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조성수 기자에게 다녀오고 나서 저녁을 먹은 뒤, 7층에 올라갔다. 잠이야 방공호에서 잘 거지만 거기에 올라가 씻고, 빨래도 해야겠다 생각해서다.
몸이 좀 좋지 않았다. 아침마다 목이 붓고, 몸살기가 있고, 배도 아프다. 하지만 그대로 끙끙 앓지 않고 견디는 건 긴장 상태이기 때문일 거다. 내가 무슨 정신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정말 아파서는 안 되는 상황. 억지 억지 내 몸이 버티고 있다.
“아파서도 안 돼! 울어서도 안 돼! 다쳐서도 안 돼! ……”
7층 방 욕실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누웠다. 폭격은 계속 되었다. 그래도 그제와 어제 이틀을 겪고 나니, 특히 엄청나게 퍼부어대던 어제를 겪고 나니 조금 담담한 마음이 생겼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아무 생각도 없다. 좋았다. 때로 그렇게 목욕물에 담그고 있는 동안 이 건물에 폭격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뜨거운 물 속에 오래 있고 싶었다. 계속 되는 폭격 소리. 우르릉 쾅쾅. 거의 천둥, 지진.
한참을 그렇게 담그고 있는데 여태껏 가장 큰 폭격 소리가 났다. 은하씨는 소리만 들어도 이것이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폭탄인지, 아니면 이라크에서 대공포로 응사하는 소리인지, 정말 커다란 지대공 미사일이 온 것인지 구분이 된다 했는데 아마도 미사일 소리 같았다. 무서웠다. 물 속에서도 내 어깨가 떨리는 걸 느낀다. 아니, 나 뿐 아니라 건물이 흔들린다.
폭격이 한 번 있으면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흔들린다. 특히나 높은 층일수록 많이 흔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높은 층 방이 위험하다 하는 것이다. 폭격, 한 번 있을 때마다 7층 내 방은 무척 많이 흔들린다. 좀 더 가까이 떨어지면 창이 다 깨질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 떨어지면 그 충격으로 높은 층이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빨래까지 하려 했는데 도무지 안 되겠다. 미사일 소리가 계속 되고, 이라크의 응사하는 대공포 소리가 기관총처럼 따다다다 계속 되었다. 옷을 다 벗고, 목욕물 속에 그렇게 있는 건정말 못하겠다. 얼른 나와 물기를 씻고 옷을 입었다. 양말과 속옷 빨래도 하고 내려오려 했는데 그건 못했다. 내일 낮에 해야지 하고 미뤘다.
2층 은하씨 방으로 내려와 다른 분들에 대해 들은 상황이나 이것 저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잘 준비를 하고 지하 방공호로 내려갔다. 지하 방공호에서 하루 자 보았기 때문에 거기에 자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았다. 소년 마루완이 “기붐!” 하고 인사했고, 마루완의 형인 핫산이 ‘기붐!’ 하면서 까불며 인사했다.
구석진 침대. 방공호는 공기가 안 좋다. 하지만 7층 방에서 무서워 벌벌 떠는 것 보다는 방공호가 낫다.
구석 침대에 앉아 공책을 들고 짤막하게 일지를 적으려 하는데 하산이 다가와 아주 밝은 랜턴을 주고 갔다. 아주 친절한 소년이다. 장난기가 많고 까부는 소년이다.
방공호에는 나처럼 고층의 사람들이 내려와 자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알파나 호텔의 식구나 친척들이 대피와 있는 듯 하다. 하산과 마루완도 매니저의 조카들이라 했다. 하산이 가져다 준 랜턴을 보며 일지를 대충 적어 놓고 나서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자려고 1층에 올라가려 하는데 하산과 마루완이 무슨 놀이를 했다. 장기판이나 체스판 같은 것이다. 하산, 마루완 모두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해 주는 아이들이라 나도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았다. 녀석들 하는 걸 보면 나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앉아서 지켜 보았다.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말을 옮겨 다니면서 어떻게 하는 건데 그렇게 보고 있어서는 무언지 잘 모르겠다. 한 판이 끝났다. 하산이 이겼다. 나는 녀석들에게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마루완이 자리를 비켜 주고 하산과 둘이 하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장기처럼 어떻게 어떻게 말을 놓는데 그것부터 잘 모르겠다. 그 뒤에 주사위 둘을 던져 말을 움직여 간다. 주사위 두 개가 같은 수로 짝이 맞으면 말을 움직이는 걸 세 번 더 한다. 마치 우리 나라 윷놀이에서 윷이나 모가 나오면 한 번 더 던지는 것처럼 그런 보너스인가 보았다. 중간이 될 때까지 나는 감을 잘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하는 걸 두고 보니 어떻게 하는 줄을 알겠다. 나와 상대는 저마다 검은돌과 흰돌을 스무 개 정도씩 가지고 시작하는데, 내가 흰돌이라면 흰돌을 모두 나와 가까운 오른쪽 구석으로 나가게 해야 하는 거다. 마치 우리 윷놀이가 말을 다 나게 하는 것처럼.
아아, 알았다. 놀이 방법이 윷놀이와 거의 닮았다. 그렇게 닮아 있다는 것부터 신기했다.
놀이가 끝날 때쯤 파디(에프 발음 ‘파’)도 우리 곁으로 왔다. 내가 영어가 짧으니 파디와 하산, 마루완이 설명하느라 애를 쓴다. 처음에는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었는데 놀이 방법을 아니 그 말도 귀에 잘 들렸다. 응, 응. 알았어. 이해했어.
아이들 이름을 안 건 그 때다. 놀이를 마치고 일어나려 할 때 아이들은 나에게 ‘기붐!’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나는 아직 아이들 이름을 몰라 물어보았다. 가장 나이든 아이가 파디, 그 다음 뚱뚱하고 까부는 아이가 하산, 그 아래 안경을 끼고 범생처럼 생긴 아이가 마루완.
나는 하산이 자기 이름을 알려줄 때, 하산이냐고, 내가 아는 하산이 있다고. 그 때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슬리퍼에 대고 구두를 닦는 시늉을 하면서 구두닦이 소년 하산을 안다고 했다. 아마 내일 쯤이면 이 호텔 앞으로 그 애가 올 거라고. 내 친구라고, 내 어린 친구라고.
마지막으로 그 놀이의 이름을 물었다. ‘다울리’. 다울리 게임이다.
4월 4일
방공호는 해가 들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는 게 늦다. 아홉 시가 넘어 일어났다. 밤새 기침을 많이 했다. 또 목이 부어 있다. 소금 가글을 자주 해야겠다. 어서 일어나 움직여야지. 어제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허락받은 건 거기에서 먹고 자고 머물 수까지는 없지만 날마다 오전 오후로 아이들을 만나러 와서 봉사하는 건 좋다고 했다. 그것만 해도 쉽지 않은 허락이었다.
