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휴전선으로 변한 삼팔선
부산에 머물러 이는 정부는 월 십오일 긴급통화조치령을 발표했다. 원 단위를 환으로 바
꾸면서 통화를 백 대 일로 인하했던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조처는 신문들을 장식했고,
사회 일부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돌풍에 휩쓸린 것은 어디까지나 돈 많이 가진 사람들이었
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눈 껌벅거리며 듣는 소식일 뿐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십분의 이로 줄어들어버렸다고 야단들이었고, 빚 쓴 놈만 살판났다고 떠
들었고, 현찰이 아닌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이익이라고 수선을 피웠다.
염상구는 그런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들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채로 재산이 줄어들게 되
었다는 소리만 귀에 담겨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가 갑자기 그의 입에서 '개새기, 십
새끼' 로 둔갑하고 있었다. 그가 화폐개혁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공장을 가진 자기
는 오히려 이익이라는 것을 납득하기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 그는 궁리 끝에 '국부 이승만 대통령 각하' 앞에다 '장하신'이란 말을 붙이
기로 했다. 얼른 떠오르는 말로 '위대하신'을 붙일까 했다가 질겁을 했던 것이다. 그건 '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 동지'에 붙여진 말이었던 것이다. 인공 다음부터 '동무'라는 말은 써
서는 안되는 말이 되었고, 그 대신에 '친구'라는 말로 바뀐 세상에... 그는 간담이 서늘해
졌던 것이다.
염상구는 반대로 죽을상이 되어 있는 것은 현찰신봉자 유주상 같은 사람들이었다.
화폐개혁 바람이 미처 잠들기도 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신문들을 요란하게 뒤덮었다. 소
련 수상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삼월 오륙일자 신문들은 양쪽 끝이 치켜올라간 콧수염 짙은
스탈린의 사진을 큼직큼직하게 실어대며 소련이라는 나라가 곧 무너져내려앉고, 이승만 대
통령이 부르짖는 북진통일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처럼 수선들을 피워대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이용하자는 것이었을까. 한동안 뜸했던 휴전반대 궐기대회가 전국적으로 벌
어지면서 사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른들은 궐기대회에 동원되는 것을 지겨워했고, 조무래
기들은 궐기대회가 마냥 좋았다. 그날은 학교가 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휴전반대 궐기대회'는 유월로 접어들면서 느닷없이 '북진통일 궐기대회'로 바
뀌었다. 궐기대회에 동원된 사람들은 왜 그 명칭이 바뀌게 되었는지 영문을 모른 채 마이
크에서 선창하는 구호를 따라서 외칠 뿐이었다.
유월 십팔일 새벽 김범우는 마산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반공포로 분리수
용으로 그는 마산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김범우는 철조망을 벗어나고 나서 새벽별을 바라보며 거제도에 있는 정하섭을 생각했다.
너는 북쪽으로 가는가. 그래, 가거라. 남쪽에 집을 두고 북쪽으로 가는 것이 어찌 너 혼자뿐
이겠는가. 난 이제 고향으로 간다. 너와의 약속은 꼭 지켜나갈 것이다. 휴전이 언제까지 갈
지 모르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시한부로 멈춘 것일 뿐인 휴전은 우리에게
내일로 남겨진 숙제다. 그건 새로운 분단으로 남겨진 민족의 숙제다. 그 숙제를 가지고 너는
북으로, 나는 남으로 헤어지는 것이다. 그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 휴전은 우리 민족에게 새
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서로 갈라져 살아야 하는 비극적인 시대의 시작 말이다. 그건 새로
운 싸움의 시작이기도 하다. 너와 나는 그 싸움을 위해 함께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닌가. 부디 잘 가거라.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꿋꿋하자꾸나.
김범우는 사흘이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그를 놀라게 할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도 또한 집안식구들을 소스라치게 할 충격을 가지고 있었다. 범준 형님이 인민군 고급군
관으로 돌아왔었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고, 집안식구들은 그의 지팡이 짚은 절룩거
리는 다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부터 알려주었지만 김범우는 그건 아무렇지도 않
게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님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형님은 그의 마음속에 이미
재회를 체념한 동경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형님은 인민군 고급군관으로 돌아온 것이
다. 그것은 거듭된 충격이었다. 형님의 그 행로가 여러 말이 필요하지 않은 역사의 웅변으로
가슴을 쳐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김범우는 생략을 모르는 어머니의 사설조의 이야기에 그만 답답함을 느꼈다.
"입산얼 혔지."
"그담은요?"
"그것이야 워찌 알겄냐. 그간에 수도 웂이 많이 죽었다는디..." 그 동안 많이 늙어버린 어
머니의 말끝을 흐리며 옷고름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마루에 걸터앉은 김범우는 고읍 들녘 저 멀리 보이는 산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
다.
민족독립을 위해 빨치산투쟁을 했을 형님은 이제 민족과 인민해방을 위해 저 산속에서 빨치
산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상진 선배도 물론 함께지. 염 선배가 얼마나 좋아했을
까...
그 뚝심 좋은 실천가, 어렸을 때부터 형님을 그렇게 우러러보더니 결국 형님은 그의 차지
가 되었군. 그는 그만한 자격이 있지. 그런데, 형님이나 염 선배는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
까. 살아 있기나 할까. 살아 있다면 휴전이 목전에 닥친 이 마당에 어찌 하려는 것일까. 빨
치산은 정규군이 아니니까 휴전회담에서 거론될 리가 없다. 정하섭의 말대로 그들은 지하
로 잠적하는 것일까. 글쎄... 잠적하기에는 너무나 노출되어 버린 인물들이 아닐까. 김범우는
불현듯 형님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여 몸 씻거라. 아부님헌테 인사디리러 가야제."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였다. 김범우는 그때서야 자식의 절차가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 그래야지요."
김범우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분꽃이며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같은 여름꽃들이 무성한 화단에 눈길을 주며 목
욕탕으로 걸어갔다. 비로소 오래 간직된 안정감이 되살아나며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을 느
낄 수가 있었다. 그는 앙징스러운 나팔 모양의 분꽃 하나를 따서 입꼬리에다 물었다.
"몸이 많이 상허셨는가요?"
어느새 목욕탕 앞으로 옮겨와 있던 아내가 시어머니 쪽 눈치를 빠르게 살피며 물었다.
"아니오.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거요."
김범우는 그때서야 아내를 제대로 쳐다보며 엷게 웃었다. 아내의 눈이 새롭게 젖어들고
있었다. 김범우는 그 눈에서 소식 없이 헤어져 있었던 날들이 꽤 길었다는 것을 생각해내
고 있었다.
"집안이 다 찌울렀는디, 몸이 성허셔야제라."
아내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내밀었다.
김범우는 무표정하게 옷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내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몸
이 성해서 뭐하게? 기울어진 집안을 일으키게? 이 사람아 정신차리게. 당신이 시집올 때 같
은 시집의 형편은 당신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나헌테 그런 기대 하지 말게. 당신도
앞으로는 고생 좀 하고 살 각오를 해야 해. 그러고 말야, 시집 형편이 이렇게 된 것이 당연
하다는 걸 빨리 깨닫도록 하게.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은 앞으로 남은 세월을 계속 불행하게
살게 돼. 김범우는 목욕탕으로 들어가며 언제인가는 아내에게 해야 될 말을 혼자서 하고 있
었다.
