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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 젊다 라는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나이로 구분한다면 18세-30대 중반까지는 청년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청년때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 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나이가 되면 미래를 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그래서 실패해도 좋다 한번 해 보자 호기심으로 무엇이든 해 봅니다. 젊으니까 할 수 있다는 의욕이 있는 것 젊은이 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입니다.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청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안하니까 청춘이다..... 막막하니까 청춘이다....... 흔들이리까 청춘이다........ 두근거리니까 청춘이다..... 그러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청년이기에 무엇이든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학생때 1970년 새마을운동이 일어날 때 4H운동도 함께 있었습니다. 네 잎 크로바를 형상화하여 깃발을 만들어 달았는데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건강(Health)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H) 4H 운동이 당시 청년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살기 힘든 때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네마다 활기 차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농촌의 현실은 청년이 거의 없어요 있다면 일단 도시로 나갔다가 실패하여 다시 돌아온 귀농청년들이 자리 잡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은 모든생활이 넉넉해졌다고 하지만 청년들의 형편이 일자리 때문에 말이 아닙니다.
‘이태백’이란 현대어를 아십니까?..... 이태백은 불행하게도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뜻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이런 말이 다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는 백수들의 애환을 얘기하면서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너 취직했냐?”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몸은 청년이지만 현실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나이를 바라보는 우리청년의 현실이 지금 이렇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울만”이란 분이 78세에 썼다는 유명한 시 <청춘>이란 시가 있습니다. ............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장미빛 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 의지, 상상력의 질, 감동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 그것은 생명의 깊은 원천의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 안락함을 초월하는 모험심을 뜻한다. /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60세 노인에게 청춘이 존재한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늙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우리는 이상을 포기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 이 시처럼 스무 살의 청년보다 때로는 예순 살의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윗의 노래에서 청년을 말할 때도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다윗이 노래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란 육체적인 나이의 청년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정도에 따라서 청년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헌신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20대 30대..... 청년일 수 있고 50대도...... 청년일 수 있고, 60대도 90대도...... 청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KBS에서 방영한 강연100°C 아십니까? 이 프로에 95세이신 조동환 할아버지께서 출연했습니다. 나오시는 걸음걸이와 곧은 허리와 건강한 몸은 정말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건강비결을 말씀을 하시는데 평생 잔병치레한번 안하고 농사꾼으로 평생사셨는데 65세때 운전면허증을 단 한번에 따셨되요 지금도 손수 트럭운전을 하시면서 농사를 짖는 답니다. 건강비결을 여쭈었더니 하루새끼 식사를 하는데 채식으로 하시고 음식을 30번씩 씹을 정도로 건강한 식생활이라고 하는데 나이가 100세를 바라보지만 안경안쓰고 귀 안먹고 팔팔하다며 말씀하시는데 정말 30세 청춘처럼 보였습니다.... 주님안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청년의 나이든 노년의 나이든 하나님 앞에서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노래한 다윗도 청년의 때가 있었습니다. 10대에 시련기를 보내고 30대에 이스라엘 왕이 되어 70대에 죽기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3가지 용기의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불의에 도전하는 용기입니다. 17세의 어린 소년 다윗은 국가와 자기를 저주하는 골리앗 앞에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아오나 나는 네가 저주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하고 말하며 나아가 적장 골리앗을 물멧돌 5개 중 1개로도 넉넉히 때려눕힐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충성심 불의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용기를 신앙의 힘으로 나타냈습니다.
둘째로,.......... 다윗에게는 죄를 회개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밧세바와의 음행 사건을 책망하신 하나님 앞에서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 않고 ‘내가 여호와께 범죄 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했습니다. 죄는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 다르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기특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다윗은 지은 죄를 회개하는 용기를 나타냈습니다. 오늘 우리 청년들이 이 점이 부족합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다윗에게는 환란과 역경을 인내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13년간 사울을 피하여 여기저기 도망 다녔습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해서 피해다니는 도피가 아닙니다. 정말 억울한 도피입니다. 그 도피가 원수 같은 블레셋나라에 까지 도망가야 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 압살롬에게 피해 당해야 했습니다. 시므이에게서는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환란과 역경을 인내했습니다. 오늘날 초조와 불안에 견디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향성도여러분!! 다윗 왕이 이런 굴곡의 삶을 살아보면서도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노래하는 것은 그 만큼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소망인지 모릅니다. 주향성도여러분!!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날씨에 대해 푸념을 많이 합니다. 가뭄이 오면 그 고통으로 ... 또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리면 푸념을 많이 합니다. 비가 많이 오니까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고 칙칙하고 빨래도 안 마르고, 곰팡이 생기고 잡초도 많이 자라고.... 이처럼 어떤형편이든지 불만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행복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열대지방처럼 몇 달간 아니 몇 년간 비 한방울 구경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되면 순식간에 모든 식물이 말라죽고 초식동물, 육식동물 벌래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삭막하고 황폐한 땅이 될 것입니다.
