼른 뱉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해가 지고 어두운 산그늘이 내려오드록 이 커다란 피투성이들은 일어날 생각도 없이 연방 서로 피를 뿜으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것이다.
3
억쇠와 득보는 지난해 봄에 첨으로 만났다. 그리하여 그날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날부터 그들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겐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들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먼저, 주인 격인 억쇠로 말하자면, 그는 이 황톳골 태생으로, 나이는 쉰두 살, 수염과 머리털이 희끗희끗 반이나 넘어 센 오늘날까지 항상 가슴속에 홀로 타는 불길을 감춰온 사람이다.
그것은 언젠가 한번 저 무지개와도 같이 하늘 끝까지 시원스레 뿜어졌어야 했을 불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기 동네 장정들도 겨우 다룬다는 들돌을 성큼 들어서 허리를 편 것으로 온 마을을 뒤집어 놓은 것은 그의 나이 열세 살 나던 해다.
“장사 났군.”
“황톳골 장사 났다!”
사람들은 숙덕거리기 시작하여, 이튿날 노인들이 의관을 하고 동회(洞會) 에 모여들었다.
“예로부터 황톳골에 장사가 나면 부모한테 불효하거나 나라의 역적이 된댔것다.”
“허긴, 인제는 대국 명장이 혈을 지른 뒤이니 별수는 없으리다.”
“당찮으이, 바로 내 종조*뻘 되는 이가 그때 장사 소릴 듣고 사또 앞에 잡혀가 오른쪽 팔 하나를 분질려 나왔거든.”
이따위 소리들을 서로 주고받고 하다가 결국 억쇠의 오른쪽 어깨의 힘줄에다 침을 놓으라는 결론이 났다. 그중에서도 유독 심히 구는 사람이 억쇠의 백부뻘 되는 영감이었다.
“황톳골 장사라면 나라에서 아는 거다. 자, 자식 하나 버릴 셈 치면 그만일걸…… 자, 괜히 온 집 안 멸문당할라.”
하고 동생을 윽박질렀으나, 그러나 동생은 끝까지 묵묵히 앉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억쇠 하나밖에 더 자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그외 어머니는 억쇠의 소매를 잡고,
"이것아, 어써다 그런 철없는 짓을 했노. 너이 아바이 속을 너는 모를라,“
하며 울었다.
이튿난 아침 그 아버지는 억쇠를 불러,
"늬 나이 열세 살이다. 몸 하나라도 성히 지닐라거던 철없이 아무데나 나서지 마라. 네 일신 조지고 온 집안 문 닫게 할라. 모도가 늬 맘먹을 탓이다.”
하였다.
억쇠는 아버지의 이 말을 가슴에 새겨들었다. 그리하여 씨름판이고, 줄목*이고, 들돌을 다루는 데고, 짐 내기를 하는 마당에고, 일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나 무슨 힘겨룸 따위를 하는 데는 비치지 않았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남짓했을 때는 과연 솟는 힘을 제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날 밤에는 혼자서 바위를 안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골짜기로 내려왔다 하는 동안, 어느덧 밤이 새어버리는 수도 있었다. 상투가 풀려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두 눈엔 벌겋게 핏대가 서고 하여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밤사이는 또 이렇게 바위와 씨름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낮이 되면 무엇이든지 눈에 뵈는 대로 때려부수고 싶고 메어치고 싶고, 온갖 몸부림과 발광이 치밀어올라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힘자랑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힘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억쇠의 이런 소문이 또 한 번 황톳골에 퍼지자, 그의 백부는 그의 아버지를 보고,
“인제는 그놈이 무슨 일을 낼 끼다. 자아, 그때 내 말대로 단속을 했더면 이런 후환은 없었을걸. 자아, 인제 그놈을 누가 감당할꼬. 자아, 그러면 늬 자식 늬가 혼자 맡아라. 나는 이 황톳골에 못 살겠다.”
이러고는 재를 넘어 이사를 가버렸다.
억쇠는 이 말을 듣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목을 놓고 울었다. 집에 돌아와, 낫을 갈아서 아버지 모르게 오른쪽 어깨를 끊코 피를 흘렸다.
이것을 안 그의 어머니는,
“어리석게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짓이람. 힘세다고 다 불량할까, 제 맘먹기에 달렸는걸…… 괜히 너의 어른 알면 시끄러울라.”
하고 되레 못마땅히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게 남긴 유언도 다만 힘을 삼가라는 것뿐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임종에 이르러 그에게 신신당부를 한 것도 역시 이것이었다.
“늬가 어릴 때 누구에게 사주를 뵀더니 너의 팔자에는 살이 세다고, 젊어서 혈기를 삼가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게라더라……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힘이 보배니 너만 알아 조처할 양이면은 뒤에 한번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게다. 조용히 그때가 오기만 기다려라.”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 남긴 이 말이 억쇠에게 있어서는 그 무슨 하늘의 계시와도 같이 들렸던 것이다.
‘한번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게다.’
‘때가 오기만 기다려라.’
그는 잠시도 이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짙 때가 없었다.
그 미칠 듯이 솟아오르는 힘의 충동을 누르곤 누르며, 그 한번 크게 쓰일 날을 기다려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는 사이, 그러나 그 기다리는 날이 오기도 전에 어느덧 그의 머리털과 수염만이 희끗희끗 반나바 세어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주막으로 나가 색시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고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다.