김범우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는데 신경은 또 오른쪽 다리로 쏠려갔다. 내려다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밀어돌렸다. 그러나 또 다리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지고
말았다. 옷을 벗게 될 때마다 되풀이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의지가 지고 마는 싸
움이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에 찍힌 흉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김이 서로 다른 세 개
의 흉터는 언제 보아도 흉측스러웠다. 문신이나 화인처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흉물이었다. 미군의 포탄이 찍어놓은 '포인'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그 흉터들은 더욱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집을 떠난 다음부터 겪었던 일들이 빠르게 떠오
르고 있었다.
그는 생각들을 떼쳐내며 목욕통 안으로 뛰어 들었다. 찬물의 선뜻함이 일시에 온몸을 파고
들며 그 생각들이 다 달아났다. 그는 그 생각들을 더 멀리 쫓기라도 하듯 푸우푸우 소리
내며 낯을 씻어댔다.
시원함이 살 속으로 아련하게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낯을 훔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는 흠칫 놀랐다. 왼쪽 팔뚝에 찍힌 푸르딩딩한 글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건
'반공'이었다. 수용소에서 대한반공청년단에 가입하면서 의무적으로 새겨야 했던 문신이었
다. 놀라긴 뭘 그렇게 놀라나. 앞으로 평생 신원보증서가 돼줄 텐데.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
고 일깨웠다. 휴전이 된 다음의 남쪽사회에서는 그 기분나쁘게 푸른 색깔인 두 개의 글자가
상이군인만큼 당당하게 행세하게 할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상이군인들의 당당하다 못해 횡포에 가까운 행위는 집으로 돌아오는 사흘 동안 여러 곳에
서 목격했던 것이다. 그들은 서너 명씩 패가 되어 닭털에 빨강, 파랑, 노랑물을 들여가지고
누구에게나 사라고 내밀었다. 그걸 사지 않으면 그들은 자기네의 희생을 내세우며 으름짱
을 놓았고, 그래도 사지 않으면 빨갱이 운운하며 욕을 해대기 일쑤였다. 돈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횡포를 어디다 고발할 데
도 없었다. 몸이 성한 자 모두가 그렇듯이 경찰들마저도 그들 앞에서 기가 죽었다. 그들은
국책인 멸공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하나뿐이 몸이 불구가 되었으므로 그 정도의 치외법권은
맘껏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서 아무런 생계대책을 세워주지 않는 한 그들의
행동은 더욱 당당해지고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경찰들도 할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불
구인 그들은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성한 사람들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동시에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범우는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두 개의 글자가 그들 상이군인들과 맞먹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할 거라는 생각에 떨떠름하게 웃었다.
"용감무쌍한 반공포로 여러분, 오늘 영시를 기하여 전국의 각 수용소에서는 이만오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이 석방되어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 각
하의 탁월하신 영도력이 이룩하신 장거요 쾌거인 것입니다. 유엔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만오천명이나 되는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석방시키는 것은 밖으로 세계만방에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공포하는 것이며, 안으로 북괴 김일성 집단에게 자신감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
입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대한을 택함으로써 북괴 공산집단이 얼마
나 사람이 살 수 없는 잔악하고 무도한 집단인가를 세계만방에 백일하에 드러낸 것입니
다. 그 사실을 입증할 반공포로들은 또 남아 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오늘 석방되
지 못한 팔천여 명이 아직 수용소에 남아 있다 그것입니다."
대령은 열렬하게 연설문을 읽어나갔던 것이다.
목욕탕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내리감은 김범우는 가슴팍을 느리게 문지르면서 대령이
역설하던 그 목적이 과연 제대로 달성되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팔천 명까지 합하면 삼만삼천 명이고, 인민군포로는 우선 접어두고 의용군포로만 놓고 따
져보면, 의용군 사십만 중에서 반이 자원이고 반이 강제라고 치고, 후퇴 직적까지 양쪽에서
십만씩이 죽었다고 잡으면 이십만이 남고, 그중에서 반이 후퇴하고 반이 포로가 되고, 아니
지, 의용군포로가 십만까지 되지 않았지. 처음부터 다시, 양쪽에서 십어만씩 죽고, 나머지
십만에서 오만이 후퇴, 오만이 후퇴 포로. 포로 오만을 둘로 나누면 이만오천씩. 강제로 끌
려나간 이만오천 명이 전부 반공포로가 되었다면, 인민군포로 중에서 반공포로가 된 것은
팔천 명.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반반이 아니던가.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되나, 의용군포로 오
만 중에서 고향을 버리고 북쪽으로 간 것이 삼만삼천, 반공포로가 만칠천, 이렇게 되면 의용
군포로에서부터 목적달성에 실패한 게 아닌가. 거기다가 인민군포로 중에서 반공포로가 된
만칠천은 어떤가. 인민군포로의 전체 수와, 북쪽체계의 성립과정에서 계급적 피해를 입었을
사람들과, 반공포로를 만들기 위한 그 온갖 행위들과, 그런 것들을 다 감안해보면 인민군포
로 중에서 반공포로 만칠천이라는 것은 얼마나 하잘것 없는 숫자인가.
김범우는 비로소 반공포로라는 허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며 쓰게 웃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런데, 자신 같은 사람도 자유대한의 체계우월을 입증하는 반공포로가 되고 있으니 더욱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성경찰서 서장실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 참석자는 네 명이었다. 보성경
찰서장 남인태, 벌교경찰서장 권병제, 그리고 두 경찰서 소속의 토벌대장 둘이었다.
"에에, 오늘 회의를 긴급 소집한 건 다름이 아니고,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잔비 토벌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책을 세우기 위해섭니다. 에에, 어차피 휴전협정은 될 것
인데, 잔비들을 산중에 두고 휴전협정을 맞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 휴전협정 전에 잔비
들을 완전 소탕하라, 이것이 정부의 방침인 동시에 도경의 강력한 지십니다. 그래서 본 회
의를 긴급 소집하게 된 것입니다."
남인태는 자못 거드름을 피우며 좌중을 흝어보았다.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권병제였
다.
행정단위의 우위와 지역의 실속이 일치가 안 되어 그전부터 권병제에게 신경을 써왔던 남인
태는 작년말에 공비 일곱을 사살해 도경국장까지 행차하게 된 다음부터 권병제를 더욱 경계
하고 의식하게 되었다. 도경국장이 권병제와 악수를 하며 어깨를 두들겨주던 것을 생각하
며 그는 속이 뒤집어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남인태의 말에 권병제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고, 두 토벌대장은 옹색한 얼굴이 되어 서
로를 쳐다보았다.
"에에, 그 지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라는 목적으로 도경에서는 극비문서를 하달해왔습니
다.
그 극비문서가 바로 이건데, 극비문서라는 걸 유념하고 다 같이 보도록 합시다." 남인태는
길지도 않은 말에 '극비문서'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해가며 서랍에서 종이 한 장
을 꺼내 책상 위에다 펼쳤다. 여덟 개의 눈이 일시에 그 종이 위로 몰렸다.
