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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수필의 언어 5
2. 문 장
라. 시제 표현의 실제
나는 그 짧은 기사를 읽었다고 할 수 a없다. 거의 번개 같은 속도로 나의 눈이 그 위를 훑었고 읽기도 전에 그 내용을 파악했다는 편이 b옳다.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의 이름이 들어왔고 그러자마자 나의 심장이 미친 듯 c뛰었다. 그 뛰는 심장으로 한참을 망연히 앉아 있다가 나는 또 놀란 듯이 주변을 d훑어보았다. 자료실 안의 이쪽 칸은 늘 그렇듯이 거의 비어 e있다.
최윤, [회색 눈사람]
이 글의 시제는, a현재, b현재, c과거, d과거, e현재로 이동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기술한 자동기술법도 아니다. 객관적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시제가 수시고 바뀌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상황 전달에도 실패하였다. 이 글의 시제는 모두 과거로 통일하는 것이 옳다. 시제를 통일 시키면, 일관성을 지킨 글이 되어 독자가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제 일치는 각 문장 속에서 결정되게 마련이지만, 장르에 따라 기본 시제가 있다. 시와 희곡은 현재 시제가 기본이다. 소설은 과거 시제가 기본이다. 소설의 모태가 설화이고 설화는 모두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수필의 기본 시제는 두 가지다. 추상수필과 구상수필, 그리고 서정 수필일 경우는 시처럼 현재 시제가 기본이지만, 서사수필일 경우는 기본 시제가 소설처럼 과거 시제이다. 예를 들어 이양하의 <나무>나 김진섭의 <백설부>는 모두 현재이다. 그러나 피천득의 <인연>이나, 김소운의 <도마소리>같은 서사 수필은 과거 시제이다.
그러나 심리주의 소설과 같이 심리적 갈등을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으로 쓸 때는 매 순간 변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 현재, 미래가 수시로 교체될 수 있다.
‘사실의 세계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분명해야 하며,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다음 글에서 잘못된 시제를 바로잡아 본다.
눈이 펑펑 오는 a날이었다. 역두에는 유치진 내외분-그리고 몇몇 친구가 전송을 b나왔다. 영하 사십 도의 북만으로 간다는 청마가, 외투 한 벌 없는 ‘세비로’ c바람이다. 당자야 태연자약일지 모르나 곁에서 보는 내 심정이 편하지 d못하다. 더구나 전송 나온 이 중에는 기름이 흐르는 낙타 오버를 입은 이가 e있었다.
내 외투를 벗어 주면 f그만이다. 내 잠재의식은 몇 번이고 내 외투를 내가 벗기는 g기분이다. 그런데 정작 미안한 노릇이 나도 외투란 것을 입고 있지 h않았다.
발차 시간이 i가까웠다.
내 전신을 둘러보아야 청마에게 줄 아무것도 내게는 없고, 포켓에 꽂힌 만년필 한 자루가 손에 만져질 j뿐이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프랑스제 ‘콩크링’-요즈음 ‘파카’니 ‘오터맨’ 따위는 명함도 못 내놓을 최고급 k만년필이다. 일본 안에도 열 자루가 없다고 l했다.
“만년필 가졌나?” - 불쑥 묻는 내말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청마는 제 주머니에서 흰 촉이 달린 싸구려 만년필을 끄집어내어 나를 m준다. 그것을 받아서 내 주머니에 꽂고 ‘콩크링’을 청마 손에 쥐어 n주었다. 만년필은 외투도 방한구도 아니련만, 그 때 내 심정으로는, 내가 입은 외투 한 벌을 청마에게 입혀 보낸다는 그런 o기분이었다.
김소운, [외투]
각 문장의 서술어의 시제를 보면 모든 사건이 발화시 이전에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a과거, b과거, c현재, d현재, e과거, f현재, g현재, h과거, i과거, j현재, k현재, l과거, m현재, n과거, o과거로 되어 있다. 열다섯 개의 서술어의 시제가 수시로 바뀐다. 아무 이유가 없다. 시제를 일치시켜야 한다. c, d, g, j, k, m 모두를 과거 시제로 고치고, 다만 f만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현재로 두는 것이 효과적이다.
우리말의 시제는 영어나 독일어 같은 외국어에 비해 쉬운 편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정복할 수 있다. 시제 일치는 수필뿐만 아니라 모든 문장이 지켜야 하는 우리말의 규칙이다. 시제는 문장의 일관성에 관계된다. 모국어 사랑이 별다른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말 규칙을 잘 지키는 일이다.
