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
김현회 | '풀백 유망주' 박규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풀백 유망주' 박규선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 축구선수가 있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어린 나이에 성인 국가대표 팀에 발탁되기도 했던 그는 이영표의 뒤를 이을 왼쪽 풀백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다. 2004년 국내파 위주로 구성된 한국이 주전이 대거 나선 독일을 제압할 때도 그는 그 경기장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선수가 우리의 눈에서 사라졌다. 아마 해외 어딘가에서 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그라운드에서 펄펄 날고 있어야 할 이 선수는 지금 그라운드를 떠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박규선에 관한 이야기다. ‘흑규선’이라는 별명으로도 우리에게 친근했던 박규선은 왜 28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을까. 박규선을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직접 만나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물었다.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직접 만난 박규선은 그 동안의 힘들었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천수와 경쟁하던 서울체고의 박규선
“너희 학교에서 가장 공 잘 차는 애들 스무 명 뽑아와 봐.” 부양초등학교 축구부 코치가 박규선이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말했다. 육상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던 박규선은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당연히 이 스무 명 안에 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원정경기에서 박규선은 축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또래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고 축구부 코치의 마음에 쏙 들었다. “너 축구 해보지 않을래?” 부모님이 반대를 했지만 박규선은 축구가 너무 좋았다. “네. 축구 할래요. 축구가 너무 좋아요.” 결국 일주일 동안 부모님을 조른 끝에 그는 부양초등학교로 전학을 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축구를 통해 구리중학교에 진학한 박규선은 구리고등학교에서 서울체고로 전학을 가면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박규선은 고등학교 시절 대단히 빠른 선수는 아니었다. 그저 또래 운동선수와 비교하면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서울체고에 전학한 뒤 스피드가 일취월장했다. “체육고등학교여서 우리가 그라운드에서 훈련하고 있으면 육상부 친구들은 트랙에서 뛰고 있었거든요. 자세히 보니까 걔네들하고 우리하고 뛰는 폼이 다른 거예요. 스피드를 키우기 위해 집중적으로 연구를 한 건 아니었고 항상 트랙에서 훈련하는 그 친구들을 보고 폼을 교정해 봤죠.” 당시만 해도 100m를 13초에 뛰던 박규선은 무려 2초나 단축해 11초에 100m 주파하는 선수가 됐다. 학교에는 이런 박규선을 향한 헛소문이 돌기도 했다. “친구 중에 육상을 하다가 축구로 전향한 애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게 저인 줄 알더라고요.”
스피드가 살아나면서 박규선은 고등학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선수가 됐다.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는 등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는 ‘고교 최강’ 부평고의 이천수와 최태욱, 박용호 등이 유명할 때였다. 자동적으로 부평고라고 하면 이들의 이름이 먼저 튀어 나오던 시절이었다.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서울체고는 당연히 ‘박규선의 팀’이었다. 박규선은 이천수와 최태욱, 박용호 등 이미 고등학교 수준을 뛰어 넘었다는 세 명과 싸워야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열린 대회에서 부평고를 만난 서울체고는 열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3-3 무승부를 거두며 비록 패했지만 승부차기까지 가는 선전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서울체고의 전술은 단순했다. 이천수와 최태욱을 틀어 막고 최전방에 있는 박규선 혼자 해결하는 전술이었다.