팔절지 왼쪽 위로는 '적세분포요도'라는 것이 한자로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두 개의 밑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 바로 아래에는 '4268. 6. 30.현재'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 전면에 걸쳐 산들과 지명을 간략하게 표시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는 지리산
을 중심으로 한 전남. 북, 경남의 산악지대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리산 북쪽으로 덕유산,
서북쪽으로 회문산, 남쪽으로 백운산, 서남쪽으로 조계산과 백악산이 여러 가지 모양의 타
원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나 옆에는 다시 네모칸을 두르고, 그 안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무엇인가를 적어 그 옆에는 일일이 아라비아숫자를 표시해놓고 있었다. 그것
들은 지도의 제목이 밝히고 있는 대로 각 빨치산지구들과, 거기에 소속된 부대들과, 그 부
대의 대원들 수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권병제의 눈길은 빠르게 조계산에 가 박혔다. 토란 모양을 한 타원안에는 '53'이라는 숫자
가 표시되어 있었다. 조계산지구에 남아 있는 빨치산들이 모두 쉰세 명이라는 뜻이었다. 그
의 눈길은 그 옆의 네모칸으로 옮겨졌다.
전남서부도당 15, 서부도당 연락부 8명, 모후산지구부대 14, 조계산소지구당 13, 보성군당
3.
그의 눈길은 마지막으로 '보성군당 3'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그 수가 가장 적은 것에 그
는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 여기서부터 다 같이 봅시다."
남인태는 연필 뒤꼭지에 달린 고무로 조계산을 짚었다. 그 연필은 국제적십자사에서 보
낸 구호물자로, 각 학교에 배급되고 있는 필통 네 개쯤을 포개놓은 것만한 종이상자에서 나
온 것이었다. 그 연필은 몸체에 잠자리가 금박으로 찍혀 있는 일본제였다. 그건 국산보다 질
이 월등히 좋은데다, 특히 나무가 풍겨내는 향내가 좋아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
나, 일본이 연필까지 팔아먹어 한반도의 전쟁 덕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보성군당은 셋으로 나와 있소. 이건 천만다행한 일이지
만, 그렇다고 좋아할 건 하나도 없소. 왜냐하면 우리가 이차로 책임져야 할 곳이 이 조계산
지구기 때문이오. 여기를 보시오."
연필 뒤꼭지가 왼쪽 옆에 있는 백아산으로 옮겨갔다.
"이 백아산지구는 서른여섯밖에 안된다. 그것이오. 그러니까 백아산지구를 맡고 있는 화순
이나 곡성경찰서보다 우리는 두 배나 더 할 일이 많다는 결론이오. 장흥 유치지구가 다 깨
지면서 보성군당이 조계산 지구로 붙었으니 우리 책임도 유치지구에서 조계산지구로 따라
서 옮겨질 수밖에 없소. 그리고, 우리는 순천경찰서한테 책임을 미룰 수도 없소. 왜냐하면
말이오. 여길 보시오."
연필 뒤꼭지가 조계산의 오른쪽 옆으로 옮겨가 백운산을 짚었다.
"이 백운산이 삼백십칠 명이나 된다 그것이오. 그러니 순천경찰서에서는 조계산지구보다
백운산지구를 치느라고 정신이 없게 생겼소."
"닌장맞을, 광양경찰서에서넌 밥묵고 하품만 허고 앉었간디 요리 못자리판얼 맹글어놓고
있을께라?"
보성경찰서 토벌대장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남인태는 그만 깜짝 놀랐다. 그 소리가
너무 크기도 했지만, 그리고 쫓겨갔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끔찍스럽게 떠오른 탓이었다.
"토벌대장, 좀 점잖게 하시오. 여긴 총 쏴대는 산중이 아니고 회의장이오, 회의장." 남인
태가 토벌대장을 꼬나보았다.
"야아, 조심허겄구만요."
어깨 벌어진 젊은 토벌대장이 고개를 꾸뻑했다.
"그런데 이거... 우리 전남이 사백육 명으로 지리산보다 많군요." 권병제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맞소, 바로 그 점이 문제요. 지리산이 삼백칠십일 명으로, 그건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경
남도당과 이현상의 남부군이 합해진 게 아니냔 말이오. 그러니 우리 전남은 두 개의 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셈이고, 여기를 보시오, 전북의 회문산과 덕유산을 합해봤자, 회문산 구
십팔에다가 덕유산이 백이십칠이니까 가설랑은에..."
"이백이십오 명이오."
권병제의 계산이었다. 남인태는 비위가 확 상하고 말았다. 그러나 감정을 꾹 누르며 얼른
받아넘겼다.
"맞소, 이백이십오 명. 그러니 전북에 비해서도 두 배가 된다 그것이오." "그런데 말입니
다, 전남 숫자가 더 늘어나는데요. 여기 지리산에 구례군당이 서른일곱 명이나 끼여 있어
요. 그럼 우리 전남이... 사백사십삼 명이 되는 겁니다." 권 서장이 지리산에 해당되는 네모
칸 안에서 맨 끝의 구례둔당을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이자식 이거, 수가 늘어나서 좋다는 거야, 뭐야! 남인태는 울화통이 치밀어올랐다. 그래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바로 그거요. 우리 전남은 좋은 것은 일등을 못하고 못된 것만 일등을 하고 있소. 그러
니 정부에서도 좋아할 리가 없고, 도경에서도 난리가 난 것이오. 빨갱이놈들이 이렇게 많다
는 건 도경국장님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게 아니고 뭣이겠소. 그러니까 도경국장님이 하루
빨리 소탕을 끝내라고 노발대발이시고, 이렇게 긴급명령이 떨어지고 난리요. 토벌대장들, 앞
으로 어떻게 할 건지 말들을 해보시오."
남인태의 울화는 엉뚱하게 두 토벌대장을 향해 터지고 있었다.
"그, 금메요, 이적지 혀온 것맨치로 열성으로 혀야제 무신 똑별난 수가 있겄는가요." 보
성경찰서 토벌대장이 얼버무렸다.
"근디, 종우 우에 요리 딱 적어논께 숫자가 훤허게 뵈는디, 정작 산으로 잡으로 들어가보
먼 그 잡녀러 새끼덜이 그 많은 골짝골짝 워디에 쑤셔박혔는지 알 수가 웂는 일인디, 똑
만성리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바늘 하난 찾는 격이구만이라."
벌교경찰서 토벌대장이 남다른 기운이 뭉쳐진 것처럼 보이는 짧고 굵은 목을 두어 번 꺾
어돌리며 마땅찮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무책임한 소리들을 듣자는 게 아니오. 우리 군의 두 경찰서가 특히 책임이 무거운
건 뭔지 아시오? 거 염상진이나 하대치 같은 놈들이 다 우리 군 출신이기 때문이오. 그 두
놈만 잡아없애도 그 졸개들 잡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냐 그것이오." 남인태는 추긍하듯이
두 토벌대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말이야 영측웂이 맞제라. 근디, 염상진이야 정해진 자리가 웂이 지멋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허고 댕긴께 잡든 쥑이든 워쩌크름 허기가 영판 에롭고, 하대치야 조계산지구에
발얼 붙이고 있기넌 혀도 몸이 워찌크름 날래고 산얼 빠삭허게 뀌든지 무신 씨언헌 방도가
웂구만이라."