사. 번역투의 문장
어떤 나라의 말이든 이웃 나라의 말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를 계속한다. 우리말도 중국어와 일본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들과 이러한 관계를 가져왔다. 특히 해방 이후에는 서양의 영향이 컸다. 외국어는 우리말 어휘뿐만 아니라 문장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이 많아졌다. 이미 우리말로 체체질화된 것은 굳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더라도, 우리말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 나가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피동 표현’의 남용이다. 우리말에 피동 표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피동 표현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우리말의 특성이다. 영어에서 피동형으로 표현하는 것도 우리말에서는 능동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의 이런 특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피동형을 마구 쓰면 어색하고 서툰 번역투의 문장이 되고 만다. 다음 밑줄 친 부분을 본다.
A 북데기만 요란했지 실은 느슨하게 a묶어진 이불 보따리였다. (중략) 느닷없이 그는 자기 학력을 밝히더니만 대문을 열고는 보안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 저 편을 자진해서 b삼켜져 버렸다.
윤홍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B 근데 일단 잠자리에 들면 몸이 막 사려지고 안 되더라구.
구효서, <그녀의 야윈 뺨>
C 피부가 당겨지며 아팠을 텐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한 강, <그대의 차가운 손>
D 그 사람으로서 무심중에 나와질 말, 말에 그 사람의 체취, 성미의 냄새, 신분의 냄새, 그 사람의 때가 묻은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말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일 것이다.
이태준, <문장 강화>
A의 a는 번역투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묶은’이라고 능동형을 쓴다. b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삼켜 버렸다’고 한다. 고친 다음 이 문장을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
북데기만 요란했지 실은 느슨하게 a묶은 이불 보따리였다. (중략) 느닷없이 그는 자기 학력을 밝히더니만 대문을 열고 나갔다. 보안등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이 그를 b삼켜 버렸다.
B의 ‘사려지고’라는 말은 문법에 어긋나는 말이다. ‘사리다’는 타동사이다. 모든 타동사가 다 피동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피동 접미사 ‘~지다’를 붙인 것은 잘못이다. ‘사려지고’의 주어 ‘몸이’를 목적어 ‘몸을’로 바꾸고, ‘사려지고’는 ‘사려지게’로 한 다음 피동보조동사 ‘되다’를 붙여야 한다.
근데 일단 잠자리에 들면 몸을 막 사리게 되면서 안 되더라구.
C의 ‘당겨지며’도 같은 번역 투이다. ‘당기다’는 타동사로 쓰이기도 하고, 자동사로 쓰이기도 한다. ‘밧줄을 당기다’일 경우는 타동사로 쓰인 경우이고, ‘핏줄이 당기다’일 때는 자동사이다. 위의 경우는 자동사로 쓰면 되는 것을 일부러 타동사로 만든 다음 다시 피동보조 동사 ‘지다’를 결부시켜 번거롭게 자동사를 만들고 있다. 다음과 같이 고친다.
피부가 당기며 아팠을 텐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D의 경우, ‘나와질’은 ‘나올’로 고쳐야 한다. 이건 우리말이 아니다.
현대 우리 글에는 번역투의 문장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우선 피동형의 남용이라도 막았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길은 거창한 구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법을 지키는 일이다.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법정스님
날이 새어 창문을 열자 간밤에 내린 무서리로 온 산천이 허옇게 얼어붙었다. 눈이 내렸는가 착각할 만큼 가지마다 허연 서리로 치장을 했다. 깊은 산골이라 산 아래와는 달리 눈이 오기 전에 연일 무서리가 내린다. 지난가을 푸른 하늘 아래 눈이 부시도록 노란 빛깔을 마음껏 뿜어내던 해바라기는 그새 허리를 꺾고 꽃대가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생기에 넘치던 그 노란 빛깔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칙칙한 갈색으로 변한 채 씨앗을 머금고 있는 꽃대는 말이 없다. 이 해바라기는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를 좋아하는 친구가 사 온 씨앗을 심은 것이다.
추녀가 길어 어둑한 방에 해바라기를 한 송이 놓아두면 어둠이 가시고 환해진다. 식탁에 해바라기를 꽂아 놓으면 찬이 없어도 풍성한 식탁이 된다. 그때 몇 장 찍어 놓은 사진을 꺼내 보니 세월의 무상감이 해일처럼 차오른다. 젊어서 찍은 사진을 영전에 놓아두었을 때의 그런 묘한 감정.