하루는 삼거리 주막에서 분이라는 예쁘장스러워 뵈는 젊은 색주가*와 더불어 술을 먹고 있는데, 계집이 잠깐 밖에서 손님이 저를 찾는다면서 곧 다녀 들어온다 하고 나간 것이 종시 들어오질 않은 채, 때마침 밖에서는 무슨 싸움소리 같은 것이 왁자지껄하기에 문을 열어보았더니, 어떤 낯선 나그네 한 사람이 주인의 멱살을 잡아 이리 낚고 저리 채고 하는 중이 아닌가.
그새 뒤란*에서 노름을 놀고 있던 패들이 우우 몰려나와 이 말 저 말 주고받고 하던 끝에 시비를 가로맡았나본데, 그것은 주인의 말이,
“아, 생전 낯선 나그네가 와서 남의 주모더러 이 여자는 내 딸이다, 이리 내어달라 하니, 온 세상에 이런 경위가 어디 있나.”
하매 필시 이 나그네가 분이의 상판대기에 갑자기 탐을 낸 모양이라고……·하나, 분이는 자기네도 누구나 다 끔찍이 좋아하는 터이요, 더구나, 생전 낯선 작자가 돈 한 푼 어떻다는 말 없이 가로 집어채려 하니, 이 불량하고 경위 없는 작자를 그냥 둘 수가 없다 하여, 노름패 중에서 한 사람이 먼저 따귀 한 찰을 올려붙였더니, 낯선 사내는 펄쩍 뛰듯이 일어나 그 노름꾼의 멱살을 덥석 잡아 땅에 메꽂아놓았다.
이것을 본 한마당 사람들은 다 겁을 집어먹었으나 원체가 이쪽엔 수효도 많고, 또 노름꾼 중에는 힘센 놈도 있고 독한 자도 있자니까,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리도 없었다. 이놈이 대들고 저놈이 거들고 하나, 낯선 사내는 좀처럼 꿀려들어갈 듯도 하지 않은 채 하나 둘 자빠져 눕는 것은 모두 이쪽 편이다. 머리가 터진 놈, 아랫배를 차인 놈, 허구리*를 쥐어박힌 놈, 따귀를 맞은 놈, 부상자들이 마당에 허옇게 나가누웠다.
억쇠도 술이 얼근했던 터이라, 이 꼴을 그냥 볼 수 없다 하여, 방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며,
“아니 웬 놈이 저렇게 불량한 놈이 있누?”
한 번, 집이 쩌르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호령을 쳤다.
낯선 사내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억쇠를 한 번 흘겨보더니,
“흥, 너도 이놈……”
하는 말도 채 맺지 않고, 별안간 뛰어들며 머리로 미간을 받으매, 억쇠도 한순간 정신이 다 아찔하였으나, 그다음 순간엔 그도 바른손으로 놈의 멱살을 잡아쥘 수 있었다. 보매 기골도 범상히는 생긴 놈이 아니로되, 그래도 처음 억쇠는, 그놈이 그저 힘깨나 쓰는 데다 싸움에 익은 놈이려니쯤으로밖에 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한번 힘을 겨뤄보자 그냥 이만저만 센 놈이나 불량한 놈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간, 억쇠는 문득 자기의 몸이 공중으로 스르르 떠오르는 듯한 즐거움이 가슴에 솟아오름을 깨달으며, 저도 모르게 멱살 잡
았던 손을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4
이 낯선 사내 ―그의 이름이 득보였다一가 억쇠를 따라서 황톳골로 들어와 억쇠와 징검다리 하나를 사이하고 살게 된 것은 바로 그날부터의 일이었다. 냇물가에 길을 향해 앉아 있던 오두막 한 채를 억쇠가 그를˙ 위하여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한 사날 뒤에 득보는,
“털이 그렇게 반이나 세인 놈이 여태 자식새끼 하나도 없다니 가련하다. 헌데 나는 네놈한테 아무것도 줄 게 없구나. 그래서 분이를 데리고 왔다. 네 새끼 삼아 네가 데리고 살아라.”
하였다.
억쇠가 거북하게 웃으며 ,
“너는 이놈아…….”
하고 물으니까 득보는,
“늙은 놈이 남의 걱정까지 하게 됐느냐. 고맙다 하고 술이나 한턱 걸찍하게 낼 일이지. 하기야 그렇지 않기로서니 아물함 이 득보가 조카딸년 데리고 살겠나마는…….”
하며 입맛을 다시었다.
득보의 조카딸이란 말에, 억쇠는 그렇다면 생판 남은 아닌 모양이라고 좀더 마음을 놓으며,
“너도 이놈아, 같이 늙어가는 놈이 웬걸 주둥아리만 그렇게 사나우냐. 더구나 내가 늙었음 네놈 같은 거 하나쯤 처분하지 못할 성부르냐.”
“늙은것이 잔소린 중얼중얼 잘 줏어섬긴다.”
두 사내가 이런 말을 건네고 있는 동안 분이는 억쇠네 술항아리에서 술을 펴내다 거르고 있었다. 이것이 분이와 억쇠의 혼사요, 또 그녀에게 있어서는 시집살이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술이 얼근했을 때, 억쇠가 또 득보를 보며,
“너는 이놈아, 혼자 살래?”