오전은 10시.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가려면 어서 아침 준비를 해야 했다. 7층에 올라가 씻고 나서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빵과 달걀 따위로 아침을 먹었다. 식당 안에는 다른 아이피티 회원들도 많다. 아직 이름들은 다 기억 못하겠다. 하지만 사흘 째 지내며 대부분 낯을 익혔다. 모두 친절하다.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지금껏 남아 있는 아이피티 회원 가운데 은하 씨와 내가 가장 어릴 것이다. (물론 나는 아이피티 회원은 아니지만)
아침을 먹는데 제이드가 오늘 바로 비자를 바꾸러 다녀오라 한다. 내 비자는 이라크 암만 대사가 직접 내준 휴먼쉴즈 비자.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알 하쉬미가 내어준 휴먼쉴즈 비자가 아니라 이라크 암만 대사가 휴먼쉴즈 비자 양식을 빌어 내준 것이기 때문에 당장 싸이트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여지가 있었다. 그 사정을 이야기하고 제이드에게 부탁하여 휴먼쉴즈가 아닌 다른 비자로 바꿀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그걸 오늘 가서 하라는 거다. 그런데 제이드는 그렇게 하려면 200달러가 필요하다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은하씨를 비롯 다른 아이피티 회원들도 너무 비싸다며 의아해하고 안타까워했다. 아무래도 제이드나 그쪽 사무실의 누가 뒷돈으로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비자 양식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했다. 아이피티 회장인 캐쉬 캘리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무래도 일단은 그렇게해서라도 비자를 바꾸는 게 좋겠다 했다.
캐쉬캘리에게 그 말을 물어보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 1차 입국 때 캐쉬캘리가 한국팀에 와서 강연 비슷한 간담회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때 정말 캐쉬에게 감동을 얻었다. 캐쉬와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참 영광스러웠다. 아주 따뜻하고, 소박한 할머니 모습 그대로다. 캐쉬는 나에게 네가 쓴 동화책을 읽고 싶다 말했고, 나는 가져 오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면 꼭 선물로 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캐쉬에게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캐쉬 또한 크게 웃으며 언제 시간 나면 그리 하자고 했다.
열 시. 은하씨는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로 갔고, 나는 제이드와 함께 비자 바꾸는 데로 가야했다. 해서 나는 오늘 오전은 미셔너리로 아이들을 만나러 가지 못한다.
비자를 바꾸는 사무실이 있는 시내 어느 곳. 제이드는 차가워 보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친절하다. 그리고 그 또한 어느 정도 인간미를 보인다. 그리고 내가 잘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에게 엥기는 건데 (이를 테면 한국에 있을 때도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 누구에게나 애교를 부리거나 마구 안기고, 어깨를 주무르고, 어린 양을 피우고 그런 것처럼) 제이드에게도 그랬다. 쫌 징그러워보일지 모르겠지만, 헤헤. 제이드에게 가서 손을 잡고, 팔짱을 끼면서 무어라 말을 걸기도 하고, 제이드가 무얼 허락해주거나 하면 기쁨을 크게 표시했다. 펄쩍 펄쩍 뛰면서, 만세를 하면서. 그런 모습에 제이드도 따뜻한, 다정한 웃음을 자주 보였고, 나는 제이드가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이라거나 우리를 통제하는 사람이라거나….. 어쨌든 전쟁통에도 사람들은 살아나가는 것이고, 아무리 감시와 통제의 구실을 맡은 사람들도 정을 주면 정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고,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니 말이다.
제이드가 나 대신 비자 서류를 다 써 주고 (제이드는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걸 아는데, 그 서류 쓰는 것도 괜히 내가 아주 못할 것처럼 했더니 자기가 대신 다 써주었다.) , 나는 끝내 휴먼쉴즈 비자에서 휴먼 워크 비자로 다시 받게 되었다. 기간은 한 달.
비자를 바꾸는 오전 사이에도 폭격은 계속 되었다. 솔직히 겁이 났다.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차에서 내려 그 사무실과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걷는 동안에도. 적어도 어젯밤까지는 밤에만 폭격이 심했는데 이제는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비자를 바꾸는 동안에도 커다란 미사일 폭격 소리와 폭발음이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폭격 소리가 한 번 들리면 땅이 흔들린다. 커다란 미사일이 터지면 더욱 크게 흔들린다.
비자 바꾸러 간 곳에는 많은 이라크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아니 몇 겹으로 에워싸고 차례를 기다렸다. 폭격음은 계속 들리고, 한 번 폭발음이 울리면 나는 나도 모르게 움추린 거북이 목이 되거나 순간 구부정 허리를 구부린다. 그러면 곁에 있던 이라크 사람들이 웃는다. 나도 웃는다.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나는 아임 어프레이드 오브 밤브 하면서 손짓으로 폭격이 무섭다 말한다. 이라크 인들 가운데는 누구도 나처럼 크게 놀라거나 목을 움추리지 않는다. 하지만 또다시 폭음 소리가 울리면나는 또다시 허리를 구부정 팔을 올린다.
열한 시. 비자를 바꾸고 돌아와 은하 씨 방, 207호로 들어왔다. 은하 씨가 오기 전까지 이 방 노트북을 잠깐 쓰려 했다. 나는 노트북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컴퓨터 쓰는 걸 거의포기하고 있었는데 어제 조성수 기자 위성통신으로 메일을 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짬이 나는 만큼이라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호텔에 정전이 잦으니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 사실 이번 이라크로 들어올 때는 완전 야전 생활을 할 거라 생각했고, 해서 짐을 꾸린 것도 그렇게 꾸린 것이다.
컴퓨터를 막 켜려할 때 은하 씨가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서 돌아왔다. 은하 씨는 오자 마자 아이피티 회의를 하러 옆 방으로 갔고, 나는 30분 정도 어제 일기를 요약해서 썼다.
열한 시 사십 분. 은하 씨 방으로 들어오고, 은하 씨에게 회의한 내용을 조금 듣고, 미셔너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조성수 기자가 207호로 찾아왔다. 또 이런 저런 이야기.
오후 한 시 삼십 분. 조성수 기자가 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호텔에는 다시 전기가 나갔다. 지금은 자가발전으로 전기를 쓰는데 낮이어서 아마 자체적으로 끊은 모양이었다. 오늘 일정은 오후 네 시 사십 오분 쯤에 다시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가는 것. 나는 7층 방으로 쉬러 올라갔다. 방에 올라가 몸을 누이고 있는데 폭격 소리는 여전히 심했다. 대낮인데도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깨부수는가, 도대체 얼마나 죽이는가.
누워 있다보니 싸이렌과 함께 무슨 음악 소리 같은 것이 크게 들렸다. 창밖을 내다 보니 총을 든 이라키 군이 차에 타고 시내를 다닌다. 아마 시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그러한 카 퍼레이드를 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폭음 소리가 계속된다. 저 가운데 하나가 이 건물에 떨어질지 모른다. 나는 이 건물 가장 높은 층에 있다. 잠을 잤다.