그들이 벌교 출신이라 책임을 느낀다는 듯 벌교경찰서 토벌대장이 말했다.
"내 생각으론 말입니다," 권병제는 남인태에게 말머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먼저 이렇게
입을 열고는, "잔비들을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는건 정부나, 도경이나, 일선에 있는 우리나
다 뜻이 같을 것입니다. 이번 명령하달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토벌에 박차를 가할 것을
각오하고, 그 효과적인 방법은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는 별
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는 회의를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에에, 중요한 문제는 말이오, 휴전협정을 앞둔 이 마당에 잔비가 천명 이상이나 남아 있
다는 것만이 아닌 것이오. 문제는, 이 극비문서에도 나타나지 않은 잔비들이 또 있을 거라
는 점이오. 또, 이 잔비들이 작년 이후로 계속해서 지하로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는 안될 것이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할 것은 두 가지요. 첫째, 양쪽 토벌대는 토
벌사령부의 합동작전계획과는 별개로 매일 잔비토벌을 실시한다. 둘째, 잔비들의 지하침투
를 봉쇄하기 위해 금일부터 야간비상경계에 들어간다. 이상이오. 다른 할말이 있으면 말들
하시오." 남인태는 좌중을 훑어보았다. 세 사람은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좋소, 회의를 이것으로 끝내겠소."
일천구백오십삼년 칠월 이십칠일, 마침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만 삼 년
일 개월 이 일 만에 총소리가 멈추게 되었다. 따라서 일천구백사십오년 팔월 십오일 해방과
동시에 미,소의 합의로 그어진 직선의 삼팔선은 꾸불꾸불한 곡선의 휴전선으로 변했다. 그
난해한 곡선은 '전쟁이 끝난 선'이 아니라 '전쟁을 쉬는 선'이란 뜻이었다. 대부분의 사람
들은 그 구체적인 차이를 잘 모른 채 그저 '전쟁이 끝났다'고 했다.
"근디, 그간에 죽은 목심덜이 징허게 많을 것인디. 다 을매나 될랑고?" "징글징글허게 많
을 것인디, 고것을 누가 무신 재주로 다 알겄어." 맞는 말이었다. 그 수를 자세하게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가고, 날이 지나가면서 대충 짐작하는 숫
자가 나오게 될 터였다.
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신문들은 평양방송이 팔월칠일에 발표한 소식을 전
하고 있었다. 박헌영 외에 이승엽, 이강국, 임화, 설정식 등 열두 사람에 대한 숙청이었다.
재판을 아직 받지 않은 사람은 박헌영 하나였다. 나머지 열두 명은 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
되어 있었다.
이승엽, 조일명, 임화, 이강국, 박승원, 배철, 백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은 사형.
윤순달은 징역 십오 년.
이원조는 징역 십이 년.
그들의 죄상은 첫째, 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둘째,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 약
화, 음모와 테러, 학살행위. 셋째,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였다.
이 소식은 며칠이 지나 각 지구의 신문을 통해 모든 빨치산들에게 전해졌다.
그 신문을 보고 이해룡은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고 말았다.
"소장 동지, 소장 동지, 이것 좀 보십시오. 결국 이럴 줄 알았습니다. 보십시오, 그때 구
십사호 결정서에서 모든 잘못을 남선 단체들한테 덮어씌웠을 때 저는 벌써 이런 결과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당이 종파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나 소장 동
지의 면전이라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휴전이 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남로당계만 쏙 뽑아 이 꼴을 만든단 말입니까. 이래도 당을 믿
어야 합니까!" 눈에 불을 켠 이해룡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범준은 느리게 눈을 올려떴
다.
"이 동지, 그때 내가 이 동지한테 했던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소. 이 동지가 할말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털어놔보시오. 어떠한 내용이든 정식 토론으
로 접수하겠소."
김범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예, 할말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 남선 단체들이 모든 걸 잘못했다고 했을 때 솔직하게 말
해 분하고 억울했고, 너무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럼 북선 단체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
인데, 당이 어찌 그리 편파적인 결정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남로당과
북로당은 벌써 오래 전에 합당을 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오로지 조선로동
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철통같이 믿었고, 오로지 조선로동당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투쟁을 바쳤습니다. 남로당의 잔재를 일소하기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인공이 시작되고 멋모르는 사람들이 '박헌영 동지 만세'를 부를 때 저나 모든 당원들은
그런 행위를 철저히 막으며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게 했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열심히
지도하고 학습시켰습니다. 그리고 북선 동무들이 갖는 우월감과 자만으로 많은 일들이 벌
어졌습니다. 그러나 남선 동무들은 충돌을 피하고 좋게 해결하려고 많이들 참고 노력해왔
습니다. 그런데 당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남로당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 투쟁해야 합니까. 당한테 버림을 받았으니 이제 와서 개들의 세상으로 손을
들고 내려가야 하겠습니까? 말씀 좀 해보십시오, 소장 동지!" 이해룡의 충혈된 눈에는 눈물
이 번지고 있었다.
"좋소, 이 동지의 말 잘 들었소. 이 동지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오. 그런데,
내 말을 하기 전에 내가 이 동지한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소." "예, 말씀하십시오."
이해룡은 그 눈길에 밀리는 기분으로 말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이 동지의 감정을 누르고, 이 동지의 생각도 접어놓고,
우리가 당사를 학습할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내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오. 그렇게 할 수
있겠소?"
"예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소. 그럼 내 애길 시작하겠소.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를 뒤로 미뤘던 것은 나도 오늘
과 같은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이었소. 그때 상태로 얘길 해봤자 제대로 설명이 안됐을 것이
오. 이 동지는 지금 그때의 일을 한 가지 상기할 게 있소. 그게 뭔가 하면, 두 도당위원장이
결정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그때 '남선 단체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 동지나 중간간
부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 두 도당위원장도 이의를 제기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점이오.
어떻소, 생각이 나오?"
김범준이 이해룡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글쎄요... 그게..." 이해룡은 미간에 신경을 모으며 고개가 기울어져 한참을 있더니, "확실
하지는 않습니다만, 별 의견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맞소. 두 동지는 그 대목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소. 왜 그랬는지 알겠
소?" 이야기를 풀어갈 실마리를 잡은 김범준은 이해룡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참 이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해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솔
직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은 그때 벌써 선택적 결정을 했던 것이고, 두 동지는 당의 그 뜻을 파악하고, 이의 없
이 접수했던 것이오."
"선택적 결정, 그게 무엇입니까?"
