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 소재 영국 식민주 13곳이 독립을 선언했다. 실제 독립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783년 9월 3일에 이루어지지만, 미국인들은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생각한다.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국가의 구성원이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민’들이 더러 있는 우리나라의 ‘신기’한 형편을 생각할 때, 미국인들의 당당한 역사의식은 본받을 만한 모범으로 여겨진다.
‘신기’라는 표현은 영조 임금이 남겼다. 대구의 丘가 공자[孔丘]의 이름자이므로 邱로 바꾸어야 마땅하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영조는 “근래에 유생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와 같은가[近者儒生之務爲新奇]?”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의 말은 왜 엉뚱한 생각에 젖어 있느냐는 꾸짖음이었다. 하지만 대구 사람들은 어명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大丘를 大邱로 바꾸었다. 무심코 大丘를 사용하던 사람은 아마도 지역 사회에서 ‘인간 소외’를 당했으리라.
독립을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소설 〈상록수〉를 남긴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강렬하고 선명한 시의 외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심훈은 독립을 못 보고 타계했다. 전염병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불과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그저 5∼60대까지만 생존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가 바뀌었을 텐데 …….
〈상록수〉에 나오는 브나로드[v narod]운동은 1874년 이래 러시아의 청년 지식인들이 사회개혁을 목표로 벌인 농촌계몽활동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은 물론 당사자인 농민들의 외면을 당해 실패로 끝났다.
〈상록수〉의 실존인물 최용신도 일제의 탄압으로 샘골강습소 운영이 어려워졌을 때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라는 호소문을 언론에 게재하면서까지 후원을 요청했지만 사회의 호응은 냉담했고, 그는 만 25세 6개월 나이로 숨졌다.
“만용을 부리는 자는 용기 있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비웃고, 비겁한 자는 용기 있는 사람에게 만용을 부린다고 비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아, 아! 대한민국!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대한민국에는, 총칼로 무장한 의열 독립운동가에서부터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까지 모두를 싸잡아 만용의 인물로 여기는 ‘국민’이 너무 많다.
어디 그뿐인가? 말과 글로는 독립지사와 최용신을 존경하고, 밤에는 그 반대 행태를 일삼는 ‘지식인’들도 한둘이 아니다. 누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브나로드 운동을 좀 펼쳐야겠다. 하기야 곧 외면을 받을 테니 무슨 소용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