하고 물어보았더니 득보는 곧,
“세상에 계집이 없어?”
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네놈 그 험상궂은 상판대기하며 웬걸 계집들이 그렇게 줄줄 따르겠나.”
“흥, 이놈아, 너무 따라서 걱정이다. 그러기 땜에 분이도 네놈의 차지가 되는 거다. 저년은 강짜를 너무 놓기 땜에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거든, 너 같은 농사꾼한테나 제격이지.”
이러한 득보의 대답을 억쇠는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다. 아까는 자기가 그에게 집을 마련해준 사례로, 그리고 또 이왕 제 조카딸을 데리고 살 수는 없으니까 데리고 왔노라고 해놓고, 지금 와서는 강짜가 심해서 어차피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 주막에서 득보는 분이를 자기의 딸이라 했고, 그다음엔 조카딸이라 하더니, 지금 와서는 제가 데리고 살자니까 너무 강짜가 심해서 억쇠에게 양보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렇거나 억쇠는 어차피 후처를 얻어야 할 형편이요, 또 분이와는 본래 그녀가 주모로 있을 적부터 이미 색념*이 있던 터이고 하여 구태여 마다할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득보가 분이를 두고 딸이니 조카니 하는 것처럼 득보에 대한 분이의 태도도 또한 야릇한 것이 있어, 어떤 때는 아저씨랬다, 어떤 때는 그이랬다, 심하면 아주 득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엔,
“아무것도 아니오. 외가는 외가뻘이라 하지만 그이와는 직접 걸리지 않고, 내 외삼촌의 배다른 형제라요.”
했다. 어느 날은 술이 또 취해서,
“왜 내가 아일 못 낳아? 저 건너 득보한테 가 물어보지, 분이가 열여섯에 낳은 옥동자를 어쨌는가고. 사내 글러 못 낳지 내 배 탓인 줄 알어?”
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걸핏하면 곧잘 득보의 이름을 걸치고 드는 분이가 억쇠에게는 여간 못마땅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숫색시인 줄 알고 장가 든 것이 아닌 바에야 못 들은 체해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서 그 누 사람이 이리저리 걸치는 말들을 종합해서 그들의 과거란 것을 대강 추려보면, 득보는 본래 이 황톳골에서 한 팔십 리가량 떨어져 있는 어느 동해변에서 그의 이복형제들과 더불어 대장간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그 형제들과 싸움을 하다 괭이로 머리를 때려서 그 형제 하나를 죽이고 그길로 서울까지 달아나 거기서 누구 집 하인 노릇을 하던 중, 이번에는 또 그곳 어느 대가*의 부인과 관계를 맺었던 모양이다. 그랬다가 그것이 남에게 드러나게 되자 거기서 도망질을 쳐서 도로 고향 근처로 내려와 다시 옛날과 같은 대장간 일이나 보고 있으려니까 이번에는 다시 그가 옛날 형제를 죽인 사람이란 소문이 퍼져 더 머물러 살 수 없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또 나그넷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분이는 득보가 두번째 그의 고향 근처로 내려와 살려다 못 살고 다시 나그넷길을 떠나게 된 데 대하여, 그것은 그녀 자신이 그의 ‘옥동자’를 낳게 되었기 때문인 듯이 말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모를 일이다. 분이의 그 야릇한 말투와 행동으로 보아서, 그 관계란 것을 가령, 분이가 아직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계집애의 몸으로서 자기의 외삼촌의 배다른 형제뻘이 되는 득보의 아이를 낳게 된 것이라 하더라도, 득보와 같은 그러한 위인이 그만한 윤리적 탈선이나 과실로 인하여, 일껏 벌였던 일터를 동댕이치고 다시 나그넷길을 떠나게 되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거기엔 위의 두 가지 이유가 다 걸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분이가 걸핏하면 득보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거기 있는 까닭이요, 마음이 있는 곳에 몸도 대개 가 있어, 한 달 잡고 스무 날은 억쇠가 홀아비로 자야 하였다. 낮에 가서 술잔이나 팔아주고 돼지다리나 삶아주고 하는 것쯤은 분이의 과거가 그러한만큼 혹 예사라 치더라도 잠자리까지 그러한 데는, 제 말대로 비록 제 외삼촌의 이복형제뻘쯤 된다 할지라도 바로 징검다리 이쪽에 제 서방의 집을 두고 있는 처지에서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억쇠가 득보더러,
“너 이놈, 분이는 왜 밤낮 네 집에 붙여두는 거여.”
하고 꾸짖으면,
“늙은 놈이 계집 투정은 어지간히 한다.”
하며 득보는 가래침을 탁 뱉곤 했다.
“어디 보자, 네놈 주둥아리가 곧장 성한가.”
“별르지만 말고 낼이라도 당장 끝장을 내렴. 끝장을 못 내면 그 대신 계집은 내게 넘기든지……”
“흥……”
하고 억쇠는 코웃음을 쳤다. 네놈 하나쯤은 가소롭다는 뜻이다. 이럴 때 만약 어느 쪽에서든지 술과 안주만 준비되어 있다면 이튿날로 곧 싸움이 벌어진다. 그들과 같이 가끔 싸움을 가져야 하는 사이에 있어 분이의 그러한 생활 태도는 그것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기는 득보가 처음부터 조카딸이라는 구실로 그녀를 억쇠에게 갖다 맡긴 것도 미리 다 이러한 효과를 노렸던 것인지 몰랐다.