이해룡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이 동지, 잘 들어보시오. 민족해방전쟁이 남조선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휴전협정에 임하
게 되었소.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때 당은 인민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되겠소. 당에는 인민들
앞에 책임질 의무가 있소. 그 의무가 무엇이겠소? 이 동지가 지난번에 지적한 것처럼 미군
개입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겠소? 그건 전쟁이 진행된 원인이고 결과는 될 수 있어도 당이
인민 앞에 지는 책임은 될 수 없소. 만약 그것으로 책임을 대신한다면 그건 당의 비겁이고,
인민에 대한 기만이오. 당은 인민들에게 민족과 인민의 해방을 약속했고, 따라서 인민들의
피의 헌신을 요구했소. 그런데 결과는 무위로 돌아갔소. 그때 당은 인민들의 피의 헌신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오,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는 당은 인민 앞에 존재할 수
없소. 그 책임의 수행을 위해 당은 '선택적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오. 이 선택적 결정은
인민의 단결을 위하는 것인 동시에 당의 장래를 위한 것이며 또한 원대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준엄한 '역사선택'인 것이오. 그 역사선택의 결과가 이번 일이오."
"아니 그럼, 박헌영 동지께서 스스로 역사선택을 했단 말입니까?" 이해룡은 그 동안의
생각이 완전히 뒤집히는 착란을 느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은 죽음도 나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소. 그건 이미 볼셰비키 당사
가 입증하는 바이고, 그건 이미 볼셰비키의 전통이기도 하오. 그걸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조금
도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소. 바로 이 동지 자신을 보면 되는 거요. 이 동지는 지금 역사투
쟁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고 죽을 각오로 투쟁하고 있소. 바로 그 정신이 역사
선택을 하는 게 아니겠소. 젊은 이 동지가 하는 일을 박헌영 동지가 안해서야 되겠소!" 이
해룡은 비로소 눈앞에 새로 열리는 것을 느꼈다.
"예,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떠오른 것인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왜 하필 박
헌영 동지가 역사선택을 해야 하는 겁니까?"
김범준은 이렇게 묻는 이해룡을 쓰다듬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 동지, 지금 우리 앞에 적이 몰려오고 있소. 당적 사명을 전달하기 위해 누구든 하나
는 살아나야 하고,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은 적을 막아내며 죽어가야 하오. 이때 누가 적을 막
고 나서야겠소. 그건 당연히 나요. 그건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자가 지켜야 하는 당연
한 임무고, 도리요. 당은 현재고 미래며, 변증법적 발전을 멈추지 않는 생명체라야 하는 거
요." "그렇군요... 그렇군요..."
이해룡은 초점을 잃은 듯한 눈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휴전을 계기로 토벌대들의 공세는 맹렬해졌다. 군병력의 일부 지원을 받으며 전투경찰대
가 총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전투경찰대는 군작전과 똑같이 엄청난 병력을 지리산에 투
입해대고 있었다. 빨치산들의 수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그들은 방어의 두려움이 없이 한시
라도 빠른 소탕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빨치산들은 두 명 단위의 소조투쟁으로 토벌
대를 피해다니다가 기습을 하고 또 자취를 감추는 전술을 썼으므로 토벌대들은 마음만 급
했지 그만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었다.
구월 이십일쯤인데 지리산에 갑자기 삐라가 뿌려지고 있었다. 한동안 뜸했던 일이라 이해
룡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삐라가 내려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삐라를 집어든 순간 이해룡은 눈앞이 새깜해지는 충격에 부딪쳤다. 그건 이현상의 죽음
을 알리는 삐라였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이현상 선생님이 사살을 당하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그는 두려움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삐라에는 분명 이현상 선생의 숨 끊어져버린 모습이 담겨 있지 않은가. 이해룡은 가
슴이 컥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삐라에 담긴 이현상의 모습은 머리에서부터 혁대 조금 아래까지 찍힌 사진이었다. 알몸
인 상태 여기저기에는 총 맞은 자리가 선명했고, 기라죽한 얼굴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삐라 위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해룡은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현상 선생의 음성을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 수술하도록 합시다." 그
리고, 다정하게 웃던 모습도 선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작년에 빗점골에서 인사를 드렸을
때 이현상 선생은 자신의 왼쪽 볼 흉터를 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
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속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대원들에게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이해룡은 삐라에 떨어진 눈물을 닦아냈다.
"혁명가답게 장하게 잘 가셨소."
김범준은 삐라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는 김범준의 모습
에 이해룡은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선생은 인민의 영웅이고, 조국의 애국자요."
김범준은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독백하듯 말하고 있었다.
이해룡은 며칠 뒤에 선요원을 통해서 이현상 선생이 빗점골 비트를 떠난 것이 지난 십팔
일 오전이었고, 그 자리에서 박영발 위원장과 신문사 주필이 배웅을 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런 뒷소식이 가슴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구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화엄사골과 피아골에 일시에 토벌대가 밀려들었다. 이
해룡은 지난번 빗점골과 대성골을 공격했던 병력이 이동해온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주능
선을 넘어 뱀사골이나 달궁골로 빠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김범준을 부축해가며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피아골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살아남아 있는 대원은 여섯이 전부
였다.
그들이 주능선에 막 올라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기관총이 난사되기 시작했다.
"피해라!"
이해룡이 외쳤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다 말고 푹 고꾸라졌다. 총알들이 잇따라 그의 등은
뚫고 나갔던 것이다. 그의 옆에서 김범준도 허리가 휘청 꺾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순식간
에 네 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넘어지고 뒹굴며 비탈을 내려뛰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 부딪친 나무에서 일찍 물든 나뭇잎들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염상진은 대원 네 명과 함께 막바지에 몰리고 있었다. 위로 밀리고 밀려 산꼭대기에 다다
라 있었던 것이다. 토벌대들은 총을 난사해대며 밀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병력동원이나 포위망 구축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시간이 갈수
록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비트를 기습당하는 순간 염상진은 새로운 배신자가 생겼
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부사령 동지, 총알이 떨어졌구만요!"
어느 대원의 다급한 소리였다.
"서로 나누어 쓰시오. 함부로 쏘지 말고 한 놈씩 정확하게 겨냥하시오." 염상진은 가늠구
멍을 들여다본 채 지시했다.
"총알이 다 떨어졌는디요."
뭣이! 그 순간 염상진은 방아쇠를 잡아당기고 말았다. 그 총알이 적을 향해 제대로 날아
갔을 리가 없었다. 대원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원들은 총알이 없으면서도 원형을 이룬 형
태로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염상진은 자신의 탄띠를 살펴보았다. 탄창 두 개의 수
류탄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탄창 두 개를 허물어 네 대원에게 네 발씩 나눠주었다.
"이게 마지막이오. 한 발씩 정확하게 겨냥해서 쏘도록 하시오." "세 발씩만 쏠께라?"
한 대원이 물었다. 그 말은 곧 한 발씩은 남겨야지요? 하는 말이었다. 염상진은 대원들을
휘들러보았다. 네 명이 모두 입을 꾹 다문 얼굴들이었다. 그 얼굴들이 평소의 얼굴이 아니
라는 것을 그는 금방 느꼈다.
"네 발씩 다 쏘시오. 이게 남아 있으니까."
염상진은 수류탄을 내보였다. 대원들은 더 말없이 적을 향해 몸들을 돌렸다.
염상진은 적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한 번, 두 번, 빈 탄창이 튕겨나왔
다.
