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생을 그림에 몰두했던 만큼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가 다룬 화제(畵題)도 여러 방면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히 산수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산수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18세기 화단에서 유행하였던 진경산수(眞景山水) 쪽보다 전통적인 중국화풍에 관심이 컸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과 함께 당시 화단에 남종화풍을 유행시키고 뿌리내리게 한 주역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회화는 여러 후배화가들을 자극하였고,
최북(崔北)·
이방운(李昉運)·
이인문(李寅文) 등은 그의 영향이 엿보이는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그가
정선(鄭歚)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나
정선의 화풍과는 달리하고 있다.
심사정의 회화경향은 그의 화첩에 적은
강세황의 제발문(題跋文)대로
중국 명나라 오파(吳派)의 비조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배워 피마준법(披麻皴法)을 사용하였고,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 등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대부벽준(大斧劈皴)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화풍의 수용도 엿보이며, 특히 그의 아호를
현재(玄齋)라 한 것은
명나라 말기의 남종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아호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선배들의 화법을 다양하게 섭렵하고 남·북종화풍을 모두 수용하여 대륙적 면모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중국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신위(申緯)는
심사정이 옛 것을 따랐지만 자운(自運)이 모자란다는 혹평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와 묵법으로 자신의 개성 있는 회화세계에 도달하였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은 역시 그가 정열을 쏟은 산수화가 가장 많다. 그리고 진경산수·풍속화도 남기고 있으며 도석인물(道釋人物)·화훼초충(花卉草蟲)·영모(翎毛)·사군자(四君子) 등 모든 그림에 능숙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회화들은 대담하고 활달한 담묵(淡墨)과 농묵(濃墨)의 사용에서 세필(細筆)의 정교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산수화의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파교심매도 灞橋尋梅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촉잔도 蜀棧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손꼽힌다.
1747년 그가 만 40세 때에 그린 〈강상야박도〉는
북송의 미불, 원말사대가인 예찬(倪瓚), 명대(明代)의 오파화가(吳派畵家)들을 따른 흔적이 뚜렷하고 이미 40대에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개성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1766년에 그린 〈파교심매도〉는 만년의 전형적인 남종화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768년 말년에 그린 〈촉잔도〉는 그가 영향받은 남·북종 대가들의 화법을 종합한 대작으로
송나라 때 화원화가인 이당(李唐)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부벽준법 등에서 이당의 필법이 엿보이나 피마준법 등 남종화풍도 겸용하고 있음이 눈에 띄며 화의는 남종화에 가깝다.
〈금강산경도 金剛山景圖〉·〈한양근경도 漢陽近景圖〉등의 작품 및 〈명경대〉·〈만폭동〉 등 금강산그림과 서울주변을 그린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가 전하는데 화법은 각이 진 먹선, 부벽준 등 자신의 필법이 강하게 눈에 띄어 동국진경다운 맛은 적다.
또 그의 도석인물화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구사되었고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로서 〈하마선인도 蝦蟆仙人圖〉 등은 능숙한 화경(畵境)을 느끼게 한다.
사군자 역시 사의(寫意)에 치우치고 대담한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대한
강세황의 화평(畵評)에 의하면 화훼초충을 가장 잘 하였고 영모·산수 순으로 잘 그렸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부드럽고 밝은 채색의 화훼초충과 영모화들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