오후 세 시 삼십 분. 네 시 반쯤에 미셔너리로 가려면 그 전에 점심을 먹어 두어야지. 그래서 세 시 반에 같이 점심을 먹자고 은하 씨와 약속을 하고 있었다. 2층에 내려왔더니 은하 씨가 없다. 이리저리 찾았더니 한 아이피티 할머니가 은하 씨는 쉐라톤 호텔로 무얼 복사하러 갔다고 한다.
아, 그 전에도 은하 씨는 두 시에 팔레스타인 호텔에 가서 기자회견 하는 것을 좀 듣고 오겠다고 하기도 했다. (날마다 오후 두 시 팔레스타인 호텔에서는 기자회견을 한다. 은하 씨는 우리 한국인 두 명의 이름으로 무슨 성명이라면 좀 거창하고, 어떤 형식으로라도 입장 발표 같은 것을 하면 어떻겠느냐며 그런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온 것도 얼마 안 되고 해서 아직 좀 더 지켜 보아야 하겠다고 얘기했다.)
혼자 식당에 내려가 스파게티를 시켰다. 그런데 호텔 문 밖으로 오전까지 보이지 않던 구두닦이 아이들이 있다. (세이프, 알리, 하린, 그리고 그들보다 나이가 좀 많아보이는 ooo) 하산은 없다. 어제 아이들과 만날 때 하산이 보고 싶다며, 꼭 하산과 같이 오라 했는데 왜 하산은 오지 않았을까? 아이들에게 다시 물어보았는데 세이프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손짓을 하면서 자기와 같이 저쪽으로 가자고 한다. 안 돼, 안 된다고. 나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단 말이야. 답답하다. 짧은 영어와 손짓으로 그 애들에게 하산이 보고 싶다고, 호텔 앞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못알아듣는 건지 세이프는 자기와 같이 저쪽으로 가보자고만 한다. 아이 캔 낫 고 데어!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몸. 답답하다, 영어가 짧아 답답하다.
우리 얘기를 듣던 택시 기사 하나가 와서 무어라 말했다. 아마 하산네 집이 자기네 집과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영어로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하는데 자기가 가서 하산의 브라더를 데려오겠다는 것도 같고, 하산은 바그다드에서 멀리 가 있다는 것도 같다. 인 바그다드 파 어웨이 어쩌구 하는데 무슨 말인지 또렷이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산이 어디 먼 곳으로 갔나? 아, 나는 하산이 보고 싶은데, 만나고 싶은데. 우리 팀 사람들도 하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고들 했는데, 특히 혜란이는 하산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면서 혜란이가 부탁한 것이 하산을 만나 보고 싶어한다며, 잘 있으라고 꼭 전해달라 했는데. 부디, 내가 그이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기를…… 아니, 안전하다면 그 편이 낫다. 하산을 보고 싶은 건 내 욕심일 뿐. 바그다드는 위험하다. 그제 밤 800발의 폭격, 그리고 더 심하던 어젯 밤. 어젯 밤에도 나는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이 폭격에 하이달네 집이, 혹은 카심의 집이, 구두 닦는 아이들이, 혹은 국경 택시 정류장 앞의 모하메드네 집이, 또는 올드 바그다드의 아이들이…. 혹시, 설마. 이 밤, 저 폭격을 맞고 있지나 않을까…..?
택시 기사가 다시 이야기를 하는데 하산의 집에는 하산의 아버지, 어머니, 브라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산 혼자 바그다드를 떠났을리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전 말은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걸 거다. 아, 하산! 내일은 볼 수 있을까? 그 아이의 친구들 세이프, 알리, 하린이 하산을 데리고 올까?
오후 네 시 삼십 분. 무척 덥다. 은하씨가 서둘러 들어왔다. 아이피티에서 뽑은 프린트를 복사하러 팔레스타인으로 쉐라톤으로 다니며 한참을 기다렸다 했는데 결국 하지 못해 힘이 빠진 모양이다. 날은 푹푹 찌고 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점심도 못 먹었을 텐데.
바로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로 떠났다. 전쟁통인 바그다드에서 그곳에 가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아이들 방에 들어가자 마자 노라와 눈이 맞았다. 노라가 방싯 웃는다. 두 팔, 두 다리가 없는 아기. 우리 노라가 웃으니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도 마음대로 움직일 자유가 없다는 것도 순간 다 잊고 말았다.
아까 은하씨에게 듣기로 오전에는 아이들 낯빛이 무척 어두웠다고 했다. 노라도 자꾸만 울상을 했고, 오마르도 힘없는 얼굴을 했다고, 아이들 모두 불안해 했다고 말이다. 아이들은 알 것이다. 본능으로 알 것이다. 천둥 번개만 쳐도 아이들은 불안해 하고, 고양이나 개, 소 같은 짐승들도 겁을 먹기 마련인데, 이토록 많은 미사일과 포탄이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고 있으니 어찌 아이들이 모를까? 아까 오전, 아이들은 수녀님이 잠깐이라도 곁에 없으면 금세라도 울상을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후에 갔을 때 아이들은 달랐다. 노라는 그애 특유의 웃음을 방싯방싯 지으며 좋아했다. 한 쪽 구석 오마르 또한 기범! 하며 나를 불렀다.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 말을 잘 하는 아이. 내가 오마르에게 다가가니 오마르는 ‘아이 리멤버 유’라고 말을 했다. 감동. 나도 오마르의 얼굴을 감싸며 ‘아이 리멤버 오마르’ 하고 말했다.
노라와 눈을 맞추다가 나를 불러주는 오마르와 얘기를 하다가, 오마르가 내 손목에 찬 시계를 쥐고 싶어해 그 애에게 채워주며 놀다가, 무릎 걸음으로 다가와 관심을 보여 달라는 앤썸과 손짓으로 놀았다. 꾸아꾸아 (아, 꾸아꾸아는 내가 서울에서 ‘라파엘의 집’ 봉사자로 있을 때 거기에서 만나던 승기와 아주 많이 닮았다.)와 눈을 맞추고 얼굴을 만져주며 놀았다. 그리고 옆방으로 건너가 침대 난간을 붙잡고 서서 나를 쳐다보는 세이브 앞으로 갔다. 세이브와 그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맞추기는 처음이다. 워낙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가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로 한정되어 있으니 거기 아이들 모두에게 하나하나 눈길을 주는 게 어려웠다. 그랬으니 두 번째 방문부터는 낯을 익힌 아이부터 찾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만나게 되니 아직 눈길을 주지 못한 아이가 많다. 세이브 또한 그런 아이 가운데 하나였다. ‘세이브 미안, 내가 세이브를 몰랐네……’ 하며 세이브와 눈을 맞추고 놀았다. 세이브는 침대 난간을 붙잡은 채 몸을 앞뒤로, 고개를 흔들흔들 했다. 나도 세이브를 따라 몸을 앞뒤로, 고개를 흔들거렸다. 세이브가 웃으며 좋아했다. 나도 좋아 웃었다.