더 쏠 총알이 없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총알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도 방아쇠를 두 번
씩만 더 당기면 빈 총이 되는 것이다. 그는 빈 총의 가늠구멍을 통해 몰려오고 있는 적들
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왔구나! 이젠 가야지! 그는 어금니를 꾸욱 물었다. 문득 아들
광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새벽공기 같은 맑고 시원한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왔다.
"아부지, 나도 싸게싸게 커서 아부지맹키로 훌륭헌 사람이 될라요." 그는 눈을 질끈 감았
다. 어머니의 얼굴이, 아내의 얼굴이, 딸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해냈
다. 얼른 왼쪽 윗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날 어머니가 주셨던 돈이 손끝에 잡혔다. 그는
돈을 매만져보고 손을 빼냈다.
"부사령 동지, 총얼 다 쐈구만이라."
뒤에서 들린 말이었다. 염상진은 몸을 돌렸다. 그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나갔다.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에는 찬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염상진, 염상진 들어라. 우린 네가 염상진인 것을 알고 있다. 총알이 다 떨어졌으면 부하
들 데리고 자수하라. 자수하면 선처를 보장한다. 이젠 전쟁도 끝난 지가 오래다. 잘못 생
각해서 부하들 불쌍하게 죽이지 말고 어서 자수하라. 자수하면 틀림없이 선처하겠다. 앞으
로 오 분간의 여유를 주겠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
염상진은 적이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
으로 비트가 노출된 이상 이름이 밝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동무들, 다 같이 앉읍시다."
염상진은 바위들을 은폐삼아 서 있는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염상진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대원들이 뒤따라 둘러앉았다. 총소리들에 쫓겨갔던 산의 적
막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그 두껍고 깊은 적막 속에 그들 다섯은 바윗덩어리인 듯
앉아 있었다. 마침내 염상진이 입을 열었다.
"동무들, 저자들이 떠드는 소리 다 들었지요? 투쟁을 끝낼 때가 마침내 우리 앞에 왔소.
동무들은 투쟁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다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나 적들이 저
렇게 떠들어댄 이상 나는 동무들에게 당의 원칙을 강요하고 싶지 않소. 이 마당에 여러분의
마지막을 여러분들 스스로가 솔직하게 결정하기 바라겠소. 저자들의 말을 듣고 자수하겠
다면 가도 좋소. 자아, 백 동무부터 돌아가면서 말해보시오."
염상진의 말이었다.
"지넌 여그서 죽겄구만이라."
"개덜얼 믿느니 경상도 디딜방아럴 믿겄소."
"더 살아서 헐 일도 웂구만이라."
"하먼이라, 다 항꾼에 가야제라."
"동무들, 다들 장하시오!"
염상진의 감격어린 목소리였다.
"염상진 들어라아, 이 분 남았다아!"
아래서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였다.
"자아 동무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한 마디씩 하시오." 염상진이 수류탄을 손아귀에 잡
으며 말했다.
"머시냐, 바라든 대로 살아봤응께 원도 한도 웂구만이라." "나도 더 바랠 것이야 웂는디,
새끼 한나 있는 것이 눈에 볿히요." "나도 후회헐 것 아무것도 웂소."
"나넌 따로 헐 말 웂고, 그저 부사령 동지 뫼시고 죽은께로 영광이오." "동무들, 나도 동
무들 같은 당당한 전사들과 함께 죽으니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소. 그저 영광스러울 뿐
이오."
염상진이 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삼십 초 남았다아, 삼십 초!"
"동무들, 우리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합시다."
염상진이 팔을 벌렸다. 네 사람도 양쪽 팔들을 벌렸다. 그리고 그들은 어깨동무를 했다.
어깨동무를 하게 되자 그들의 간격은 자연히 좁혀 들었다. 수류탄을 든 염상진의 오른손이
그들이 만든 동그라미 가운데 놓였다.
"동무들, 우리 다 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염상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으로 수류탄의 핀을 뽑았다.
"인민공화국 만세에..."
꽝!
이틀이 지난 벌교역 앞마당에는 사람의 목 하나가 내걸렸다. 폭이 육십 센티 정도고, 길이
가 이 미터 정도 되는 나무판이 받침목으로 비스듬하게 세워졌고, 그 꼭대기에 머리카락을
위로 모아 묶은 목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로 붙은 종이에는 큼직큼직한 글씨들이 씌어
있었다.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
수류탄 자살로 염상진과 다른 빨치산들의 몸은 걸레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토벌대는 염상
진의 목만 잘라갔던 것이다. 그 목은 순천경찰서를 거쳐 출신지 경찰서로 넘겨진 것이다.
염상진의 목이 내걸리자마자 그 소문은 거센 바람이 되어 읍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
리고 역으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눔들아, 안뒤야, , 안뒤야, 내 아덜얼... 안뒤야!" 한 여자노인네가 울부짖으며 사람들을
밀쳐대고 있었다. 그 동안 허리가 더 굽어 지팡이를 짚은 호산댁이었다. 사람들이 빠르게
길을 터주었다.
"이눔덜아, 안뒤야, 안뒤야!"
호산댁은 계속 울부짖으며 맨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걸음이 뚝 멈춰졌다. 그리고, 반으
로 접힌 허리가 약간 펴지면서 고개가 들렸다.
"워메! 워메, 워짤끄나! 애비야, 애비야, 내 자석아!" 호산댁의 입에서 통곡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나무판 양쪽에서 총을 메고 서 있던 두 경찰
이 제각기 멀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눔덜아, 오런 숭악헌 짓이 워디가 있냐. 당장에 내 아덜얼 내놓거라!" 호산댁이 소리
치며 앞으로 내달았다. 두 경찰이 놀라 재빨리 호산댁을 가로막았다.
"요런 숭악헌 눔덜아 비켜나그라! 사람이 죽었으면 그만이제 저런 법이 워디 있냐. 비켜
나, 이눔덜아!"
호산댁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할마씨, 존 말로 헐 때 집에 가 있으씨요. 다 빨갱이 자석 둔 죈께." 한 경찰이 내쏘았
다.
"에라이 죽일 눔아, 니도 사람이냐!"
호산댁이 눈을 부릅뜨며 지팡이를 내려쳤다. 경찰이 지팡이를 막아 잡으며 낚아챘다. 호산
댁이 여지없이 앞으로 엎어졌다.
"워메에에, 참말이네웨!"
그때 한 여자가 두 팔을 벌리며 펄쩍 뛰어올라 허공에서 손바닥을 맞때리며 짐승의 포효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엎어졌던 호산댁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후딱 뒤로 돌렸다. 느
낌 그대로 그녀의 눈에 잡힌 것은 큰며느리였다. 호산댁은 불끈 힘이 솟기는 걸 느꼈다.
"아이고 시상에나 광조 아부지이이, 워찌 그러고 기시요오." 수염이 더부룩한 채 긁히고
찢긴 염상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죽산댁은 눈물과 함께 창자를 다 토해내듯 크고 긴 소리
로 처절하게 통곡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는 언제 그런 통곡을 했냐 싶게 번개
처럼 경찰에게로 내달았다. 방심을 하고 있던 경찰은 그녀를 막고 어쩌고 할 새가 없었다.
