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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의 출현(페르시아)
위대한 말이 곧 왕을 만든다는 말, 이는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역사가 이를 말하고 있다. 앗시리아는 강력한 기병대 병력이 전쟁을 이기는 데에 뿐 아니라 영토를 정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군사 조직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페르시아는 그 선례를 이어 받아 중동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들의 군대를 보다 더 강력한 기병대 병력으로 만든다. 그들의 주적인 그리스인들은 효과적인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근방에서 중무장한 보병-장갑 보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군대조직은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전쟁을 이기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는 매우 능력 있는 기병대를 가지고 있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땅의 우세한 세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바뀌었다. 마케도니아는 이미 입증된 장갑보병의 전통에 효율적인 기병대를 추가하였다. 이런 변화가 군대를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였고 아마도 고대의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자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즉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마케도니아로 이어지는 글 여정이 아닐까 싶다.
페르시아는 여러 개의 페르시아인 부족과 이란인 부족으로서 현재 이란의 중남부에서 세력을 형성하였고 사이러스 2세(사이러스 대제라고도 알려짐) 아래에서 통합되었다. 사이러스는 정복을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다툴 상대가 없는 현재의 중동 땅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BC 550년 메데스를 정복하였고 그들을 아시리아인의 후예로 바꾸었다. 바빌로니아, 리디아 그리고 이집트는 사이러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에게 함락되었다.
페르시아 인은 지금의 이란인의 조상으로 인도-유럽 어족에 속한다. 그들은 중앙 아시아 지방에서 이란 고원으로 옮겨와 유목 생활을 하였으므로 기마술에 능하여 강한 전투력을 지녔었다. 기원전 525년에 오리엔트의 통일을 완성한 페르시아는 정복 사업을 계속하여, 다리우스 대왕 때에는 지중해 연안에서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하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중앙 집권적인 통치 제도를 마련하였다. 곧 전국을 20개의 주(州)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각 주에 총독(사트라프)을 두어 행정을 맡기고, 왕에게 직속된 감독관이 지방을 순찰하면서 이를 감시하였다. 또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국도를 만들고, 곳곳에 역마를 두어 교통과 통신의 신속을 기하였다. 이리하여 제국의 기초가 튼튼해지고, 상업과 문화 교류도 활발해졌다.
한편 페르시아는 아시리아와는 달리 이민족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썼다. 그들에게는 공납만 부과했을 뿐, 그 밖에는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페르시아 인은 그들 고유의 종교인 조로아스터 교를 믿었으나, 이민족에게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멸망할 때까지 200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다리우스 1세 장군은 BC 522년 이집트에서 페르시아로 여행을 하는 도중 사망한 캄비세스를 대체하였다. BC 516년 전 지역을 아우른 후 다리우스는 아나톨리아에서의 반란을 지원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곡물을 주지 않기로 하는 총체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씨디아인들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비록 다리우스의 원정은 실패했지만,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대한 추후 작전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앗시리아와 코카사스 산을 건너온 대초원의 기수에게서 이어진 전통인 기병대가 페르시아 군대의 중심이었다. 기병대의 비율과 숫자는 명백히 페르시아 군대조직 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무기였다. 마도니우스 휘하의 페르시아 군대는 고원의 전투에서 50,000명의 보병과 10,000기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알렉산더와 교전한 페르시아 군의 기병도 30,000이나 되었다. 구아가멜라에서는 페르시아 기병대가 40,000기 이상이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 대한 전투에서 페르시아 기병대는 실로 강력하고 위험한 아주 위협적인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중동에서 그들의 적을 빠르게 정복하는 주특기를 갖고 있었다. 활과 창, 가벼운 갑옷으로 무장한 만능의 기병대는 광활한 중동의 공간을 거치는 전쟁뿐 아니라 정복한 여러 도시, 땅과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이상적으로 적합하였다. 그로 비교적 작은 기병대 파견으로 넓은 땅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제국에 대한 이상적인 수비대이며 경찰력이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제국 내부에서 발생한 분쟁 지역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근접전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의외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지배력을 얻기 위해 유럽으로 확장 시도를 할 무렵 군대 조직과 기병대는 쇠퇴하게 된다.
