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 건축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입찰을 통해 건축업자와 합법적인 계약을 했지만 이번 경우는 너무나 작은 공사이고, 이 두 사람은 믿을 만 해서 그런 공식절차를 밟지 않았다. 나 역시 돈과 시간이 없어서 무어라고 말할 처리도 못되었다. 그냥 그들의 재량에 맡기기로 했다. 이미 베버씨에게 나의 구상을 자세히 말했고 대략적인 설계도까지 그려 주었다. 그도 재차 나의 구상을 확인했다. 그는 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선에서 건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와 조선인 청부업자는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내가 현장에 오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들을 믿으라고 했다. 공사 중에 한번 화진포에 다녀오는 것이 옳은 일이었지만 병원 일이 바빠서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용케 시간을 얻어서 우리의 작은 오막살이 별장을 보러 현장에 내려갔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그냥 놀라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경악의 상태였다. 나는 벙어리처럼 입을 벌린 채 한마디도 못하고 서 있었다. 베버씨와 조선인 청부업자는 자기들의 창작물에 대해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어찌나 자랑스러워하고 스스로 만족해하는지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것은 잔혹한 일일 것 같아 더욱 내 심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우리의 별장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조그만 막사가 아니라 작은 성(城)이었다. 회색 돌로 지은 성(城)은 뒤의 푸른 나무숲과 잘 어울렸다. 라인강 가에 있는 성들의 모양과 다를 것이 없었다. 베버씨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독일의 성(城)을 온 정성을 다해 재현한 것이었다. 성의 지붕은 평평해서 그 위에 올라서면 사방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달빛을 받으며 파티를 연다면 안성마춤일 것이다. 둥글고 큰 탑에는 들창이 달려 있었는데 베버씨는 특히 이 부분의 설계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마치 성의 귀부인이 이곳에서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설계한 것 같았다. 탑은 바로 암벽 옆에 세워져 있어서 바다의 전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마치 배를 타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부인께서 큰 파티를 열 때는 이 넓은 리빙 룸을 쓰시면 됩니다."
베버씨는 한쪽에는 들창들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큰 벽난로가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하며 말했다. 벽난로는 동굴 속에서 채취해 온 수정(水晶) 암석으로 쌓아져 있었다. 그는 벽난로가 얼마나 불을 잘 빨아 들이는지 보여 주려고 불을 붙였다. 춤추는 듯한 불꽃은 벽난로에 붙어 있는 수정(水晶)에 현란하게 반사되었다. 베버씨는 한발 물러서서 감상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베버씨와 조선 청부업자가 자신들의 대작품을 자부심과 기쁨에 차서 나에게 보여 주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내게 닥쳐올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이 내게 청구할 엄청난 계산서를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내 잘못으로 빚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공사의 내용을 명확히 명시한 문서계약을 만들어 놓지 않았던 탓이 아닌가? 하지만 조그만 막사 같은 별장을 짓는데 무슨 계약서가 필요했단 말인가? 베버씨가 내 공상의 집 보다 이토록 잘 지을 줄이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 두사람의 뛰어난 건축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너무 기가 질려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얼마입니까?"
나는 또 한번 놀랐다. 그들이 청구한 액수는 생각보다 너무나 적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아무튼 나는 현금이 없었다. 어찌하든 이 궁지는 내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니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들에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베버씨는 내가 매우 만족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나 나는 허둥지둥 대답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돈이 없어서 궁지에 몰렸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내 나름의 처방이 있었다. 내 개인적인 경우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근검생활을 선교사업과 관계된 일은 특별히 각처에 원조를 청하는 방법을 써왔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이 곤경은 어느 방법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나는 더욱 난감했던 것이다. 아무리 근검절약해도 이 큰 계산서를 처리할 수는 없다. 선교사업과는 달라서 별장 문제로 남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할 수는 없지 않는가.
며칠 동안 걱정에 싸여 멍한 상태로 지내는데 갑자기 소년 때의 평양 친구였던 수잔 로(Susan Roe)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머니 병원의 간호원장이었데 지금은 은퇴해 있었다. 그녀의 동생인 루시는 미국 금광의 책임자의 결혼했었다. 나는 당장 평양으로 가서 내 곤경을 의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항상 금전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능숙했었다.
내가 평양에 도착하자 수잔은 반색을 하며 맞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에게 전보를 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오다니 참 반가워요. 이제 그 일을 결정할 수 가 있겠네" "아니 무슨 일인데요?"
"왜 당신 소유로 있는 땅이 있잖아요. 쓰지 않고 있는 평양의 대지 말예요"
내가 놀라는 것을 보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동생 루시가 말이지요. 자기네 광산회사에서 광산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필요한데 당신의 그 땅이 위치로 보나 크기로 보아서 가장 적당하다는군요. 값만 적당하면 현금 지불을 하고 싶답니다."
나는 부동산 시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으나 베버씨와 조선인 청부업자에게 주어야 할 액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금액을 이야기했다. 수잔이 생각하기에도 값이 광산회사에서 만족할 수 있는 가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여 내 곤경은 해결되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수잔과 루시에게도 감사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해주에 돌아왔다. 드디어 성(城)값을 다 지불할 수 있었으니 우리들의 기쁨은 참으로 컸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아버지 몫으로 들었던 생명보험금이 내 앞으로 나왔던 일이 있었다. 소년 때 그 돈을 투자하여 벽돌집을 지어서 선교사 주택으로 임대업을 했을 때 거기서 나온 돈은 내 대학교육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매우 값이 싼 땅을 구입했었다. 훗날 결혼하여 혹시 아이들이 생기면 그 교육비에 충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투자했던 것이다. 그 땅이 애들 교육비 대신 성(城)값으로 쓰여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친구들과 함께 이 성에서 몇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전쟁이란 소용돌이는 곧 우리의 성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몇 장의 사진과 메리안이 그렸던 유화뿐이다. 그러나 그곳의 즐거운 추억들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름다운 성(城)의 아름다운 몇 몇 추억들은....
※ 닥터 셔우드 홀의 자전적 글을 통해 1937년 최초로 만들어진 별장의 유래를 알 수 있다. 1940년 여름휴가를 끝으로 닥터 셔우드 홀의 별장은 주인을 잃게 되었고, 1945년 해방과 동시 김일성 정권의 치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차례 김일성과 가족들이 이곳을 휴양소로 이용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평양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와서 원산에서 다시 동해북부선 기차를 타고 초도역에서 내려 짚차를 이용해 별장을 찾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