그녀가 경찰을 붙들었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야야야..." 경찰이 죽는 듯이 비명을 질러댔
다. 그녀는 경찰의 팔을 물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팔을 물린 경찰이 그녀를 떼쳐내려고 버둥
거리다가 결국 총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야야야..."
"어! 쩌, 쩌 저년이!"
반대쪽에 섰던 경찰이 당황한 소리를 더듬거리며 총을 어깨에서 벗었다. 그리고 개머리판
을 앞으로 돌려잡으며 이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려다가 상
대방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많은 눈들을 의식한 것인지 개머리판을 그냥
내리고 발길로 죽산댁을 걷어차며 소리질렀다.
"이봐! 어디다가 횡패야, 횡패가!"
"이눔아, 누구러 차야, 차기럴!"
호산댁이 지팡이로 그 경찰을 때리려고 했다.
그때 죽산댁이 팔을 물고 있던 경찰을 떠다밀며 돌아섰다. 떠밀린 경찰은 뒤로 넘어지고
있었고, 죽산댁은 어느새 다른 경찰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파란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서슬에 놀라 "어! 어!"하며 어물거리던 경찰은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그녀는 순
식간에 경찰의 손을 물어뜯었고, 경찰은 체면도 없이 비명을 질렀다.
"저런 미친년 잠 보소. 저년이 무법천지시!"
팔을 물렸던 경찰이 총을 집어들며 감정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고약스럽게 찡그려진 얼
굴이 죽산댁을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아야야, 아이고, 아이고!"
손을 물린 경찰이 계속 비명을 지르며 다른 주먹으로 무릎으로 죽산댁을 닥치는 대로 치
고 차고 있었다. 그러나 죽산댁은 물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요것이 멋덜 허는 짓거리야, 시방!"
남자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두 손을 허리에 걸치고 버티고 선 것은 염상구였다.
그때 마침 개머리판을 앞으로 꼬나잡고 죽산댁을 향해 내닫고 있던 팔 물린 경찰이 염상
구를 알아보고는 주춤 멈춰섰다.
"아가, 큰아가, 시동상 왔다, 시동상."
호산댁이 작은아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큰며느리를 흔들어댔다. 그 말에 비로소 죽산
댁은 물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 염 사장 잘 오셨소. 염 사장 엄니허고 형수씨가 시방 공무집행 방해럴 험시로 이 난
리판굿이요."
팔을 물렸던 경찰이 염상구가 나타난 것을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염상구는 매달
린 목을 흘낏 올려다보았다.
"그려서, 나보고 엄니, 형수씨 말개도라 그것이여?"
염상구의 말은 얼굴만큼 싸늘했다.
"야아?"
경찰이 어리둥절했다. 손을 물렸던 경찰이 손을 싸잡은 채 다가서고 있었다.
"야이 씨부랄눔덜아, 여러 개소리 씹어돌리지 말고 싸게 저것 띠내려!" 염상구가 두 경
찰을 향해 소리질렀다.
"아니, 워째 그러신다요?"
손을 싸잡은 경찰도 어리둥절했졌다. 상대방은 틀림없이 청년단장 염상구였던 것이다.
"오런 개좆 겉은 새끼덜아, 살아서나 빨갱이제 죽어서도 빨갱이요! 당장에 못 띠내리겄
어!" 염상구가 두 경찰의 어깻죽지를 동시에 치며 외친 소리였다.
그려, 그려, 니가 사람이다. 하먼, 느그 성인디.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호산댁은 솟구치는
서러움을 눈물로 쏟아내고 있었다. 워메, 워메, 아즘찮은거. 시동상이 인자 사람이시. 예상
이 뒤집히자 죽산댁도 비로소 고마움과 서러움이 범벅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 암스로 워째 이러시오."
팔을 물린 경찰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요것이 우리 맘대로 못허는 일 아니오."
손을 물린 경찰이 사정하듯 말했다.
"쪼아, 느그가 못 허겄다먼 나가 헐 것잉께 비켜나!" 염상구가 허리에 걸쳤던 손을 허공
에 뿌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는 못허요."
"서장헌테 가서 말허씨요."
두 경찰이 엇지게 잡은 총으로 염상구의 앞을 가로막았다.
"햐아! 느그가 나허고 완력으로 허자 그것이냐." 염상구는 고개를 젖히며 코웃음을 날리
고는, "느그 존 말로 헐 때 앞 티워. 까불먼 마빡에 다 칼침 박고 말 것잉께." 얼굴이 싹 변
한 그가 잔인스럽게 내쏘았다.
"맘대로 혀. 요것이 빈 총이 아닝께."
"항, 우리도 그냥언 안 당혀."
두 경찰이 재빨리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서며 총을 겨누었다.
"햐, 느그가 참말로 막보기로 나올 챔이여? 그려, 칼침보다 총알이 더 빨르겄제. 씨기도
훨썩 더 씨고. 알겄어, 나허고 총으로 혀보겄다 그것이제. 기둘려, 느그만 총 있는 것이 아
닝께! 권 서장눔 마빡에서부텀 느그덜 마빡꺼정 각단지게 빵꾸럴 뚫버줄 것잉께." 말을 해
나갈수록 염상구의 실눈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홱 돌아섰다.
두 경찰이 서로를 맞쳐다보았다.
"어이, 싸게 서장님헌테 보고허소."
손을 물린 경찰이 말했다.
"알겄구마. 핑 댕게올라네."
팔을 물린 경찰이 총을 어깨에 둘러멨다.
둘러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청년단과 경찰이 총질을 하게 생겼다는 내용이었
다.
"요것얼 워찌 혀야 쓰겄냐. 상구 성질에 참말로 청년단얼 몰고 나올 것인디." 호산댁이
걱정스럽게 큰며느리를 쳐다보았다.
"냅두씨요. 그리 안허먼 아범 못 찾을 것잉께라. 서로 총질이야 못허요." 죽산댁이 시어
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상구가 청년단 몰고 나오는 것으로 일이 풀리먼 올매나 좋겄냐." 호산댁은 새로운 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사태를 보고받은 권 서장은 그만 난감해졌다. 염상구가 그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환영할 리야 없지만 그저 못 본 척할 줄 알았던 것이다. 청년단이 총을 들고 나서
고, 감정이 격해져 총질이 일어나고... 그는 더 이상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과 청년
단이 총을 맞겨누고 선다는 것 자체부터가 경찰 체면의 손상이었고, 그리고, 어떤 때 마땅
찮고 거슬리더라도 염상구의 성질에 불을 붙여서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청년단이 그
동안 경찰을 도와 이룬 공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작년의 도래등 공적도 청년단이 아니었으
면 세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공비가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청년단을 괄시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유 순경, 내 말 잘 들으시오. 청년단이 밀려들면 마지못한 척 물러서시오. 절대로 경찰에
서 그걸 내려주지 말고, 염상구나 청년단 손으로 떼가게 내버려두란 말이오. 알겠소?" "예,
알겄구만요."
팔을 물린 유 순경은 서장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렇게 되면 혹시 무슨 문제가 생
겼을 때 그 책임은 염상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염상구는 과연 총을 든 청년단원들을 몰고 역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염상구의 살기와 청년단원들의 살벌함에 사람들은 뒤로뒤로 밀리며 길을 넓게 틔웠다.