활과 창으로 무장한 페르시아의 그리스로의 진출에 있어서는 두 가지 난관이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지형이었다. 바위가 많고 산이 많은 그리스의 지형은 기병대가 작전 및 전술을 수행하기 어렵게 하였다. 작전 측면에서 그리스 지형은 많은 페르시아 기병대가 특정한 그리스 도시로 진군하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군의 접근로와 습격할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의 전략상, 거친 지형으로 그리스군은 강이나 경사가 심한 산허리 같은 자연스러운 장애물에 접한 위치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공격 당하기 쉬운 지역을 완전하게 커버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은 툭 터진 지형에서 기병대에 의한 측면 공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기병대를 좌절시킨 또 다른 요인은 그리스 보병이었다. 훈련되고 중무장된 장갑보병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헬멧과 신체를 가리는 갑옷, 정강이를 가리는 갑옷과 큰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밀집한 진형을 구축하는데 군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겹겹이 열을 지어 방패로 가려진 왼손이 자기만 방어할 뿐 아니라 그의 왼쪽에 서있는 군인의 오른쪽도 방어하였다. 밀집 진형의 취약 지역 두 군데는 후면과 측면이다, 그러나 경험 있는 지휘관은 이런 각도에서 공격 받지 않는 전투 지형을 골라 전투를 하였다. 장갑보병의 결점은 그들이 기동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거칠고 험한 지형에서는 아주 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과 방어 진형, 그리고 훈련된 장갑보병은 궁수의 계속되는 공격을 막아내고 사실상 기병대가 전면에서 공격하거나 덜 훈련된 보병으로부터 공격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중동을 지배한 페르시아의 기동력의 원천인 페르시아 말들은 어떠했을까. 페르시아는 비교적 효율적인 군사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조직에서 필수적인 것은 수만의 기병을 공급하고 수개월 동안 전쟁터에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것이다. 그로 효율적인 말을 보급하는 네트웍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페르시아는 물류 계통을 위해 조직적인 말 기르기와 최소한 세 가지의 말 종류로 구성된 구매 프로그램을 생각해 냈다. 이 중에 두 종류는 현대의 말 사육과 관련이 있다.
페르시아는 여러 가지의 말 보급 방법이 있었는데 이 방법은 고대의 모든 군대에 모델이 되었다. 봉신과 연합군 지역이 첫 번째 말 보급의 원천이었다. 이들 왕국과 영토들, 미디아(이라크와 이란), 이집트,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우라투(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 군에게 예비용 말을 제공할 뿐 아니라 교대용 말을 제공하였다. 이 방식은 종전의 앗시리아의 전통적인 공물 관계로 계승 받은 것이다. 특별히 잘 길러지고 길들여진 말은 고대에서 아주 귀중한 상품이었다. 식민지는 매년 공물과 세금을 말로서 지불하였다. 이 공물은 특별히 식민지에서 페르시아산 말의 품질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경우 특히 우대하였다.
둘째, 말 공급원은 전쟁터였다. 고대의 전투에서 승리한 편은 버려진 무기와 말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만일 기병대가 말 안장 없는 말을 타는 경우에는 전투에서 말을 잃는 경우가 흔하였다. 그리하여 승리한 쪽은 잘 훈련된 기병대 말을 보상금으로 얻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귀중한 약탈물에 대한 유혹은 전사 각각에게 주요한 유인책이 되었다. 잡아온 말을 모으고, 분류하고 배분하는 일은 전투가 끝나고 수행하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말을 공급하는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교역을 통하는 것이다. 말 무역상들은 보통 적어도 일시적으로 좋은 관계에 있는 왕국들 간의 중개자로 일을 했다. 관리들은 그들의 말에 대한 구매 사양을 정하고 가격을 흥정했다. 말 무역상은 그의 조수와 함께, 스키타이 또는 박트리아(Bactria) 같은 지역으로 말을 구매하러 여행을 하였다. 이런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비교적 적은 규모이고 페르시아 군의 대규모 수요를 맞출 수는 없었다.
최종적으로 중요 말 공급원은 특히 군용으로 토종마를 키우는 것이었다. 말 농장은 개인적인 사업이거나 왕국에 의해 운영되는 왕립 농장이었다. 바빌론 총독이 운영하는 개인 말 농장은 16,000 마리의 암말과 800 마리의 종마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 말 농장은 전쟁 물자를 군대에 공급하는 대단위 사업이었다. 아르메니아 총독의 개인 말 농장은 매년 20,000 마리의 망아지를 페르시아 왕에게 보냈고 그들의 개인 기병대에도 공급했다.
페르시아군은 그들의 군대를 무장하기 위해 전국의 공급원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기병대에는 여러 종의 특별한 말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산 가벼운 말과 스키타이산 일반용 중형 말, 격렬한 전투용으로 중앙 페르시아 제국산 말이 있었다. 아르메니아산 말은 3 종류 중에서 가장 작은 말이었고 현대 기준에서도 매우 작은 말이었다. 그것은 현대 품종의 뿌리가 된 고대의 타입(type)에서 이미 거론한 유형 4번째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당시 시대를 산 저술가 크세노폰(기원전 430년경 ~ 354년경), 그가 남긴 기록이 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를 훑자면 한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다. 그가 쓴 〈소아시아 원정기 Anabasis〉는 고대 문학 비평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라틴 문학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역사편찬). 그는 아테네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크세노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규모 전쟁(BC 431~404)을 벌이던 시절에 성장하여, 아테네 기병대의 정예부대에 복무했다. 그를 비롯하여 유복한 그의 동시대인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고, 그들이 속한 사회의 극단적인 민주주의 체제에 비판적이었으며, BC 411, BC 404년에 잠시 권력을 잡은 우익 혁명가들에 동조했다.