꽃은 무슨 일로 피었다가 지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때가 다하면 생을 마감하듯이, 생명의 질서에서는 꽃이나 사람이 다를 바 없다. 나무들은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겨울이 오면 옷을 벗는다. 꽃은 보는 사람에게 아름다움과 향기와 기쁨을 안겨 준다. 한 송이의 꽃이 메마르고 녹슬기 쉬운 우리들의 일상에 얼마만한 위로와 생기와 기쁨을 주는지, 운치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시로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꽃이 있는 집과 꽃이 없는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질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 현격하다. 길거리에서 꽃을 안고 가는 사람을 보면 그 신분이 어떻든 간에 친밀감이 간다. 그 사람의 꽃다운 마음씨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가면 마중 나온 친지들이 목에 레이 꽃 타래를 걸어준다. 그 향기가 진해 야간 비행에서 내리면 졸음이 활짝 깬다. 그곳 대학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는데, 연단에 올라서자 이 사람 저 사람 줄줄이 올라와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바람에 얼굴까지 가리게 되어 한바탕 크게 웃었다.
요즘 내 오두막에는 산 아래서 꺾어 온 노란 소국 한 다발이 단지에 담겨 은은한 향기를 들려주고, 창가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산수유 한 가지가 오지병에 꽃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런 꽃과 열매가 산방의 조촐한 품격을 거들어 준다. 산수유는 이른 봄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담황색 꽃도 볼 만하지만, 늦가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청랭한 하늘 아래 빨갛게 달려있는 그 열매가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내가 좀 더 한가하고 적적해지면 벼루에 먹을 갈아 이 국화 향기와 산수유 열매가 지켜보는 아래서 무심히 붓장난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해 간다. 뿌리는 대지로부터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그 보상으로 꽃과 열매로써 대지에 되돌려 준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그 생명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순환의 법칙이다. 낮은 밤이 받쳐 주기 때문에 밝고, 밤은 낮이 비워 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어둠을 이룬다.
물질 만능의 덫에 걸린 현대의 우리들은 무지 때문에 지구 곳곳에서 그 우주 질서와 순환의 법칙을 깨뜨리고 있다. 오늘날 심각해지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대지로부터 끊임없이 빼앗기만 하지 아무것도 되돌려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대지는, 서서히 불모의 땅이 되어가면서 죽어 간다. 이 지구가 죽어 가고 있다면 그 안에 있는 인간의 대지도 또한 죽어 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독립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커다란 생명체와 우리 자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웅덩이가 이끼로 무겁게 덮여 썩고 있다면, 그것은 강물과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강은 잠시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지난번 강변의 정자에 갔을 때, 정자 가까이 밤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석양볕에 누릇누릇 물들어가는 그 잎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껏 여기저기에서 밤나무는 많이 보아 왔지만, 정자 곁에 우람하게 서 있는 그 밤나무의 물든 잎처럼 고운 것은 처음이다.
암갈색 가지와 누릇누릇 물든 잎과 푸른 하늘과 석양의 볕이 한데 어울려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누릇누릇 물든 잎이 강바람에 우수수 낙엽으로 지고 있었다, 대지에서 받은 것을 어디에 가두어 두지 않고 그 대지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되돌려 주지 않으면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순환의 질서를 현대인들도 배워야 한다.
땅에 떨어지는 낙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맞이한다. 그것들은 삶 속에 묻혀 지낼 뿐 죽음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때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산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인데,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순간순간 새롭게 발견 되어져야할 훤출한 뜰이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
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간밤에는 온 골 안이 소란스러울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더니, 해가 떠오르자 언제 그랬느냐 싶게 화창하고 온화한 날씨이다. 몇 해나 되었는지 덕지덕지 풀딱지가 엉겨 붙고 누렇게 바래 볼썽사나운 미닫이 창문을 뜯어내고 새로 발랐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조화의 영감'을 연거푸 들으면서 일을 하고 있으니 사는 일이 새삼스레 고마워졌다.
새로 발라 맑고 환해진 창 앞에 앉아 있으니 내 속뜰도 맑고 환해지는 것 같다. 이런 창 앞에 앉아 향기로운 차를 들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충만감이 차오른다, 표정이 덤덤한 집에는 밝은 창을 달아야 금방 생기가 돌고 집이 살아 숨쉰다. 집 자체는 여러 가지 자재로 엮어진 한낱 건축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안에 사람이 살면 비로소 집다운 집이 된다.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모든 것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고,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사람이 그 안에 살아야 집에 훈김이 돌고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온다.
나는 이 오두막에 와 살면서 나 자신을 만나고 되찾게 된 것을 무엇보다도 고맙게 여긴다.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짐을 벗어 버리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홀가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이 순간에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한테는 사슬이 없다. 기억의 사슬도 없고 욕망의 사슬도 없다. 시냇물이 흐르듯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데에 있다.
나는 이 창 아래 앉아 귀를 기울인다.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모은다. 침묵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존재의 뜰이 열린다. 이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고 우리들 자신 또한 그 한 자체다. 그러므로 그 커다란 생명체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을 때 그 원천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서릿바람에 가랑잎들이 휘날리고 있다. 낙엽은 그 근원인 뿌리로 돌아간다. 이 해는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