아이들과 놀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부엌으로 가 보았다. 어느 할머니 혼자 설거지를 하고 있다. 전쟁 전에는 못 보던 분인데 이번에 바그다드로 다시 와 미셔너리를 찾으니 이 할머니가 계속 와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같이 해도 되겠느냐 물은 뒤 할머니 곁에 섰다. 할머니가 세제로 그릇을 닦아주면 내가 그 곁에서 물로 헹궈냈다. 전에 떼르씨나 수녀와 그렇게 같이 설거지를 할 때도 참 좋았는데 오늘 함셋 할머니와 같이 하는 것도 참 좋았다. 할머니는 이름이 함셋이라고 했다. 메이슨이 자신의 딸이라 소개했다. 아아, 수녀님들 말고 보통 옷차림을 한 아가씨 한 명이 전부터 수녀님들과 같이 일을 했는데 아마 보육 교사나 보모 같은 직원으로 오가는 아가씨가 바로 메이슨인 모양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메이슨의 어머니인 함셋은 아마 전쟁을 맞은 뒤 딸이 일하는 그곳에 가 있으면서 허드렛 일을 돕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아이들 방으로 갔다. 세이브가 누운 침대의 옆 침대에 있는 아이, 하이달. (우리의 친구 하이달과 이름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공호에 있는 소년의 이름도 하이달이고..) 하이달도 홀로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이다. 스물 네 시간 꼼짝 없이 누워 있기만 하는 아이. 그러니 하이달과 같은 아이는 누가 와 있어도, 1미터 가까이까지 와 있는다 해도, 그이가 직접 관심을 가지고 하이달의 얼굴 위로 와서 고개 숙여 눈을 맞추지 않는 이상 전혀 볼 수가 없다. 하루 스무 네 시간을 꼭 그 침대만한 크기의 천장만 보면서 지내야 하는 아이. 이럴 때 하이달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침대 안에서나마 (한 평도 안 되는 침대이지만) 일어서고, 앉으며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낫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이달 침대 건너편의 알리, 그 곁의 앨리야르, 그 곁의 오마르, 또 그 곁의 오마르….. 은하 씨가 어제부터 이야기하던 아트마르에게 갔다. 은하 씨 말로 아트마르는 정말로 착한 아이라 했다. 어제 아이들 밥을 먹이는데, 손이 모자라 아이들을 다 챙기지 못하고 있는데 아트마르(세 살이 채 못되었을 아이)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꾸아꾸아에게 음식을 먹였다는 것이다. 아트마르 또한 건강한 아이가 아니어서 숟가락질을 한 번에 해 주지 못하고, 바닥에 흘리면 그걸 다시 집어서 꾸아꾸아에게 먹이려 하면서. 수녀님이 와서 아트마르에게 먹이려고 하니까 그 때에도 손가락으로 꾸아꾸아를 가리키며 꾸아꾸아를 생각했다. 꾸아꾸아는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 아이. 은하 씨는 그 장면을 두고 사진을 찍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갈등했다 했다. 수녀님은 그 안에서 절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여태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 안에서 사진을 찍은 일이 없다) 정말 그 장면은 은하씨가 본 생애 최고의 장면이었다며 말이다. 바깥에서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렇듯 전쟁을 일으키고, 폭탄을 퍼부우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데, 제 몸마저 불편한 장애 아이들이 서로의 입에 먹을 것을 떠 넣어주는 모습이라니…..
아트마르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첫눈에 스쳐 볼 때에 아트마르는 그리 예쁜 아이가 아니다. 입술이 바깥으로 말려 있는데다 입은 또 왜 그리 큰지. 얼굴에도 주름은 아니지만 살이 접혀서 보이는 볼우물 같은 자리가 군데 군데 있다. 그동안 아마 나는 그동안 세이브나 하이다르, 앨리야르 를 잘 몰랐던 것처럼 아티마르에게도 따로 눈길을 주어본 일이 거의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은하 씨의 말을 듣고 일부러 아티마르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와아, 얼마나 맑고 깊은 눈인가? 아트마르의 눈은 맑게 반짝였다. 아트마르의 속눈썹은 길었고, 아트마르의 살결은 아주 보드라웠다. 아트마르는 다른 아이들처럼 보채는 일이 없다. 다른 아이들처럼 손에 쥐는 대로 잡아 당기는 일이 없다. 다른 아이들처럼 산만하게 몸을 움직이는 법이 없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아트마르의 볼에 대고 뽀뽀를 했다. 아트마르는 까르르 웃는 게 아니라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다고 작게 웃은 것도 아니다. 얼굴이 확 펴지면서 아주 환하게 웃었다. 천사.
아트마르 뿐 아니라 미셔너리 안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천사다. 노라, 오마르, 재키, 두니아, 마르완, 낸씨, 하이다르, 세이브, 앨리야르……
시간이 다 되어 그만 나오려는데, 문 밖까지 나왔는데 오마르가 불렀다. ‘하이, 기범!’. ‘왜, 오마르? 오늘은 그만 가야해. 내일 만나.’ 그런데 오마르가 손가락으로 어느 쪽을 가리키며 ‘디스 원, 디스 원!’ 한다. 아아. 내 잠바. 오마르는 처음에 내가 들어가서 잠바를 어디에 벗어 두었는지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시간 때문에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나가니 잠바를 가져 가라고 그렇게 일러준 거였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아이, 목도 가누기가 힘든 아이, 우리 오마르.
그래, 이곳 바그다드에는 이 아이들의 삶이 있고 한 편에는 여전히 밤브, 밤브, 밤브! 하며 있는 대로 사람을 죽이며 전쟁을 벌이는 자들이 있다. 같은 곳, 같은 시간에!
알파나로 돌아오는 길. 날은 여전히 푹푹 찐다. 폭격 소리는 더욱 대단하다. 무심히 창밖에 눈을 두고 차를 타고 오는데 운전하는 아저씨가 놀라며 앞을 가리킨다. 대공포. 대공포를 우리 숙소 가까이까지 갖다 놓았다. 하늘에 헬기나 비행기가 뜨면 그것을 떨어뜨리기 위한 대공포. 긴장이 되었다.
저녁 여섯 시. 알 파나로 돌아오자 마자 은하씨는 바로 다른 아이피티 회원들 몇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바쁘게 가는 바람에 무슨 일인지조차 제대로 묻지 못했다. 나는 7층 숙소로 올라와 잠깐 누웠다. 잠깐 누우면 한꺼번에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오른다.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 지금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것은 잘못이라며 혼을 내며 말리던 바끼통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나에게 믿음을 보여주며 떠날 준비를 함께 해 주던 혁이 형, 상현이, 재일이….. 그리고 자기 대신 꼭 카심과 하이달, 하산을 만나 달라던 혜란이, 국경까지 왔다가 비자 때문에 눈물을 쏟아내던 하운이. 내가 떠나던 밤 한국에서 국회 앞 농성을 하며 전화를 주던 지원연대의 숙이 누나, 승로, 역균 형, 병수 아저씨….. 그리고 내가 여기에 와 만난 하이달과 카심, 미셔너리 아이들, 구두닦이 아이들…… 어머니, 아버지, 형, 기연이, 사랑하는 사람들.