열대의 사막은 늘 건조합니다. 그래서 건기때 어린 생물들은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건조하고 더운 사막이지만 새벽이 되면 황량한 모래땅에 언제나 이슬이 내리지요. 그래서 땅에 뿌리만 박고 생명을 연명하고 있는 식물들이 이 새벽이슬을 먹고 자라고 또 다른 사막의 동물들도 풀에 맺힌 새벽이슬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새벽이슬은 괜한 옷을 적시고 신발을 버리고 일을 못하게 막는 방해물처럼 여겨지나 사막이나 광야가 많은 땅에서 새벽이슬은 생명수 그 자체입니다. 없으면 어떤 것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도 생명의 젖줄인 새벽이슬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막같이 사랑이 없고 정의가 없는 황폐한 이 땅을 적실 새벽이슬 같은 생명의 일꾼들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은 어떤 청년입니까?
첫째..... 거룩한 옷을 입은 청년입니다.
3절 상반절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옷은 구별된 옷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옷을 입지 않으면 헌신 할 수도 없고 주님께 나아 올 수도 없습니다. 거룩한 옷은 헌신하기 전 주께 나오기전에 해야 할 우선순위입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다 동의 합니다. 옷은 어떤 의미에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옷에 따라 사람이 달라보입니다. ...... 가벼운 옷을 입으면 가볍게 행동하고 싶어지고, 무거운 옷을 입으면 무거운 행동을 하고,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고 싶어지죠. 편한 옷을 입으면 편하게 행동을 하고, 정장을 입으면 정장다운 행동을 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갖습니다. ....... 오래전 예비군 훈련을 받아봤지만 놀란 것은 그렇게 점잖은 분들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정말,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옷은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맥스 루케이도는 ‘옷은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옷이 거룩해야 합니다. 성경은 제사장의 옷을 거룩하게 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의 옷이 거룩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의 집안에 큰 위기가 닥칩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성에서 강간을 당함으로 세겜땅 모든 남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제는 어디도 이동할 수도 머물러 있을 수도 없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이 살인자가 되어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과 브리스 족속들에게 언제 어떻게 공격을 당해 죽을지 모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상황에서 온 식구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그 전에 “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하고 의복을 바꾸고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외칩니다. 버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올라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창35:2...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하고... 의복을 바꾸고...” 어찌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 벧엘에 오르자고 했습니다.
로마서 13:14.....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거룩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옷에서 그리스도가 보이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있기에 우리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죽은 후에 무슨 옷을 입을까? 걱정합니까? 죽은 다음에는 옷이 필요 없습니다. 옷은 살아 있는 사람의 장식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세마포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백만 원, 수천만 원짜리의 수의가 죽은 몸에는 사치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살아있을 때의 옷을 거룩하게 입어야 합니다.
시편 119:8.....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합니다. 주의 말씀만 있으면 청년이 깨끗해집니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옷을 입게 됩니다.
둘째...... 즐거이 헌신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무엇을 합니까?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 까닭은 즐거이 헌신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할게 뭐가 있습니까? 거룩한 옷을 입고 할 일은 거룩한 일 밖에 없습니다. 즐겁게 헌신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저는 주일이면 목사안수를 받고 이 카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합니다. 이 예복 자체는헌신을 뜻합니다. 꼭 주님께 예배할 때 만 입습니다. 놀러 갈 때 입지 않습니다. 이 놀러 갈 때 이 옷은 불편합니다. 이 옷 입고 큰 소리도 못 칩니다. 이 옷을 걸치고 싸움도 못합니다. 옷이 거룩하면 마음과 행동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입으면 즐겁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청년 여러분, 헌신하십시오. 문자 그대로 몸을 드리세요. 우리의 몸과 시간과 물질,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헌신의 기초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헌신입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서 권합니다. ““그러므로 【청년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청년】를 권하노니 【청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청년】이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드리는 자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헌신하는 자입니다....... 예배가 곧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헌신입니다. 몸은 자꾸 써야 좋아집니다. 몸을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몸은 쓸수록 단련이 되고 건강해집니다. 헌신하려고 하지만 바칠게 없다고 할 청년이 있습니까?