분이는 분이대로 두 사나이가 자기를 두고 무슨 수작을 하든지 그런 것은 아랑곳도 없다는 듯이 밤에나 낮에나 부지런히 징검다리를 건너다녔다.
억쇠가 볼 때 더욱 해괴한 노릇은, 분이가 득보를 두고 강짜를 놓는 일이었다. 득보는 언젠가도 천하에 흔한 게 계집이라는 큰소리를 쳤지만. 과연 제 말대로 분이가 아니더라도 계집에 그다지 주릴 사이는 없었다. 어디로 한 번 나가 며칠을 묵고 들어올 적에는 으레 낯선 계집 하나씩을 달고 돌아오곤 하였다. 그것들이 그러나 사흘도 못 가 대개 달아나버리기는 하였지만.
그런데 또 한 가지 망측한 일은 이렇게 득보가 가끔 달고 들어오는 계집들에게 분이가 번번이 강짜를 부린다는 사실이었다. 강짜를 놀되 이건 어처구니도 없이, 이년아, 왜 남의 은가락지를 훔쳤느냐, 내 다리를 찾아내라, 수젓가락이 없어졌다, 모시치마는 어디 갔냐…… 이런 따위로 낯선 계집들의 노리개나 옷벌을 뺏기가 일쑤요, 그러고서도 계집이 얼른 물러가지 않으면 이번에는 육박전으로 달려들어 머리를 뜯고 옷을 찢곤 하는 것이다.
“너 때문에 득보는 평생 어디 장가들겠나.”
하고 억쇠가 나무라면 분이는,
“벨소릴 다 듣겄네. 그럼 도둑년을 붙여둘까.”
하고 톡 쏘는 것이다.
한번은 역시 그러한 여자 하나가 득보에게 몹시 반했던지 얼른 달아나지 않고 한 달포 동안이나 붙어살게 되었다. 분이가 그런 따위 수작을 붙이면 서슴지 않고 제 보따리를 털어서 척척 내어주어버린다. 몸집도 큼직하려니와 여자치고는 힘도 세어서 분이가 본래 남의 머리를 뜯고 옷벌이나 찢는 데는 여간한 솜씨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 여자에게만은 그리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 머리를 뜯으려고 달려들었다가는 번번이 실패를 보고 말았다. 그러자 분이는 일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 채, 며칠이든지 득보네 방구석에 그냥 박혀 있었다. 밤사이에는 셋이서 무엇을 하는지, 밖에서 들으면 흡사 씨름을 하는 것처럼 툭탁거리고 꽝꽝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떤 때는 그것이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기도 하였다. 이러고 난 이튿날 아침에 보면 세 사람이 다 으레 머리를 풀어 흩뜨린 채 눈들이 벌게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억쇠는 입맛이 쓴지,
“더러운 연놈들!”
하면서 침을 뱉곤 하였다.
그렇게 얼마를 지난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연놈이 사람 죽이네!”
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분이의 목소리였다. 그러고는 또 다시 툭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득보의 생활에 사생결단의 관심을 걸고 있는 분이가 그러면 제 서방 격인 억쇠를 보지 않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정부는 정부요, 본부*는 본부란 속인지, 득보의 집에서 국그릇도 들고 오고 밥사발도 안아오곤 하여, 시어머니와 억쇠의 밥상을 보는 체도 했고, 가다가 빨래가 밀리면 빨랫방망이를 들고 나서기도 하였다. 그밖에 무슨 잠자리 같은 데서 몸을 사리거나 하느냐 하면 그런 일은 한 번도 없고, 그보다도 분이의 말을 빌리면, 억쇠에 대한 그녀의 가장 중요한 불만이, 잠자리에 있어 그가 너무 심심한 점이라 한다.
5
분이가 밤낮으로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을 무렵, 억쇠는 맘속으로 그녀를 단념하고, 그 대신, 그전부터 눈독을 들여오던 설희를 손아귀에 넣고 말았다.
억쇠는 집안이 농가요, 과거가 또한 그러니만큼 잠자리에서뿐만 아니라, 분이의 모든 점이 그에게는 맞을 수 없었다. 더구나 늙은 어머니까지 모시는 몸으로 여태 혈육 한 점 없다는 것도 여간 송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정으로서도 자식 하나쯤은 기어이 남겨야 할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씨나 몸가짐이 그러한 분이에게 이 일을 기대할 수는 없었고, 또 그러니만큼 그것을 통정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녀와는 상의 없이 저 설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이는 또 분이대로 잔뜩 배알이 틀리는지,
“흥, 씨 글러 못 낳지, 배 글러 못 낳는 줄 아나. 어느 년의 그건 어디 별난가 두고 보자!”
하며 이를 갈아붙였다.