살짝 잠이 들었는데 전화가 울려 깼다. 미셔너리에 태우고 갔던 택시 기사인데 10달라를 달라 한다. 그게 뒷돈으로 달라는 건지 아니면 내가 꼭 내야 하는 돈인지 몰라 일단 내려가겠다 했다.
오우, 하산! 하산이다. 드디어 만났다. 구두통은 매지 않고 맨 몸으로 호텔 앞에 와 있다. 하산, 하산! 나야. 기억하지? 코리아 피쓰팀! 하산은 고개를 끄덕였어. 녀석만의 그 아름다운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네가 보고 싶었다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나 뿐 아니라 우리 한국 팀 사람들 모두 너를 보고 싶어했다고. 혜란이. 혜란이 기억해? 미스터, 미스터 있잖아! 리틀 맨, 키가 요만한 리틀 맨. 카메라를 이렇게 들고 다니면서 찍던 혜란이. 하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혜란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한다고. 나는 디지털 사진기를 꺼내어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볼 수 있게 되돌렸다. 여기, 여기 이 사람이 바로 혜란이야. 리틀맨! 하산은 이제 더 또렷이 알겠는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래, 하산. 이 리틀맨이 너를 보고 싶어해. 지금 우리 한국팀은 요르단에 있고, 나 혼자 다시 들어오게 되었어.
나는 하산 앞에 쭈그려 앉아 얘기했다. 하산의 신발이 다 찢어진 게 눈에 들어왔다. 엄지 발가락이 다 나왔다. 하산은 전에 볼 때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 애에게 무얼 들려보내고 싶었다. 아, 그런데 2층 은하 씨 방열쇠가 없다. 거기에 가면 어제 미셔너리에 보내고도 조금 남은 비상식량이 좀 있는데, 그걸 하산에게 주고 싶은데 열쇠가 없다. 햄이며 참치 통조림들과 초콜릿, 땅콩, 그리고 물.
내가 하산과 이야기 하는 동안 옆에서 택시 기사가 통역을 해 주었다. 내가 영어를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내가 영어로 말을 하면 그걸 택시 기사가 아랍어로 옮겼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산하고 같이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7층 방에 올라갔다. 7층 방에는 내가 먹다 남긴 초콜렛 바 봉지가 하나 있다. 우선 그거라도 가져오고 싶었다. 그걸 가져 내려와 하산에게 주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당신 하산의 집을 안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일 나와 같이 하산의 집에 가 줄 수 있느냐? 하산의 집에 가고 싶다, 하산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하산의 집에 가고 싶다. 택시 기사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자기가 제이드에게 말을 해 주겠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아, 너무너무 흥분이 되어 어찌할 줄 몰랐다. 하여튼 내일을 기다릴 수 밖에. 내일 하산네 집에 가면 그 애의 식구들도 다 만날 수 있겠구나, 그 애의 집에도 들어가볼 수 있겠구나, 그 애가 사는 마을도 볼 수 있겠구나. 약속을 했다. 꼭꼭 약속을 했다. 혜란아, 이것 봐라. 약속 지켰다.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층 소파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택시 기사가 와서 10달라를 달라고 한다. 제이드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이 사람에게 10달라를 내야 하는지. 내라고 한다.
이곳 아이피티 회원들은 처음에 모두 900달라(한달 있을 것으로 예정)를 내고 지낸다. 그래서 숙박비도 그 안에서 처리하고, 움직일 때 드는 택시 값이나 비밀 경찰을 붙이고 다니는 값도 그 안에서 처리한다. 그 밖에 아이피티에서 마련해주는 비상 용품 같은 것도 그 값으로 치루는 것이다. 대신 이 호텔에서 아이피티 팀에는 혜택이 있다. 아이피티는 몇 년 전부터 이 호텔에 머물며 평화활동을 준비해왔으니 방 값도 거의 반 값이고, 택시 값이나 비밀 경찰에게 주는 돈은 공동으로 내니 더 싸게 든다. 그리고 이라크 당국에서 나온 제이드라는 사람은 아이피티 회원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사람이다. 안전을 보장해주는 만큼 그가 가하는 감시나 통제도 많다. 원래 안전 보장과 보호, 통제는 속 내용이 같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지금 정식 아이피티 회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휴먼쉴즈도 아닌 상태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자유롭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안전에 대한 보장은 없다.
어쨌건 나는 방값도 내가 따로 계산하고 (아이피티 회원의 두 배 값) 택시를 타고 나가 움직이면 그 돈도 내가 따로 낸다. 게다가 비밀 경찰을 데리고 나가야 하면 그 값 또한 내가 내야 한다. 방값은 하루에 22달러, 택시를 타는 값은 보통 하루에 10달러, 비밀 경찰을 데리고 움직이면 하루에 50달러 정도.
하지만 나는 휴먼쉴즈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된 것, 이곳 알파나에 머물며 아이피티와 어느 정도 활동을 같이 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 아니, 아주 잘 된 거라 생각한다. 비록 비자를 바꾸는 값으로 200달러를 내기는 했지만 비자를 바꾸어 준 것 만으로도 제이드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아예 캐쉬캘리를 비롯한 아이피티 사람들에게 말해서 나도 공동 경비로 500~600 달러 정도를 내고 정식 아이피티 회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부탁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당장은 이 처지가 오히려 나은 것도 같다. 적어도 나는 아이피티처럼 제이드의 통제를 엄격히 받는 것도 아니니 조금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돈의 문제로 보아도 우리가 당장 이 호텔에서 며칠이나 더 머물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내는 것보다야 조금 비싸더라도 하루하루 값을 치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제이드는 내게 택시 기사에게 10달러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이에게 10달러를 주었다. 그런데 그이가 얼마를 더 달라고 한다. 자기가 하산을 데려다 주었으니 돈을 달라는 것이다. 나는 낯빛을 바꾸어 싫다고 버텼다. 그런데도 그가 자꾸만 달라 한다. 그래서 얼마냐 물었더니 마음대로 하란다. 전쟁통인데, 이 사람도 고생 많이 하는데 주어야겠다 생각하고 2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5달러를 달란다. 온니 투 달러, 2달러만 주겠다고 했다. 3달러를 달란다. 2달러를 주었다.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은하 씨가 보이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은하 못 보았느냐고, 내 한국인 친구 못 보았느냐고 물어보아도 잘 모른다는 말만 한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다가 호텔 프런트에 이야기해서 207호 문 좀 열어달라고, 내 짐이 거기에 있으니 좀 열어 달라 부탁했다. 방에 들어가 기다릴 요량으로 컴퓨터를 켜고 공책에 쓴 일기를 옮기며 앉아 있었다. 여덟 시가 되었는데도 은하 씨가 오지 않는다. 여덟 시 이십 분이 되어도 은하 씨가 오지 않는다. 걱정이 되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나 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아, 그 사이 캐쉬캘리가 207호에 들어왔다. 은하 씨 방이라 문을 열고 있었더니 캐쉬가 지나다 나를 보고 들른 것이다. 캐쉬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꼬옥 안고 사진을 찍었다. 정말로 할머니다. 내 한 팔에도 다 안길 만큼 마르고 작은 할머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다. 사진을 찍고 났지만 그대로 안고 있고 싶었다, 정말.) 1층에도 없다. 식당은 곧 문을 닫을 것 같았다. 팔레스타인에 갔다가 이렇게 늦는 건가? 식당에 밥을 시켜 먹었다. 사람들은 다 먹고 나갔고, 나 혼자 식당에서 먹었다. 아, 고양이. 호텔의 고양이 녀석이 내 발 아래에 와서 야옹 야옹 울었다. 몇 숟갈을 떠서 바닥에 놓아주었다. 잘 먹는다. 야옹아, 너는 이 건물에 폭격이 있으면 어떻게 할래? 깜비 생각이 났다.
