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백하 김대락의 구려(舊廬) 즉, 옛집이다.
왜? 백하인가?
김대락이 후일 서간도 만주땅에서 살면서 나는 백두산밑에서 새인생 새조국을 개척하겠다는 뜻으로 백하라고 이름을 고쳤던 것이다.
이 대가집을 버리고 백두산 아래 즉, 백하에서 심지를 굳힐 때,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들은 섣부르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전 초등학교 : 협동학교 구지
협동학교는 결코 순탄치 못했다.
개화바람 신식교육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보수유림 예천지역의 의병이 협동학교를 습격한 예기치 못했던 너무도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1910년 7월 18일 최성천이 지휘하는 무장의병 18명이 협동학교에 난입하여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 서기 이종하 3인을 살해 하였던 것이다.
교정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단채로 상투를 자른 교사들의 행동에 대한 보복이였다.
의병과 애국계몽의 대립관계를 가장 신랄하게 표출한 우리나라역사의 비극적 한 장면 이였다.
전국이 이 사건으로 들끓었다.
이 협동학교 피습사건은 보수적 안동유림이게나 각성된 애국계몽인사들에게나 모두 충격을 주었다.
의병이다 계몽이다 복벽이다 개화다 하는 따위의 이원론적 대립에서 벗어나 새로운 논리에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각성을 던져주었다.
이새로운 논리를 선취한 대 선각자가 바로 이상용이였다.
사당(廟)에 신주들을 땅에묻고 신천지 만주를 향해 떠날때 김대락, 김동삼, 이원일 자그마치 40새대 200여명이 그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렬이였다.
안동이 텅 비어버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굵직한 인물들이 이 지역을 떠나게 된 배경에는 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향산 이만도의 자청지명 즉, 자결이다. (殉)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만도는 곡끼를 끊었다.
이만도는 퇴계의 11대손으로 예안에서 출생, 병인년에 장원급제를 한 사람이다.
말이 그렇지 장원급제라는 것은 범인(凡人)이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병조좌랑이 되었고 여러관직을 거쳐 승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위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을미사변 후 예안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퇴위당하자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서 임금과 나라의 운명을 그르친 죄인이라 하여 부친의 묘소곁에서 고행하며 근신하였다.
그가 곡끼를 끊자, 안동유림전체의 비상이 걸렸다.
단식이 지속되는 동안 안동의 수없는 지사들이 그의 마당에 줄을 이었다.
일본경찰이 와서 그에게 강제로 미음을 떠먹이려 하자,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줄 알았던 그가 벌떡일어나 '누가 감히 나를 회유하고 협박하려는가?' 하고 호령하여 주위사람들을 숙연케 하였다.
단식 24일만에 운명하였다.
김용옥 : 그래서 이 양반이 이곳에서 자결하게 됨으로서 그것이 이 동네에...그러니까...퇴계집안이고 그러니깐은...진성이씨의 아주...그...리더격인 이 양반께서 돌아가셨다 그니까 그냥 이 안동지역이 하나의 그...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거군요.
이근필 : 예, 그렇죠.
앞의 비명(이만도)은 백범 김구가 쓴 것이다.
환국(還國)하여 저격당하기 직전에 쓴 것이다.
향산의 순절로 부터 김구의 죽음에 으르는 기나긴 역사가 여기에 담겨 있다.
*안동 서후면 금계리 의성김씨 학봉종택
여기는 학봉종택이다.
학풍으로 퇴계의 정맥을 이은 곳이고, 석주 이상용의 스승 서산 김흥락(1827 ~ 1899)도 바로 이곳의 주인 학봉종택 종손이였다.
이 학봉종택도 예외없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홍락 : 유학으로는 이 어른이 최종어른이지요.
영남의 유학하는 이는 백세전(歲前)에 이 어른(丈)한테 안 배운 이가 없어요.
문하에 인물이 그렇게 많습니다.
김용옥 : 이 학봉 종택에서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많다는게 놀랍지 않습니까?
김홍락 : 학문이라는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운게 맨 충효(忠孝)아닙니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뭐 그게 아닙니까?
배운데로 실행하는게죠 뭐.
선비정신이 그것 아닙니까?
종손은 그의 부친 김용환 (1887 ~ 1946) 어른에 대해 이야기 했다.
모두 노름에 땅 팔아먹고 집안 망해먹은 사람인줄 알았다는데...
실은 독립군 서로군정서에 군자금을 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동은 경상도의 안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조선의 안동이요, 우리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이다.
그 문화유산이 우리민족독립운동사의 대맥을 형성했다는 것,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