설희는 용모가 미인이었고, 게다가 행실까지 얌전하다 하여, 부근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소문이 높이 나 있던 여자였다. 스물셋에 홀로 되어 그동안 여러 군데서 무수히 권하는 개가도 들지않고 식구래야 하나밖에 없는 늙은 시아버지를 지성껏 섬겨가며 군색한 빛 남에게 보이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얼마 전 그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버리고 의지가지없게 되자, 그동안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두고 몇 차례 집적거려보기까지 하여오던 억쇠가 드디어 그녀를 손에 넣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설희에 대하여 침을 흘려온 자로 말하면 물론 억쇠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가운데도 득보는 잔뜩 제 것이 될 줄로만 믿어왔던 모양으로, 설희가 억쇠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으흥 하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늙은 놈이 계집을 둘씩이나 두고 거드렁거리다 쉬 자빠질라, 괜히 헛욕심 부리지 말고 진작 하날랑 냉큼 내놓는 게 어때.”
안냇벌에서 돌아오며 억쇠에게 하는 말이었다.
억쇠는 그냥,
“그놈 주둥아릴…….”
하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이놈이 끝내 그냥 있진 않겠구나.’,
했던 것이다.
어느 날 밤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한 이경*이나 되어 억쇠가 설희에게로 가니 방문의 불빛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그레하게 비쳐 있는데 그 안에서 사내의 코 고는 소리가 드르렁거렸다. 아차 싶어 신돌 위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침침한 불빛에서도 완연히 크고 낯익은 미투리* 한 켤레가 놓여 있지 않은가. 순간 억쇠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온몸의 피가 가슴으로 쫘악 모여드는 듯하였다. 떨리는 손으로 막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 저쪽 뜰 구석에서 사람의 기척소리가 나는 듯하여 얼른 머리를 돌려서 보니 그쪽 어두컴컴한 거름 무더기 곁에 하얗게 서 있는 것이 분명히 사람의 모양이요, 한두 걸음 가까이 들어서는데 보니 바로 설희였다.
설희는 억쇠의 턱 밑으로 다가들어서며,
“득보요, 벌써 초저녁에 와서 어른을 찾데요. 안 계신다고 해도 그냥 들어와서 어떻게 추근추근히 구는지, 할 수 없이 측간엘 간다고 나와서 뒤꼍에 숨어 안 있는교.”
이렇게 소곤거렸다.
“음.”
하고 혼자 속으로,
‘죽일 놈이다.’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방문 고리를 잡을 때는 이놈을 아주 잠이 든 채 대가리를 부숴놔라, 했던 것이다.
득보는 억쇠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모르게 방에 하나 가득 찰 듯한 큰 덩치를 뻗뜨리고 자빠져 누워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었다. 유달리 검붉고 뼈가 뚝뚝 불거진 얼굴에 희미한 불그림자가 가로 비껴있고, 여줏덩이*만이나 한 콧마루 위에는 마침 파리까지 한 마리 붙어 있다. 파리는 콧마루에서 콧잔등을 타고 기어올라가다가 산근*즈음에서 한 번 날아서, 다시 그의 왼쪽 눈썹 끝의 도토리만한 혹 위에 앉았다. 파리와 함께 그의 시선도 그 혹 위에 가 멎어서 더 움직이질 않았다. 그것은 금년 삼월 삼짇날 싸움 때 억쇠의 주먹에 맞아서
생긴 게라는 혹이었다. 그러자 억쇠는 문득 어떤 비창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발길로 득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이놈 득보야!”
하고 불렀다.
몸을 좀 꿈틀거리다 그대로 다시 코를 골기 시작하는 득보를 이번에는 좀더 거세게 걷어차며,
“이놈 득보야!”
하니 그제야 핏대가 벌겋게 선 눈을 떠 방 안을 한 번 살펴보고 나서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억쇠가 목소리에 노기를 띠고
“네 이놈, 여기가 어디여.”
한즉, 그는 입 맛만 쩍쩍 다시고는 대답이 없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여.”
또 한 번 호통을 치니, 그제야 그 벌건 눈으로 억쇠를 한 번 힐끗 쳐타보며.
"어딘 어디라.”
한다.
“흥, 이놈!”
억쇠는 한참 득보의 낯을 노려보고 있다 이렇게 선웃음 한 번 치고나서 얼굴을 고쳐,
“따로 매는 맞을 날이 있을 터이니 오늘 밤엔 우선 술이나 처먹어라.”
하고 설희를 불러 술을 청했다.
이날 밤 이래로, 득보의 설희에 대한 태도가 조금 은근해진 듯하기는 했으나, 그 대신 전날보다도 더 걸음이 쉽고 잦게 되었다.
“아지메 있어?”
득보는 언제나 밖에서 이렇게 불렀다. 설희는 설희대로 득보가 비록 자기를 찾더라도,
“안 계시는데요.”
하고 으레 바깥주인이 안 계신다는 뜻으로만 대답을 하곤 했으나, 득보는 억쇠가 있든지 없든지 그냥 방으로 들어오므로 나중에는 잠자코 방문을 열기만 하였다.
이렇게 방 안에 들어온 득보는 처음엔 으레 농지거리 비슷한 인사말을 붙여보곤 하였으나, 수작이 지나치면 그때마다 설희의 두 눈에 싸늘한 칼날이 돋침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앉는가 하면 의외로 빨리 자빠져 누워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놈아 맞아 죽을라, 조심해라.”