울산에서 뛰던 당시 박규선의 모습. 박규선은 울산에서 치른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사진=연합뉴스)
K리그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쏘아 올리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는 여러 축구 명문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고려대에서 박규선 스카우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고려대에서 그랬어요. ‘좋은 선수가 이번에 다 입학한다. 차범근 감독님 아들도 올 예정이다. 너도 우리와 함께 하자.’ 저도 고려대에 가고 싶었는데 우리 감독님께서 일찍 프로에 진출해 부딪혀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울산현대와 안양LG 등 K리그 팀에서도 박규선을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울산의 영입 의지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당대 최강’ 부평고를 상대로 혼자 적진을 헤집고 다니는 박규선을 본 울산은 마음을 굳혔다. 당시만 하더라도 연고 지명으로 선수를 영입할 수 있던 시기였는데 울산은 박규선을 영입하기 위해 연고지에서 떨어진 서울체고를 연고팀으로 선정할 정도였다. 박규선은 고등학교 무대를 평정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울산현대에 입단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2000년 울산 유니폼을 입은 그는 3월 19일 전남드래곤즈와의 개막전을 벤치에서 지켜봤다. 난타전이 펼쳐졌다. 후반 초반까지 2-2로 팽팽한 균형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때 고재욱 감독이 큰 결단을 내렸다. “규선이 준비시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를 개막전이라는 큰 경기에 투입한 것이다. 박규선은 후반 17분 K리그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박규선은 열심히 뛰어다녔고 양 팀은 3-3으로 90분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K리그는 재미를 위해 어떻게든 승패를 가리는 방식을 채택해 연장전은 물론 승부차기까지 이어가는 게 규정이었다. 곧바로 연장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연장 전반이 끝나기 직전 박규선이 일을 냈다. 빅토르의 패스를 받은 박규선은 하프라인에서부터 드리블 돌파로 치고 나가 전남 골키퍼 박동우까지 제치는 여유를 부리며 결승골을 뽑아낸 것이다.
이제 막 K리그 무대에 입성한 박규선은 아무 것도 모르는 신인이었다. “골을 넣었는데 경기장이 너무 조용한 거예요. 원래 골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막 환호를 해야 하는데 이상하다 싶었죠. 혼자 파울인줄 알고 4~5초 동안 멍하니 있었어요. 알고 보니 원정경기여서 전남 홈 관중이 조용한 거였어요.” 그 정도로 K리그에 대해 잘 몰랐던 신인이 데뷔전에서 극적인 데뷔골을 뽑아내는 사고를 친 것이었다. 박규선은 프로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승리 수당으로 숙소의 자기 방에 텔레비전도 사고 비디오 플레이어도 샀다. 모든 게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하프라인에서부터 치고 달렸는데 아무도 저를 못 쫓아 왔잖아요. ‘K리그가 생각보다 쉽네’라고 느꼈죠.” 박규선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이때 뿐이었다. 박규선은 곧바로 이어진 성남과의 두 번째 경기에 교체 출전해 2분 만에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코너킥 상황에서 슈팅을 지체하다가 공을 빼앗겨 역습으로 골을 허용한 것이었다.
박규선은 태극마크를 달고도 많은 경기에 나서며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사진=연합뉴스)
잊지 못할 A매치 데뷔전에서의 승리
두 번째 경기에서 실수를 한 박규선은 이후 급격한 슬럼프에 빠졌다. 이후 줄곧 교체 멤버로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당시 울산은 연패를 거듭하며 최악의 분위기를 맞았고 박규선은 자신감을 잃었다. “제가 봐도 정말 이런 플레이를 용납할 수 없는데 감독님은 저를 자꾸 기용하는 거에요. 형들한테도 엄청 눈치가 보였죠.” 첫 시즌을 마친 그는 이듬해 시즌을 준비하면서 큰 모험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울산 강영철 수석코치가 박규선에게 파격적인 변신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규선이 너는 체력도 좋고 빠르니까 사이드백으로 전환하는 게 어때?” 공격수로서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던 박규선은 강영철 수석코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느 위치에 있건 내가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죠. 그리고 공격수를 할 때는 항상 상대를 등지고 있었는데 공을 잡고 앞을 바라볼 수 있으니 편하더라고요. 사이드백이 참 저하고 잘 맞는 것 같았어요.”
2001년 25경기에 나서며 주전을 굳힌 박규선은 2002년에도 26경기에 출장해 완벽한 변신에 성공했다. 김현석과 유상철, 이천수, 김정우, 도도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울산에서 박규선도 어느덧 주전으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박규선은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도 나설 수 있었다. 특히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에서는 조재진, 김정우, 이천수, 김동진, 박용호, 김영광 등과 함께 6전 전승 전경기 무실점이라는 위대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이영표와 송종국이 버티는 대표팀 측면도 세대교체가 이뤄진다면 박규선의 몫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런 기대는 서서히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2004년 12월 한국과 독일의 평가전을 앞두고 발표된 대표팀 명단에는 당당히 박규선의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비록 해외파가 대거 빠진 대표팀이었지만 박규선은 행복했다.