BC 401년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다시 확립되자, 크세노폰은 외국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BC 399년 소크라테스가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자, 극단적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더욱 깊어졌다. 몇 년 뒤에는 그 자신도 반역자로 추방되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경험은 페르시아 왕자 키루스에게 고용된 그리스 용병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용병으로 복무했지만, 키루스가 죽은 뒤에는 '만인대'(萬人隊)라고 부르는 그리스 군대의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키루스가 죽었을 때 고국에서 1,500㎞ 떨어진 곳에 있던 이 부대를 이끌고 이민족과 계속 싸우면서 낯선 땅 쿠르디스탄과 아르메니아 지역을 지나, BC 400년초 마침내 흑해 연안에 있는 그리스 도시 트라페주스(지금의 터키 트라브존)에 도착했다. 그의 책 〈소아시아 원정기〉의 바탕이 된 이 위업은 젊은 그에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후 그는 불가리아에서 트라키아 군주를 위해 복무했고, 그 다음에는 소아시아에서 스파르타의 지휘를 받아 싸웠는데, 그는 여기서 만난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를 가장 존경하게 되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BC 396~394년 대군을 지휘하여 페르시아와 싸웠다. 크세노폰은 아게실라오스 2세의 참모로 활약했고, 아게실라오스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국가들의 동맹군을 쳐부순 코로네아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그는 아게실라오스와 함께 델포이로 가서, 아폴론 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아테네인들의 금고에 넣었다. 아테네가 그를 추방한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그의 추방은 아무래도 코르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 임금 아게실라오스 2세 밑에서 아테나와 싸웠고 한때는 페르시아를 위하여 복무했을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등 다른 이유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크세노픈의 두상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와 아게실라오스에게 깊이 관련하여 계속 아게실라오스를 섬겼다. 그 보답으로 그는 우선 스파르타에 있는 저택 1채를 받았고, 그 다음에는 올림피아 근처의 스킬루스에 있는 영지를 받았다. 행복한 결혼을 해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그는 수입과 여가가 충분했기 때문에, 사냥을 즐기고 현지의 젠트리를 대접하고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위한 신전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다. BC 371년 크세노폰은 코린트에서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테베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을 때 아테네는 그에 대한 추방령을 철회했고, 그는 BC 365년경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테네 사회에서 옛날과 같은 생활을 다시 시작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소 비판적이었고, 그의 두 아들은 그가 속해 있던 기병 연대에 입대했다. 크세노폰은 BC 355년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평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방법과 수단 Ways and Means〉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아마 그의 마지막 저술일 것이다. 그는 대단히 잘생긴 사람이었다고 하며, 대리석으로 조각한 그의 두상 복제품 2개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아무튼 크세노폰은 그 말을 ‘페르시아산 말보다 작지만 아주 더 정교하게 사육된 품종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유명한 페르시아 왕궁의 유적인 페르세폴리스의 계단 벽화에 다리우스 황제가 마차를 끌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 말은 현재 아주 희귀한 카스피안 말의 조상일지도 모른다. 현대의 카스피안 말은 1965년 북 이란의 카스피 해 남쪽 해안에서 야생으로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겨우 50 마리 정도의 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말 혈통에 대한 사육 프로그램이 지구상에 활발히 진행 된다. 카스피 종은 매우 작았지만 조랑말 포니는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카스피 종은 매력적이고 매우 강건했다. 현대의 기준에 의하면 카스피 종은 군용으로는 부적합한 크기였으나 고대에서는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몽고종도 비슷한 크기이며, 군용으로 적절한 혈통이라는 서술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의 남자 기수는 현대의 기수보다 가볍고 덩치가 작았다. 현대의 카스피 종 말은 약 140 파운드 정도의 기수를 태우는데 문제가 없었고 놀랄만한 인내력이 있었다. 다시 발견되었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은 이 말을 짐 싣는 동물로서 사용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경기병대와 가벼운 갑옷을 입고 말 타는 궁수들은 작은 카스피 종 말을 사용했다. 페르시아 군대에서 발견된 둘째로 중요한 말은 스카타이 종 말이었다.
이 말은 박트리아와 우라투의 총독의 공물, 스키타이와 전투 및 교역을 통해 페르시아의 소유가 되었다. 이 말은 타입-3, 중앙아시아종 말로서 투란 평원(현재의 이란, 러시아, 투르크메니스탄 및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카스피 해와 아리아해 가운데 있는) 출생 산이다. 기원전 300년경 잘 보존된 말의 유물이 스키타이의 파지릭(Pazyryk) 왕의 무덤에서 나왔다. 알타이의 사얀 산맥(Sayan mountain은 중국,러시아 국경을 거쳐 카차흐스탄 국경까지 이어진다.)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이는 중국 몽고 러시아 그리고 카자흐스탄 경계를 의미한다. 바로 초원 스텝지역이다. 이는 흉노와의 연계를 또 말하고도 있는 것이다.
페르세 폴리스의 말 ( 페르시아 수도)
밀집보병전법인 팔랑스(phalan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