쇠가 은근히 얼러보면,
“더럽게 늙은 놈아! 친구가 네 계집 궁둥이에 좀 붙어 자기로서니 늙은 놈 처신으로 그것까지 샘질이냐?”
득보는 아니꼬운 듯이 가래를 돋우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억쇠는 득보가 언젠가 분이를 두고도 이렇게 가래만 뱉던 것을 기억하고,
“흥, 이놈이 어디 두고 보자.”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면,
“이놈아, 그렇다면 낼이라도 끝장을 내자. 어느 놈의 계집이 되는가 말이다.”
하고 득보는 또 언젠가 분이를 두고 하던 것과 같은 말투였다.
“어디 이놈!”
하고 이번에는 억쇠도 이전과 다른 눈살을 쏘았다.
이 모양으로 두 사람 사이에 설희가 새로 등장한 이후로는 언제나 그녀로써 싸움의 동기를 삼았다. 그것도 물론 분이의 경우와 같이 한갓 싸움을 돋우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지만, 분이의 경우보다는 양쪽이 다 좀 심각한 체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억쇠도 설희에 대해서만은 진지한 태도로, 어쩌다 술이라도 얼근해지면,
“난 자네가 암만해도 염려스러이.”
하고 슬쩍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도 하였다. 그럴라치면 그때마다 설회는 소곳이 고개를 수그릴 뿐 대답이 없었다.
한번은 분이의 이야기를 하던 끝에 설희가,
"아주 떼내어버 려요.”
하기에. 그때 역시 술기가 얼근하던 억쇠는 농담 삼아,
"그랬다가 자네마저 득보놈이랑 어울려버리면 어쩌라구.”
했더니, 설희는 갑자기 낯빛이 파랗게 질리어 한참 앉아 있다가,
“나같이 팔자 험한 년이 앞으론들 좋기로사 바라겠소…… 그저 이 위에 더 팔자는 고치지 않을 작정·…‥”
하며 조용히 수건으로 눈물을 받으매, 억쇠는 취한 중에서도 설희의 팔자란 말에 문득 자기의 반나마 센 수염을 쓸어쥐며,
“미안하이, 미안해……”
진정으로 언짢아하였다.
득보가 밤낮없이 설희의 방에 걸음이 잦을 무렵이었다.
밤마다, 달이 있을 때에는 그 집 뒤꼍의 늙은 홰나무 그늘에 숨고, 달이 없을 때엔 캄캄한 어둠에 싸인 채 그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 설희의 방문을, 분이는 노리고 있었다.
그녀의 낯에는 그믐 달빛 같은 독기가 서리고 그 두 눈에는 야릇한 광채가 감돌며, 그리고 품속에는 헝겊에 싸인 날이 새파란 비수 하나가 들어 있었다.
6
억쇠와 득보 두 사람이 서로 겨루듯이 열을 내어 설희에게 다니기 시작한 뒤부터 분이의 낯빛과 거동엔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전과 같이 수다스레 지껄이지도 노골적으로 입을 비쭉거리지도 않았다. 밤으로는 어디 가 무엇을 하고 오는지 집 안에 붙어 있지도 않다가, 낮이 되면 온종일 이불을 쓰고 잠을 자는 것이었다. 언제 어떻게 끼니를 치르는지 그녀는 거의 식음을 전폐하듯 하였다. 그녀의 낯빛은 이제 종잇장같이 되고, 입가에 언제나 뱅글거리던 웃음도 아주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분이의 이러한 심상찮은 거동을 억쇠 역시 깨닫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병환으로 경황이 없을 즈음이라 설마 어떠랴 하고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에는 억쇠가 그의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고 있노라니까 밤이 이슥해서, 건너편 득보네 집에서 갑자기 싸우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분이의 비명소리가 나고 그러고는 싸움소리가 갑자기 그쳐버렸다. 분이의 비명소리가 났을 때, 억쇠의 늙은 어머니는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야야, 저게 무슨 소리고? 저게, 저게!”
하고 억쇠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때부터 병세는 갑자기 위중해져서, 그런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맘 때엔 그녀의 몸에서 이미 숨이 없어진 뒤였다.
황톳골 뒷산 붉은 등성이에 억쇠네 무덤 한 쌍이 더 늘던 그날 밤이었다.
억쇠가 그의 친척 몇 사람과 더불어 아직도 뜰 가운데 타고 있는 화톳불*을 바라보고 있을 바로 그때, 그의 설희는 그 뱃속에 또 하나 다른 생명을 넣은 채, 목에는 푸른 비수가 꽂힌 채, 그녀의 가련한 일생을 끝내고 말았다.
설희의 몸이 채 식기도 전에, 손과 소매와 치맛자락을 온통 피로 물들인 채, 분이는 다시 그 캄캄 어두운 홰나무 밑을 돌아 득보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핏방울이 듣는* 그녀의 오른쪽 손에는 다시 설희네 집에서 들고 나온 식 칼이 번득이고 있었다.