경기 하루 전 조 본프레레 감독이 그를 불렀다.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을 거닐며 본프레레 감독이 말했다. “너는 오른쪽하고 왼쪽 중에 어느 측면에 서는 게 더 편하니?” 박규선이 대답했다. “왼쪽이요.” 그러자 본프레레 감독이 박규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왼쪽에는 아무래도 (김)동진이가 서야 할 것 같아. 그러면 너는 경기에 나설 수가 없잖아. 오른쪽에서 뛰는 건 어때?” 박규선은 자신 있었다. “오른쪽도 괜찮아요. 내일 보여드릴게요.” 본프레레 감독은 씩 웃더니 박규선에게 특명을 내렸다. “내일 경기에 네 쪽에서 격돌한 독일 선수가 신인인데 무척 잘해. 매경기 득점하고 있어. 막을 수 있겠어?” 박규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경기에 나선 박규선은 본프레레 감독이 말한 그 선수를 꽁꽁 묶었다. 박규선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선수가 슈바인슈타이거였어요.” 한국은 이날 경기에서 올리버 칸과 미하엘 발락, 루카스 포돌스키 등이 포진한 독일을 결국 3-1로 꺾었다.
지난 2005년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북한전에 나선 박규선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인생을 바꿔 놓은 뜻하지 않은 부상
어느덧 한국 축구 풀백 계보를 이을 것이라면서 주목받고 있는 박규선을 전북에서 원했다. 공격적인 박규선의 경기 운영과 조윤환 감독의 전북 축구는 색깔이 잘 맞았다. 박규선은 2004년 울산에서 전북으로 이적하게 됐고 여기에서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바로 ‘축구 천재’라 불리는 윤정환 덕분이었다. “(윤)정환이 형이 있어서 엄청 편했어요. 그 형이 주로 미드필드 왼쪽에 위치했는데 제가 측면을 침투하면서 ‘정환이 형’하고 소리를 지르면 자세가 제대로 돼 있지 않건 컨트롤이 제대로 돼 있지 않건 어떻게든 저한테 공을 찔러주더라고요. 저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수였죠. 정말 편하고 재미있게 축구를 했던 시기죠.” 당시 전북은 윤정환과 박규선만 막으면 이긴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왼쪽 측면이 강했다. 이후 박규선은 2006년 울산으로 컴백했다가 이듬해 부산아이파크로 이적해 팀의 측면을 책임지는 든든한 선수가 됐다. J리그 시미즈에서도 박규선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원했지만 구단의 반대로 결국 계약서까지 쓰고도 이적이 무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군대였다. 만 27세이던 2008년에 상무에 입대하기로 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마지막에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매일 집에 오면 한숨만 쉬었죠. 다들 아시는 것처럼 군입대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했어요. 당연히 부산에서 시즌 막판에는 부진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2008년 상무에 입대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오히려 군대에서는 마음이 편했어요. 그동안 느꼈던 승리에 대한 부담을 떠나 축구를 즐길 수 있었죠. 부대 내에서는 별로 할 게 없잖아요. 밤이면 혼자 개인 운동도 많이 했어요.” 상무에서 다시 최전방 공격수로 보직을 변경한 박규선은 행복하게 축구를 하고 있었고 제대 후 그를 원하는 K리그 팀도 몇 군데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하고 가장 밝은 미래를 그리던 이때 박규선에게 시련이 찾아오고 말았다. 2008년 11월 9일이었다.
상무와 대전의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두 팀 모두 하위권에 쳐져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비중 있는 경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날 박규선은 유난히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공을 잡으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컨트롤이 안 됐고 슈팅을 때릴 기회에서는 공을 빠트렸다. 이강조 감독도 전반이었지만 유독 경기력이 좋지 않은 박규선의 교체 아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전반이 끝나갈 무렵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왼발로 중심을 잡고 오른발로 공을 치고 나가려던 순간 상대팀 선수의 태클이 들어왔고 이 태클은 공을 걷어내면서 박규선의 디딤발이었던 왼발로 쭉 밀려 들어왔다. 박규선은 그대로 쓰러져 잠시 고통스러워하다가 곧바로 오른발로 균형을 잡으며 일어났다. 그저 타박상 정도인줄 알았다. 하지만 박규선은 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왼쪽 발목이 덜렁덜렁 거릴 정도로 심하게 부러진 것이었다. 박규선은 그대로 다시 그라운드에 누웠다.