나는 이 호텔에 와서 가장 먼저 사귄 게 동물들인데 그게 바로 이 고양이와 앵무새 두 마리, 원숭이 한 마리이다. 그 가운데 원숭이가 가장 안 되었다. 아마 호텔의 문간방에는 매점 같은 게 있었나 본데 전쟁이 터지면서 그 주인이 짐을 싸서 도망갔다고 한다. 아마 코피(원숭이의 이름)는 그 매점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산 모양인데, 주인이 도망간 뒤 혼자 남았다. 그것도 새장 같은 조그만 철창살 안에 갇혀 있다. 코피는 하루종일 그 철창 안에 있다. 폭격이 쏟아지는 밤이나, 간간히 하늘과 땅이 울리는 낮이나 언제나 그 안에 있다.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두려울까 그리고 얼마나 외로울까? 가끔 아이피티 회원들이 코피를 들여다보고 먹을 것을 챙기곤 하지만 그건 잠깐이다. 폭격이 있으면 나도 무서워서 침대 밑으로 내려가고, 몸을 움추리고 하는데 아직 어린 원숭이인 코피는 얼마나 무서울까? 그런 불안함 때문인지, 혹은 사람에 대한 미움 때문인지 코피는 철망 가까이 다가가면 손을 뻗어 나꿔채려 한다. 그래서 이제는 다정하게 친해지기도 쉽지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동물은 앵무새인데 하나는 꾸꾸, 하나는 암바르이다. 둘 다 말을 어찌나 잘 하는지 어떤 때는 고양이 소리를 내고, 어떤 때는 영어로 무어라 무어라 한다. 나는 이 녀석들이 고양이 소리를 낼 때가 가장 신기하다. 이 녀석 둘은 식당 들머리에 놓여 있어서 사람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고, 잘 때에는 식당 직원이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는 둥 좀 호강을 받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솔직히 이 녀석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커다란 정이 미치지는 않는다.
그 다음 고양이. 얘의 이름은 아직 모른다. 검은 털과 흰 털이 섞여 있으니 그냥 얼룩이라고 할까? 얼룩이는 내가 이곳에 오는 첫날부터 친해졌다. 얼룩이는 사람들이 앉아 얘기하는 소파에도 아무렇게나 올라왔고, 찻잔을 놓는 상 위에도 훌쩍 올라가곤 했다. 턱을 만져주면 좋아하고, 머리를 만져주면 좋아하고, 발을 잡으려 하면 같이 장난하자고 까분다.
그러다 어제 저녁이던가? 보았다. 굉장히 큰 미사일 폭발음이 들릴 때, 그래서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릴 때 얼룩이가 겁에 질려 어느 구석으로 달아나던 모습을. 그래, 맞아. 너도 목숨이야. 나와 똑 같은 목숨이야. 도대체 이 전쟁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걸까? 얼룩이를 볼 때마다 깜비가 생각난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제이드가 보여 은하 못 보았냐고,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제이드가 정색을 하고 은하 씨는 떠났다고 한다. 깜짝 놀라, 이라크를 떠났느냐고 물으니 맞다고 한다. 왜, 그럴 리가 없는데 왜냐고 물으니 몸이 아파서 떠났다는 것이다. 내가 계속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있으니 지금 이 호텔에는 너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른 아이피티 회원들도 모두 떠났다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마음이 놓이며 이 사람 농담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으휴, 삐친 얼굴로 어깨를 치며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니 제이드가 하는 말이 은하는 지금 아이피티 사람들하고 같이 모여 미팅을 하고 있다고, 저녁 모임을 하고 있다는 거다. 다행이다. 그럼 거기에서 저녁을 먹겠구나. 나는 마음을 놓고 밥을 계속 먹었다.
밥을 먹는데 택시 기사 가운데 한 명인 모함마드가 살그머니 다가와 위스키나 맥주가 있느냐 물었다.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이가 술을 먹고 싶어하나 보았다. 나도 먹고 싶다. 나는 술이 없지만 있다면 나도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니 모함마드가 돈을 주면 자기가 나가 사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이에게 10달러를 주었다. 모함마드가 돌아오고, 같이 2층의은하씨 방으로 갔다. 술을 먹는 게 자유롭지 못하니 방에 가서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207호에 은하 씨가 있다. 은하 씨는 나를 찾느라 7층을 몇 번이나 올라갔다 왔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여덟 시 이십 분이 되기 전까지 바로 이 방에서 문까지 활짝 열어 놓은 채 컴퓨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은하 씨는 당연히 내가 7층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쪽만 찾아 본 거였고, 나는 은하 씨가 이 방으로 올 줄 알고 여기에서 기다린 거였다. 하여튼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니었으니 다행이다. 은하 씨는 아이피티 회원들과 한 방에 모여 밥을 짓고 샐러드를 만들어 함께 저녁 모임을 했다고 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으면 그런 모임에라도 데리고 가서 다른 분들하고 낯을 더 익힐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더 아쉬웠다.
모함마드 아저씨와 207호에 모여 맥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아저씨의 얘기를 들었는데 아저씨네 집도 폭격을 받아 오늘부터 이 호텔에서 지낸다고 했다. 6층에 있는 방. 집의 식구들은 다치지 않았고, 모두 100킬로미터 바깥으로 가 있다고 했다. 아, 아저씨의 집이 어디냐 물으니 ‘알다르’라고 했다. 알다르? 나는 지명을 들어 거기가 어디인지 몰랐는데 은하 씨는 들으니 딱 알았다. 거기가 바로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가 있는 곳이라고. 깜짝 놀랐다. 그랬구나. 정말로 폭격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내리 붓고 있구나. 이걸 정말 어쩌나…..
모함마드 아저씨는 상처가 많았다. 옷을 걷어 어깨를 보여주었는데 그곳에 관통상이 있다. 1년을 병원에 있었다 한다. 머리에 총상이 있다. 오른 쪽 손은 검지 손가락을 쓰지 못한다. 모두 전쟁 상처.