낮에 상여를 메고 갔을 뿐 아니라 산에서 고된 흙일을 하고 돌아온 득보는 술이 잔뜩 취하여 마침 분이가 치마 속에 그것을 숨기고 설희 집 뒤의 홰나무 그늘을 돌아나올 때쯤 하여서는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방 안에 막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방문 앞까지 와서, 방 안의 득보의 코 고는 소리를 들은 분이는 흡사 조금 전에 설희의 방문 고리를 잡으려던 그 순간과 같이, 별안간 가슴에서 걷잡을 길 없는 쌍방망이질이 일어나며, 그와 동시에 코에서는 어릴 적 남몰래 쥐어 먹던 마른 흙냄새가 흑 끼쳐오르며 정신이 몽롱하여졌다. 바로 그다음 순간, 분이는 반무의식 상태에서 바른손에 든 식칼로 어둠 속에 코를 골고 자는 득보의 목을 내리 찔렀다. 그러나 칼날은 그의 목을 치치 못하고 목에서 한 뻠이나 더 아래로 빗나가 그의 왼편 가슴을 찔렀다.
가슴이 뜨끔하는 순간, 득보는,
“어엇!”
하고 놀라 일어나려는데, 무엇이 왈칵 가슴으로 뛰어들어와 안기려하였다. 분이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에 번쩍하는 다음 순간, 득보는 무슨 악몽에서 깨는 듯, 가슴의 것을 힘껏 후려던져버렸다. 분이는 문턱에 가 떨어졌다.
그제야 정말 정신이 홱 돌아들어오며 거의 본능적으로 그 손이 그쪽 가슴께로 갔다. 가슴에서 뜨뜻한 액체 같은 것이 손에 묻어지자, 그 순간, 또 한 번 꿈속에 벼락을 맞듯 등골이 찌르르하여짐을 깨달으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이튿날 새벽 억쇠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을 때엔 온 방 안이 벌건 피요, 비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득보!”
하고 억쇠는 큰 소리로 불렀다.
“……”
득보는 잠자코 눈을 떠서 억쇠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벌건 핏대가 서 있었다.
“……”
“죽든 않겠나, 죽든.”
“……”
대답 대신 득보는 왼편 가슴을 더듬었다. 거기엔 시삘건 핏덩이가 풀처럼 엉겨 붙어 있고, 다시 그의 엉덩이 즈음에서는 피 칠갑이 된 식칼 하나가 나왔다.
식칼을 집어들어서 보고 있는 억쇠의 신발에서는 피가 스며 올라와 버선을 적시었다.
그동안 부엌의 억새풀 위에 쓰러져 누워 있었던 분이는 새벽녘이 되어 억쇠의 목소리가 나자, 놀라 일어나 거기서 그림자를 감추어버렸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7
득보의 가슴의 상처는 달포 만에 거죽만은 대강 아물어 붙었으나 그 속이 웬일인지 자꾸 더 상해만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양쪽 광대뼈가 불거져 나오고, 광대뼈 밑에는 우물이 푹 패고, 게다가 낯빛은 마른 호박같이 되어 옛날의 모습은 볼 길이 없는데, 이마에는 칼로나 그어낸 것처럼 깊고 험상궂은 주름살만 늘게 되었다. 그는 달포 동안에 완전히 늙은 사람이 되었다.
“분이는?”
억쇠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물었다.
처음 억쇠는, 득보가 분이를 찾는 것은 분이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는 줄 알았으나, 두 번 세 번 그의 표정을 보아오는 동안, 그렇기만도 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분이를 도리어 아쉬워하고 있는 듯한 눈치이기도 하였다.
“내가 찾아오지.”
억쇠는 늘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분이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혹은 그녀의 고향인 동해변 어디에 가 산다는 말도 있고, 혹은 남쪽의 어느 객줏집에 가 역시 주모 노릇을 한다는 말도 있고, 또 일설에는 영천(永川) 지방 어디서 우물에 빠져 죽어버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뭐 하노.”
득보는 억쇠에게 곧잘 역정을 내었다.
“그동안 찾아내지.”
그러나 억쇠는 분이를 찾아 길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듬해 봄이 되 었다.
세안*에 가끔 장 출입을 하던 득보는, 땅에서 풀이 돋고, 건넛산에 진달래가 필 무렵이 되자, 표연히* 어디로 길을 떠나고 말았다.
억쇠는 억쇠대로 그날부터 득보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주막에 나가 득보의 소문만 들으려 하였다. 이른 여름이 되었다.
나뭇가지마다 녹음이 우거져가는 단오 무렵 어느 날 득보는 의외로 어린 계집애 하나를 데리고 황톳골로 돌아왔다. 유록*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은 열두어 살가량 되어 뵈는 이 어린 계집애는 분이가 열여섯 살 때 낳은 그녀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은 일찍이 옥동자라고 했지만……·)
“분이는 어쩌고?”
억쇠가 물은즉, 득보는 힘없이 다만,
“아마 뒈진 모양이여.”
하였다.
그 뒤에도 득보는 가끔 집을 나가면 한 예니레씩 묵어 들어오곧 하였다.
“어디 갔더누.”
억쇠가 물으면 득보는 힘 없이 그저,
“저어기……”
하고 마는 것이 분명히 분이를 찾아다니다 오는 눈치였다.
분이를 찾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무시로 계집애를 보내어 억쇠의 거동을 엿보게 하였다.
“멀하더누.”
“누어 있데요.”