박규선은 상무에서 인생이 바뀔만한 큰 부상을 당했다. (사진=연합뉴스)
다섯 번이나 수술대 위에 오른 박규선
동료들은 큰 부상인 줄 모르고 있었는데 팀 동료 김명중이 다가왔다. “형, 어디 다쳤어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말투였다. 그러다 왼쪽 발목을 보더니 김명중이 기겁을 했다. “구급차. 빨리 구급차 준비해줘요.” 박규선은 전반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박규선은 당시를 회상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너무 부상이 심해서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뼈가 어긋날 정도였죠. 일부러 한 거친 태클은 아니었어요. 제가 운이 없었던 거에요.” 박규선은 대전 인근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다. 다행이 큰 부상은 아니라고 했다. 뼈가 부러졌으니 몇 개월 쉬면서 재활을 하면 금방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다는 게 아쉽고 억울했지만 준비만 잘하면 다음 시즌 개막전에 맞춰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대전에서 바로 국군체육부대로 올라와 상무와 협약 관계를 맺은 병원을 찾았다. “간단한 수술이라 금방 끝납니다.” 병원에서는 얼마 안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뼈가 완전히 부러진 건 물론 인대도 다 끊어졌고 연골까지 다 나간 상태였다. 마취에서 깬 박규선의 왼쪽 발목은 바깥쪽과 안쪽, 성한 곳이 없었다. 그렇게 세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지낸 박규선은 자꾸 뭔가 이상했다. 이쯤 되면 고통이 사라져야 하는데 통증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깁스를 풀고 재활에 매달렸는데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수술을 잘못해서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겼네요.” 결국 박규선은 다시 수술대에 올랐고 6개월 동안 통원치료와 재활을 병행했다. 하지만 통증은 그대로였다. 사타구니의 피부를 발목에 이식하는 수술까지 받았지만 허사였다. 이렇게 1년을 허비하면서 그는 상무 복무 기간 2년을 채우고 제대했다.
“제대하는 날 씁쓸했죠. 입대할 때는 이런 모습으로 제대할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했어요.” 팀 사정이 좋지 않던 원소속팀 부산은 그의 복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목 상태를 본 부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재계약을 포기했다. 박규선은 이때부터 혼자 힘으로 복귀를 준비했다. 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런데 관절경 수술을 받아도 변한 게 없었다. 다시 병원에 가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수술을 잘못해서 발목이 삐뚤어져 있어요. 안에는 수술 실패로 뼛조각이 돌아다니네요.” 박규선은 왼쪽 발목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이 틀어진 뼈를 부러트려서 제대로 자리 잡고 안에 있는 뼛조각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런 대수술을 받으면 회복까지는 1~2년이 걸려요. 그래도 수술을 하시겠어요?” 박규선은 고민했다. “그거는 축구선수로서는 사형선고잖아요. 그냥 뼛조각만 제거하고 재활에 매달려 볼게요.” 박규선의 왼쪽 발목에서는 새끼 손톱만한 뼛조각이 무려 다섯 개나 나왔다.
2006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를 앞두고 김두현, 김진용, 박규선, 곽희주 등이 산책에 나선 모습. (사진=연합뉴스)
박규선이 택한 제2의 축구인생
수술대에 무려 다섯 번이나 올랐다. “그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수술일거야. 이 수술만 끝나면 금방 일어나서 뛸 수 있어. 빨리 복귀하자’는 생각만 했어요.” 하지만 박규선은 다섯 번째 수술을 마치고 도저히 재활로는 해결을 할 수가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중 한 의사로부터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다. 의사는 박규선의 상태를 보더니 경악했다. “이 정도 상태라면 축구는커녕 일반 생활도 힘든 상황입니다. 선수 생활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아요.” 박규선은 믿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펑펑 눈물을 쏟았다. 가정 문제까지 겹친 상황에서 가뜩이나 힘든데 머리 속이 하얘졌다. “집에서 혼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가장 즐거웠던 시절도 가장 불행했던 시절도 다 축구 때문인데 이걸 못하게 되면 인생의 전부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내가 나이를 먹고 절름발이가 되거나 발이 하나밖에 없어도 됩니다. 프로선수가 아니어도 좋으니 제발 축구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펑펑 울면서 기도했어요.”