두 경찰은 시전대로부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불어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염상구는 경찰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문득 긴장했
다.
그러나, 권 서장이 충돌을 피해 섰다는 것을 곧 눈치챘다.
"저것 띠내레라!"
염상구가 명령했다. 청년단원들이 우르르 시전대로 몰려들었다. 시전대가 천천히 눕혀졌
다.
죽산댁이 치마를 받쳐들고 있었다. 염상진의 목은 그 치마 위로 옮겨졌다. 그 순간 죽산댁
이 치마를 감싸안으며 주저앉았다.
"아이고메, 광조 아부지이, 광조 아부지이..."
통곡과 함께 그녀의 온몸이 심하게 떨려대기 시작했다.
늦가을볕이 스산하게 내리고 있는 길고 긴 방죽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버
린 중도들판이 방죽에 사람이 없는 까닭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장수 노인은 그 빈 방죽으로 들어섰다. 도무지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어 큰길을 따
라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 노인은 역마당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산사람 목이 내걸
렸다기에 혹시 강동기나 마삼수가 아닌가 해서 도래등을 허겁지겁 넘었던 것이다.
한장수 노인은 뜻밖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 사람의 흉한 모습을 보고나서 한 세상이
또 막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유명한 대장이 저리 죽었이니 동기나 삼수가 살았을 리가 웂는 일이제. 말자리나 허
고, 생각 똑바라지게 묵은 젊은 사람덜언 다 죽어뿔고 인자 나 겉은 쭉찡이에, 지 욕심 채리
는 것덜만 남었구만. 해방이 되고 이적지 팔 년 쌈에 죽기도 많이덜 죽었제. 쓸만한 사람덜
요리 한 바탕씩 쓸어불고 나먼, 그만헌 사람덜이 새로 채와지자먼 또 올매나 긴 세월이
흘러야 허는 겨? 인자부텀 새로 낳는 자석덜이 장성혀야 헌께 한시상이 흘러가는 세월이제.
그렇제, 갑오년 그 쌈에서 삼일만세까지가 시물다섯 해고, 삼일만세에서 해방꺼지가 또 시
물여섯해 아니라고.
인자부텀 또 그만헌 세월이 흘르먼 워찌 될랑고? 잉, 또 고런 심덜이 모타지겄제. 세월이란
것이 그냥 무심허덜 않는 법잉께. 나가 질게 살아옴서 보고 젺은 세월이 그렸어. 나도 참말
로 징허게 오래넌 살었구만. 인자 나 겉은 쭉찡이부텀 얼렁얼렁 가야제. 그려야 새로 타고난
목심덜이 묵고 커날 것잉께. 복동이도, 동기도, 삼수도 웂는 사랑방얼 혼자서 지키기도 인자
심 파허는 일인께. 살아올 기약이 웂어진 사람덜잉께.
한장수 노인은 눈물이 젖어드는 눈으로 길게 뻗어나간 방죽을 힘겨운 걸음으로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었다.
중도들판이 썰렁하게 비어버린 대신 포구에는 누렇게 변한 갈대밭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
었다. 그 갈대밭은 찬 기운 서린 비람결이 스쳐갈 때마다 서로 몸들을 비벼대며 겨울숲이
우는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포구의 물결 위로 실어 보내고 있었다. 포구에 물이 실리고 있
었다. 밀물때는 물결이 커지고, 그 물결을 타고 작은 고기들이 몸을 실었다. 때맞추어 기러
기떼가 갈대숲 여기저기에서 날아올라 끼륵끼륵 소리하면 정연하게 날기 시작했다.
이틀 뒤에 염상진의 상여가 나갔다. 그는 율어로 가는 길목 어느 산자락에 묻혔다. 목 아
래로는 짚둥으로 몸체와 두 팔다리를 만들어 붙인 그의 관 위에 서민영과 김범우가 흙 세
삽씩을 뿌렸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갔다. 어둠이 장막을 친 김은 밤, 무덤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결에 인기척이 실리고 있었다. 어둠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는 무덤가에 그림자들이 나타났
다. 그림자들은 무덤을 에워쌌다. 그림자는 모두 여섯이었다. 철이 늦어 어둠 속에서는 벌
레소리 한 가닥 울리지 않았다. 찬바람에 낙엽들 구르는 메마른 소리만 스산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림자 하나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장님, 지가 왔구만이라. 하대치여라. 대장님, 대장님이 먼첨 가셔 뿔고, 지가 살아남어
이리 될 줄 몰랐구만이라. 지가 대장님 앞에 면목이 웂구만요. 그려도 대장님이사 다 아시
제라.
지가 요리 살아 있는 것이 그간에 총알 피해댕김서 드럽게 살아남은 것이 아니란 거 말이
제라. 대장님, 편안허니 먼첨 가시씨요. 지도 대장님헌테 배운 대로 당당허니 싸우다가 대
장님 따라 깨끔허게 갈 것잉께요. 대장님, 근디 지가 남치기 역사투쟁얼 허고 죽기 전에 똑
한 가지 허고 잡은 일이 있구만이라. 지 맘대로 혀뿔기 전에 대장님헌테 먼첨 말씸디릴라
고라. 고것이 먼고하니, 지가 할아부지헌테 받은 이름얼 지 손자눔헌테 넴게줄라고라. 요말
을 죽기 전에 아들헌테 전허고 죽을랑마요. 대장님, 우리 넌 아직 심이 남아 있구만요. 끝
꺼정 용맹시럽게 싸울 팅께 걱정 마시씨요.
그림자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차례로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원들이 대장 염상진을 만나고 있는 동안 하대치는 두 손에 힘주어 총을 잡고 어둠 속
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짙고 짙은 어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이
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이 짙은 만큼 적막이 깊을 뿐이었다. 그러나 산줄기만은 어둠
속에서도 그 윤곽을 어렴풋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어렴풋한 윤곽 속에서도 산줄기는 장
중한 무게와 굳센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억센 산줄기의 봉우리 봉우리에서 봉화들
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봉화들은 너울너울 불길을 일으켜 어둠을 사르며 줄기줄
기 뻗어나간 산줄기들을 따라 끝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불꽃들과 함께 함
성이 울려오고 있었다.
그는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봉우리 봉우
리마다 봉홧불이 타올라 산줄기를 다라 불꽃행렬을 이루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봉홧불들의 기세를 따라 다 같이 함성을 지르며 투쟁의 대열을 지었던 때도 분명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 불길이 타오르고, 그 함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펴며 숨을 들이켰다. 그와 함께 밤하늘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그는 문득 숨
을 멈추었다. 그는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본 것은 넓게 펼쳐진 광대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수없이 빛나고 있는 별들이었다. 그는 멀고 깊
은 어둠 저편에서 명멸하고 있는 무수하게 많은 별들을 우러러보았다. 가을 별들이라서 그
초롱초롱함과 맑은 반짝거림이 유난스러웠다. 그 살아서 숨쉬고 있는 별들이 가슴을 뭉클하
게 했다. 그 별들이 모두 대원들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먼저 떠나간 대원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혁명의 별이 되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
소리가 멀리 스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