이것이 그들 애비·딸의 대화였다. 만약 억쇠가 집에 없더라고 하면 몇 번이든지 계집애를 되돌려보내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가 집에 돌아와 있더라는 보고를 듣고 나서야 마음을 놓는 모양이었다.
한번은 주막에서 술이 취해서 돌아오는 길로 억쇠에게 들른 득보는 그 커다란 주먹을 억쇠의 턱 밑에 디밀어 보이며,
“너 같은 놈은 아직 어림없다.”
고 하였다.
억쇠도 자칫 흥분을 하여,
“허허허……”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더니, 득보는 그 주먹으로 억쇠의 볼을 쥐어박으며,
“이 늙은 놈아, 이 더러운 놈아.”
분이 찬 목소리로 이렇게 욕을 퍼부었다.
억쇠도 그제야 자기의 경망한 웃음을 뉘우치며,
“술만 깨면 네놈 죽여놓을 게다.”
하고 호통을 쳤더니, 그제야 득보도 눈에 광채를 띠며,
“응, 이놈아, 정말이냐.”
하고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이 이렇게 한번 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도 사흘째도 억쇠는 득보를 찾아주지 않았다.
그런 지도 보름이 지난 뒤였다.
낮이 다 되어 득보는 억쇠를 찾아와, 그동안 노름을 해서 돈이 생겼으니 술을 먹으러 가자고 하였다.
마침 목이 컬컬하던 차라 억쇠도 즐겁게 술잔을 나누게 되었는데, 그러나 득보의 행동이 웬일인지 이날따라 몹시 굼뜨게 보였다. 억쇠는 마음속으로 득보가 분이를 못 잊어 그러려니 하고,
“너 이놈, 죽은 분이는 왜 못 잊고 그 지랄이냐.”
했더니 ,
“늙은 놈이 더럽게 기집 생각은 지독하게 헌다.”
하며 도로 억쇠를 나무라주었다.
“이 불쌍한 놈아, 분이는 영천서 우물에 빠져 죽은 지도 벌써 옛날이다.”
하고 억쇠가 한마디 던져본즉,
“그놈이 영천만 알고 언양은 모르는구나.”
하였다. 그러면 영천이 아니라 바로 언양(彦陽)서 죽은 게로구나, 억쇠는 속으로 짐작을 하며, 그래서 저놈이 한 달포 동안은 그렇게 아가리에 술만 들이부은 게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너는 이놈아, 상제 노릇을 해야지.”
하는 억쇠외 밭에. 득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잠자코 있더니, 흥 하고 그저 코웃음을 한 번 칠 뿐이었다.
숨이 거친 다 마쳐갈 무렵이었다.
득보는 돌연히 술상 위에다 날이 퍼렇게 선 단도 하나를 내놓으며,
"너 이놈, 네 죄 알지?”
하였다.
그러나 억쇠는 마치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것을 예기하고나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당황하거나 겁을 집어먹는 빛이 없이, 자칫하면 또 언제와 같이 웃음이 터져나올 듯한 것을 억지로 누르며,
“흥, 내가 이놈……”
하고 엄숙한 음성으로 입을 떼었다.
“네놈의 목숨 하나 오늘까지 남겨온 것은 다 요량이 있었던 거다.”
억쇠의 두 눈에도 불이 켜졌다.
억쇠의 장엄한 목소리와 불을 켠 두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깨달으며, 그러나 득보는 비웃는 듯이,
“너도 사내새끼로 생겨나, 방 안에서 자빠지기가 억울커든 나서거라.”
하며 단도를 도로 집어 고의춤*에 감추었다. 억쇠는 득보를 먼저 안냇벌로 들여보낸 뒤, 자기는 주막에 남아서 술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소주는 역시 깔깔한 놈이 좋군.”
억쇠는 안주인이 맛보기로 부어준 사발의 소주를 기울이며 바깥주인을 보고 이런 말을 건네곤 했다.
“안주가 마른 것뿐인데…….”
하고 안주인이 문어 가리를 들고 나왔다.
“문어 가리면 됐지, 머…….”
억쇠는 문어 가리를 꾸려서 조끼 주머니에 넣은 뒤, 소주 두루미(큰 병)를 메고 득보의 뒤를 쫓았다.
막걸리 먹은 다음에 소주를 걸친 때문인지, 옛날 첨으로 장가란 것을 가던 때처럼 가슴이 다 설레며 걸음이 흥청거려졌다.
“네놈이 내 초상 안 치르고 자빠질 줄 아나.”
억쇠는 문득, 언젠가 득보가 가래와 함께 뱉어놓던 이 말이 머리에 떠오르며 동시에 아까 술상 위에 내어놓던 득보의 그 날이 시퍼렇던 단도가 생각났다.
그 한 뼘도 넘어 될 득보의 단도날이 자기의 가슴 한복판을 푹 찔러, 이 미칠 듯이 저리고 근지러운 간과 허파를 송두리째 긁어내어준다면,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한 번 치고 문득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을 때, 해는 이미 황토재 위에 설핏한데,* 한 마장*가량 앞에는 득보가 터덕터덕 혼자서 먼저 용냇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문장』 4호(1939. 5); 『김동리대표작선집』 (삼성출판사 1967) ;
『한국대표명작: 김동리』 (지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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