은하씨는 마틴 아저씨가 아이피티 회의한 내용을 따로 전할 게 있다 해서 올라갔고, 이제 방에 아저씨와 나 둘이 남았다. 은하 씨가 없으니 얘기를 길게 나누기도 어렵고 그저 ‘싸흐덱’ (우리말로 건배) 하면서 술을 마셨다. 내 비상 식량 중에 땅콩을 꺼내어 안주로 내 놓으니 아저씨가 좋아했다. 몇 차례 더 술을 마시다가 모함마드 아저씨에게 이라크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아저씨가 노래했다. 그 다음 아저씨가 나에게 불러 보라 해서 나도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아저씨 말로 오늘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로 탱크를 밀고 들어왔다는데, 이라크 군이 모두 물리쳤다 했다. 이라키 이즈 스트롱! 하면서 팔뚝에 힘을 주었다. 그 밖의 전쟁 상황은 잘 모르겠다. 어젯밤에는 얼마나 많은 폭격이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친 건지. 제이드도 모르겠다 하고, 이 아저씨도 모른다 한다. 술을 다 마시고 아저씨가 방으로 올라가는데 그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밤 열두 시. 잘 살펴 보니 방공호에 내려와 자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매니저의 식구나 친척들이다. 아이피티 회원 가운데에는 할머니 한 분(이름을 은하씨에게 들었는데 까먹었다. 예전 유니세프에서 오래 일했다는 할머니, un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고 나와 지금은 평화활동을 한다는…) 뿐이다. 그리고 나. 대부분 아이피티 회원들은 2, 3층에 있는 숙소 자기 방에서 자거나 침낭을 가지고 나와 2, 3층의 복도에서 잔다. 또는 마틴 아저씨처럼 이곳 알파나에는 5층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잠은 여기에서 가까운 안달로스 호텔의 2층방에 가서 자거나…. 방공호는 공기가 무척 안 좋다.
하여튼 방공호에는 거의 다 매니저의 식구 및 친척. 모두 친척 사이이니 서로들 아무 거리낌 없이 친한 게 그들만의 공간 같다.
나는 지하 방공호에서 맨 구석 침대를 쓴다. oo할머니는 가운데에 있는 침대. 할머니는 잠들기 전까지 보통 랜턴을 켜고 책을 읽는다. 나는 공책을 펴고 일지를 쓴다.
오늘도 어두운 방공호 안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쓰고 있었다. 컴퓨터가 없으니 공책에 대충 써서 짬이 나는 대로 은하씨의 노트북에 옮긴다. 처음에는 노트북이 없어 불편했지만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공책에 쓴 걸 그대로 보고 옮기니 빨리 쓸 수가 있고, 또 손으로 써서 옮기는 거니 글이 한정 없이 길어지는 나쁜 버릇을 절로 피하게 된다.
엎드려 일기를 쓰는 동안 지하 방공호에서도 폭격 소리를 계속 듣는다. 땅의 울림이 이곳 지하 방공호에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한 번은 무척 큰 미사일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몇 사람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일기를 다 쓰지 못하고 그만 자려고 1층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는데 파니가 나에게 ‘기붐’하고 부르며 지하에서 피워도 괜찮다 한다. 내 딴에는 지하가 가뜩이나 공기가 나쁘니 담배까지 피우면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에게 아주 안 좋겠어서 당연히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 나라에서는 그것조차 괜찮은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 나라의 담배 피우는 문화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방으로 내려오다가 하이다르에게 ‘다울리’ 게임을 같이 하자고 했다. 어제 구경하며 배운 그 게임이다. 하이다르는 여기(방공호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자는 방)는 사람들이 잠에 들었으니까 저쪽 방으로 가자 했다. 나는 이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는 줄 몰랐다. 방이라기 보다는 나무 판자로 간단하게 벽을 대고 문을 둔 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가 바닥에 깔려 있고 하산(뚱뚱한 애)가 라디오를 듣고 있다. 아하, 그 방은 파디를 비롯해 하산, 하이다르처럼 청년이나 청소년 또래의 남자 애들이 모여 자는 데인가 보았다.
그 방에서 다울리 게임을 시작했다. 아, 잠깐! 내가 사진기를 가져오겠다 하니 그 친구들 모두 좋아했다. 다울리를 하며 주사위를 던지는 사진을 찍었다. 그 친구들 마음이 모두 사진기로 가 있으니 게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워낙 이 쪽 사람들은 사진기만 보면 자기를 찍어달라 하기도 하고, 그게 디지털 사진기인 줄 알면 꼭 금방 찍고 난 걸 확인하고 싶어한다. 다울리 게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진을 더 찍었다. 하산이라는 뚱땡이가 워낙 까부는데다가 또래의 사내들이 있으니 아주 시끌시끌 웃게 되었다. 사진을 다 찍고 다시 넓은 방으로 나왔다. 나무로 뚝딱뚝딱 만든 상에 가서 그 위에 판을 놓고, 그 앞 걸상에 앉아 게임을 했다. 게임을 하는 내내 하산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소리를 내었고, 때때로 내가 그네들 말을 잘 못알아들을 때마다 더 재미난 분위기가 났다. 그 방공호에 있는 다른 식구들, 특히 여자 식구들까지 우리 쪽 노는 모습에 웃고 좋아했다. 실은 여자 분들 (특히 이 나라 여자 분들)에게는 말 건다는 게 어려워 많이 서먹했는데 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계기가 되어 편안하게 마주 웃거나 눈을 맞출 수 있게 되니 참 잘 되었다.
다울리 게임은 5전 3승제로 한다. 나는 세 판을 내리 졌다. 아무렴, 이 친구들이야 말을 놓는 것부터 아주 다른 걸. 주사위를 던지자 마자 어떤 말을 어떻게 움직이면 되는지가 동시에 떠오르는 모양이다. 반면 나는 더듬더듬 칸을 세고, 이리 저리 움직여보아 어떻게 말을 놓을까 한참을 헤매이는데. 오늘은 게임을 세 판이나 계속하면서 어제까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던 세부 규칙까지 잘 알게 되었다.
내가 하이다르와 게임을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파디가 자기랑 하자고 한다. 나는 이제 그만 자야 하니 내일 밤에 하자 했고, 파디는 여기도 폭격을 맞으면 내일 당장 이곳을 떠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며 오늘 하자고 졸랐다. 나는 자꾸만 내일로 미뤘고, 결국 파디하고는 내일 하기로 했다. 파디가 내 나이를 물었다. 서티 원. 나도 파디와 하산의 나이를 물었다. 파디는 25세, 하산은 18세. 아마 하이다르와 또 다른 사내애도 열 여덟 안팎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애들은 모두 하산의 친구들이니까.