한국 초대교회에는 ‘날 연보’라는 게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울 때에 드릴 것이 없어서 일주일에 한 날을 봉헌하는 제도였습니다. 특히 시골에서 성행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씩 교회에 나와서 몸으로 봉사했습니다.
요즘은 몸으로 봉사하라면 돈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래도 다함께 하는 일중에 교회 청소 하는 일입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설거지 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입니다. 커피 봉사하는 것도 봉사하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할 것도, 바칠 것도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쯤 전에 영국의 한 작은 마을 교회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목사님의 설교 시간이 끝나고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 되었어요. 마침 그날은 아프리카를 위해서 헌금을 드리는 날이었어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영국 사람들의 조상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해 데려와서 많이 괴롭히고 핍박했는데, 오늘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모두 헌금하고 있었어요. ......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 한 어린이가 있었는데 헌금바구니는 점점 가까이 자기앞으로 다가오는데 돈이 없었던 어린이는 헌금 바구니가 바로 앞에 왔을 때 자기의 두 발을 헌금 바구니에 넣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교회에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 웃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웃고 있던 그 순간에 어린이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어요.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돈이 없습니다. 대신 저를 드립니다. 저를 받아 주세요!” 이 어린이가 바로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톤입니다....... 돈이 없다면 몸이라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찬송 575장 1절의 가사를 잘 보세요.......♪♬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 진리의 싸움을 할 때 열심을 다하여라 / 모범을 보이신 예수 굽히지 않으셨네/ 너희는 충성을 다 해 주님을 섬기리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
젊을 때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힘입니다..... 시간입니다..... 몸입니다..... 그리고 생명입니다. .....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는 청년들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께 나아와야 합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무의식중에 어디로 갑니까?......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사업을 위해 일한다며 모든 것 버리고 따랐던 제자 중에 도마라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시는 날이 얼마 남을 때는 제자들을 집중교육 시키셨습니다. 어느날 예수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여 마련해두면 내가 너희를 데려오마” 예수님 말씀하시니까 도마는 동문서답을 합니다. 처소가 어디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처소는 집이예요.... 우리가 가야할 궁극적인 천국 하나님나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 교육에 실패하신 것일까요? 도마가 어디 화장실 갔다 온 건지 졸았는 건지 알수가 없어요.......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을 몰라요 참 답답합니다. 한심합니다. 청년여러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안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 안됩니다.
전도서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주향청년여러분!!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미래의 길이 정해지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의 길이 있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주께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입니다. 젊은이들이 갈 데가 많아집니다. 전에는 아버지 때문에 부자가 만나지 못했지만 요즘은 젊은이 때문에 부자가 못 만납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야할 곳이 너무 많습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세상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께 나오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성공 비결입니다.
유대교의 랍비가 한번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물었습니다. ‘밤의 어두움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 온 것을 그대들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물었습니다. 제자 가운데 하나가 예! 선생님..... ‘동창이 밝아 오는 것을 보면 새날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스승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가 또 말하기를 ‘멀리서 개와 양을 식별할 수 있으면 새 날이 밝아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스승은 역시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창문을 열어보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이번에도 스승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계속하여 여러 제자들이 나름대로 대답을 하였지만 스승은 듣고 나면 모두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궁금해진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밤이 가고 새 날이 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스승은 ‘너희가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 때 비로소 새 날이 밝아 온 것이다. ........ 그러기 전까지는 밤이요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새벽을 깨워 보아야 할 것을 바르게 보고 주께 돌아와야합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케리는 28세의 나이에 인도 선교사로 갔고, 허드슨 테일러는 22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고, 에펜젤라는 27세에 어둠의 가려진 땅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몸을 복음으로 불살았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여!! 하나님말씀으로 일어나 거룩한 옷을 입으십시오...... 즐거이 헌신하십시오...... 주께 나오는 청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살고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부흥의 물결이 우리교회에서부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