2년 동안 다섯 번이나 수술대에 오르며 고통스러워하던 박규선은 마지막 수술을 하고 3개월 동안 재활에 매달렸지만 결국 통증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성대한 은퇴식은커녕 기사 한 줄 나지도 않고 그렇게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방황하던 2011년 고등학교 시절 은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규선아. 너 중학교 때 축구 가르치셨던 이상래 감독님 알지? 그분이 지금 한남대에서 감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머리도 식힐 겸 운동 좀 같이 할 생각있니?” 박규선은 축구가 너무 그리웠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로 중학교 시절 스승을 만나러 갔다. 정상적인 발목은 아니었지만 무리하지 않고 한남대 선수들과 가벽게 축구를 했다. 그런데 학교 관계자가 그런 박규선을 알아봤다. “저 친구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은데. 국가대표 아니었어? 왜 여기에서 축구를 하고 있어?” 나중에 사정을 듣고 나서 이 관계자는 곧바로 총장실에 찾아가 박규선을 축구부 코치로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박규선은 한남대에서 딱 2주 만에 정식 코치가 됐다. 고민을 했지만 언제든 몸이 좋아지면 다시 K리그에 갈 생각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형”이라고 부르던 선수들이 어느덧 호칭을 “코치님”으로 바꿨다. 박규선 코치는 2011년 팀을 U리그 무패우승으로 이끌더니 지난해에는 전국체전 우승까지 일궈냈다. 이상래 감독과 함께 K리그 선수들도 여럿 배출하고 있다. 연제민(수원)과 김서준(울산), 박정민(광주) 등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박규선 코치는 특히 한 선수의 진로를 보며 옛 추억에 젖기도 했다. 한남대 제자 이민수가 한 J리그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이다. 직접 한남대를 찾은 이 J리그 구단 강화부장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10년 전 갈 수 있었지만 결국 구단이 붙잡는 바람에 가지 못했던 시미즈였기 때문이다. 박규선 코치는 시미즈 강화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비록 가지 못했지만 우리 제자는 꼭 가서 성공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세요.”
박규선은 현역 선수로서의 축구 인생은 마감했지만 이제 지도자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사진=연합뉴스)
“축구라는 끈을 잡고 있어 행복합니다”
지금도 몇몇 K리그 클래식 구단에서 박규선의 영입을 원하고 있다. “와서 10~20분 만이라도 뛰어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 구단과는 선수단 합류 일정까지 조율할 만큼 진척이 있었지만 결국 박규선 코치는 한남대 제자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제자들과 그라운드에서 즐겁게 축구를 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현역 복귀를 하기에는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는 것도 이유였다. “지금도 K리그 경기를 직접 보지 못하겠어요. 제자가 뛰는 경기까지 포함해 은퇴해서 딱 세 경기 봤어요. K리그 경기장에 가면 너무 뛰고 싶거든요. 지금도 복귀에 대해 항상 생각하지만 그냥 마음만 있는 정도죠. 지금도 집에 예전 유니폼과 축구화가 다 그대로 있는데 가끔 꺼내보면 마음이 좋지 않아요. 스무 살에 울산에 입단했을 때의 그 유니폼이 특히 가장 애착이 가죠.”
박규선 코치는 이제 지도자로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한남대가 좋은 선수를 많이 배출하고 우리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들을 지도하고 싶어요. 지도자로도 다시 한 번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비록 현역 선수는 아니지만 축구를 아예 놓을 뻔하다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이렇게 축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 싶어요. 저는 항상 수요일 저녁 7시나 일요일 오후 3시면 K리그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는 경기장에 내가 서 있는 소중함을 잘 몰랐어요. 지금 와서 보니 그 자리가 정말 소중한 자리였어요. 많은 K리그 선수들이 그 소중함을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