파디는 내게 게임 규칙을 더 잘 설명해주고 싶어 애를 썼고, 이런 저런 관심을 더 보였다. 내가 영어를 별로 잘 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내가 알아듣기 쉽도록 천천히 설명해 준다거나 쉬운 단어만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파디는 주사위가 이곳 말로 자르(zar)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게 한국어로는 무어라 말하는지 물었다. 나는 ‘주사위’라고 가르쳐 주었다. 파디는 주사위의 숫자를 읽는 법도 알려 주려 했다. 그런데 그건 이라크 말이 아니라 이란 말이라 한다. 왜 그런 건지, 혹시 이 놀이의 뿌리가 이란에 있어서 그런 건가? 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 숫자 배우는 거는 내일 하기로 했다. 파디가 말로 설명해 주면 내가 공책에 받아 적겠다고.
한 시간을 넘게 놀았다. 우리가 노는 동안 방공호 식구들은 모두 자지 않고 우리 쪽을 쳐다 보았다. 하산이 우스갯 얘기를 하면 모두 까르르 웃고, 내가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어리둥절해 할 때에도 모두 크게 웃고….. 게임을 다 마치고 그만 내 침대로 오려는데 방공호 식구들이 모두 ‘굿나잇’이라고 인사를 했다. 오늘이 방공호에서 세 번째 자는 날인데 이렇게 인사를 주고 받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좋았다. 어제만 해도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며 어색해 했는데.
방공호 가운뎃 자리에 누운 아이피티 할머니도 누운 채로 아주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래저래 기분이 참 좋았다. 나는 말이 안 통해 이런 저런 얘기나 의논을 나누며 사람들을 사귈 수 없는 게 참 어려웠는데 이렇게 놀이를 하며 친해지게 되니 무척 좋았다. 내가 여기에 온 건 고작 닷새밖에 안 되었지만, 이 호텔에 머무는 평화활동가들 중에서는 그대로 내가 가장 방공호 식구들과 가까워진 것 같다.
나는 다시 구석 자리 침대로 돌아와 초를 켜고 공책을 폈다. 일기를 쓰고 있다. 파디를 비롯한 그 친구들은 아까 내가 들어갔다 나온 방으로 모두 들어갔다. 그 방에서 지금 들려나오는 소리를 보니 아마 그 방에서는 다울리 게임을 계속 하고 있는 모양이다.
폭격은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곳 아이들과 친해졌고, 그렇게 누군가와 친해진 마음으로 있을 때는 마음이 많이 놓인다. 졸리다, 졸리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겠지? 죄없는 목숨들이 죽어간다. 그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 기도로 함께 싸운다……
(이 파일은 franks@hanmail.net (바끼통 운영자)에게도 보내어 주세요.)
그리고 제게 급하게 연락주실 내용은 이걸 보내는 사람의 메일 주소- 아마 조성수 기자의 주소일텐데 – 로 보내주세요. 그러면 조 기자님이 확인해서 읽어보고 제게 말로 전해주시거나 할 거예요.
저는 잘 있어요.
지원연대, 바끼통 모두 힘드시지요?
힘 내세요.
조금 있으면 하산네 집에 갑니다. 얏호!)
그리고 지금 시간 4월 5일 18:49(바그다드 시간, 한국 시간 23:49)
다시 쉐라톤 호텔의 조성수 기자 방에 왔다.
일하고 있는데 방해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다.
움직일 때마다 제이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제이드가 없어서 택시 드라이버에게 말을 하고 은하 씨와 걸어왔다. 아주 가까운 거리이지만 시내를 걷는다는 게 이렇게 좋다니.
오늘 하산네 집에는 가지 못했다. 그제보다는 어제,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욱 폭격이 심해지면서, 그리고 바그다드 시내의 바깥쪽부터 미군과 교전이 있으면서 더욱 위험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제이드가 하산네 집에 다녀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로는 민간인 가정을 방문하면 안 된다는 까닭이라는데, 지난 번 하이달네 집과 카심네 집에 갈 때는 괜찮지 않았나? 내가 몇 번이고 졸라보았지만 제이드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 바깥이 위험하니 보내지 않는 모양이다. 하산의 집을 아는 택시 드라이버에게 내일 하산을 데리고 호텔로 오면 그 때 선물을 전해주라는 것이다. 비상식량 남은 것을 모아 한 상자 정도 만든 것과 물을 주려 했는데…. 하산네 집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게 되어 안타깝다.
오후에는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다녀왔고, 이제 쉐라톤 호텔로 온 것이다.
이제는 폭격 소리 뿐 아니라, 따발총 소리도 많이 난다.
(아참, 조 기자님이 그러는데 바끼통이 다음 기획으로 올라가잖아요. 그게 처음에는 조기자님에게 제안 들어온 거였대요. 그 때는 한 달에 100만원 준다고 하면서 일기 정도를 보내달라는 제안이었는데 조기자님이 안한다 한 거고요. 아마 그러던 중에 다음 까페에 바끼통이 있으니까 그걸로 기획을 채운 것 같은데 (물론 저에게 양해해 달라는 메일이 오기는 했었어요.) 저야 뭐 돈을 달라고 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고요. 하여튼 조기자님이 그 얘기를 듣더니 돈을 받으라 하네요. 그런 건 당연한 거라고. 어차피 거기도 돈을 버는 회사이니…. 그래서 다음 쪽에 담당자와 이야기해서 그런 값을 요구하고, 그것으로 난민구호 기금으로 보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조기자님 말씀 듣고 급하게 쓰는 거예요.
앞으로 메일을 얼마나 더 보낼 수 있을지, 얼마나 자주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때가 많으니 컴퓨터를 쓰는 것부터가 그렇고, 워드로 친다 해도 위성 통신으로 인터넷을 하시는 조기자님에게 얼마나 자주 부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여기에 쓴 하루 치의 일상을 보면 대충 이곳 생활을 그리실 수 있을 거예요.
아참. 저도 모르던 건데요. 저는 일단 휴먼쉴즈 비자였고, 제이드가 제 이름을 휴먼쉴즈에서 빼돌린 거래요. 그렇다고 아이피티 회원이 된 건 아니고 제이드가 직접 관리하는 외국인이라는 거지요. 그것과 관련해서는 아주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더 많이 쓰고 싶은데 은하씨도 써야 해요.
이만 마칠게요.
아주 많이들 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많이요.
지금 교전 중이다. 강 건너 편. 기관총 소리와 수류탄 소리가 들린다. 무척 많이 들린다.
어제부터 저녁 여섯 시 이후 통행금지 상황인 줄 몰랐다. 지금 일곱 시 삼십 분.
은하 씨와 같이 알파나로 가야 한다. 길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미사일이나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폭탄은 없고, 지금은 교전 중.
헬기가 뜨고 있다.
상황이 그리 심각한 줄 모르고, 평소의 폭음 소리인 줄 알았는데
조기자님이 다른 곳에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 전해 준 이야기이다.
바로 티그리스 강 건너 저 편.
첫댓글 박기범님 글 중에서 <다음 미디어>에 관련한 부분이 나오는데요, <다음 미디어>에서 후원금으로 200만원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