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시화전 원고 모음입니다.
2023 시화전 원고
정운기 (3편)
눈데미에는 쉼이 있다
가배 한 잔에
수고로운 퇴근을 담아
오늘을 입고픈으로
치유하여 보세요
와온의 해지개를 잡고
석양 트럼펫을
귀고픈하면서
오늘의 앙금을 세족 하세요
숙우熟盂가 서녘에 걸려있습니다
공사 중
걸작품으로 태어난
당신
삶은 공사 중이오니
공구 탓만 하지 말고
까팡이로도
퍼즐게임하면서
도두 보는 언어를 만드소서
준공 때까지
대답하며 살기
네가 누구냐
묻지 않기 때문에
참나는 매몰되고
자기 점검보다
낮은 곳의 소리만 높아진다
질문에 답하지 않고 살기에
십자가는 점점 멀어지고
가짜만 고물가 되었으니
퇴고하며 살게 하소서
허 근 (2편)
뼈 시린 理由
하현달처럼 허전하다
지나간 구덩이 마다 흔적 남는다
부족하고 모자랐던 기억
내 곁에 왔던 사람들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런지
해맑은 꽃으로, 따르는 논병아리로
그 많던 군무
어디론가 떠나갔다
부서지는 햇살 너머로
숲 속의 천사
산 길 언덕 위 작은 도토리나무 옆에
야생 고추냉이 꽃 소롯이 피어 있다
들리는 소리 하나 없다
사람들은 덥다고 바다로 떠나고
계곡 물에 발 담그는 데 달아오르는 우주
신비한 꽃대는 굴뚝처럼 높다랗게 올라와
방울방울 목이 긴 기린이다
나 또한 저 꽃 모양으로 하늘을 본다
'하얀나비' 한 마리 날아오고 있었다
안철수 (3편)
울타리 나무
-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상처를 껴안고
단단히 어깨를 맞대고
아프게 서 있는 나무
뚜렷한 경계를 긋는 일은
다름을 용서하지 않는 것
웃자랄 수 없어
키를 맞추고 살아야 하는
정해진 틀 속에 갇힌
울타리 나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아집과 편견의 틀에 맞춰야 살아남는
슬퍼도 웃어야 하는 우리는
이 땅에 서 있는 우리는
모두 울타리 나무다.
함께 가는 길
비 온 뒤
키 큰 코스모스
바닥에 꼬꾸라져 있다
거센 비바람도 아닌데
저리 쓰러진 것은
홀로 외롭기 때문이다
혼자 가는 길은 멀다
흔들리는 것은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
함께 있어야 부러지지 않는다
함께 흔들리고 함께 휘어지고
함께 웃고 함께 울어야 한다.
새벽 별
돌아오는 이보다
떠나는 이가 더 많은 새벽,
바라보는 눈빛에
별 하나가 집니다.
세월의 간격을 넘어
기다림으로 지는 별,
행여 그대인가 싶어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김종화 (2편)
풀베기
무자비한
용사가 되어
인해전술로 밀려드는
수많은 적의
목을 베노라
적이란
그저
무찌르기 위해
부여된
저들의 목숨명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매화가 피고
개나리가 핀 다음
복사꽃 벚꽃이 피던
봄날은 가고
이제
순차도 없이
일시에 비명을 지르는
카오스의 봄날이 간다
박귀주 (2편)
사이렌
내가 사이렌을 울리면
아이들은 좁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온다.
또, 사이렌을 울리면
아이들은 밀폐된 공간으로 숨는다.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몇몇 아이들이 압사하고
몇몇 아이들은 질식한다.
나는 비로소 전쟁이 죽이는 수보다
사이렌 소리로 죽여버린 아이들의 수가
더 많음을 알았다.
쌍계사 벚꽃길
봄비에 젖어 단이슬 가득
살빛으로 피어난 육십 고목이
카르페 디엠 만개한 웃음
춘심에 겨워 신방에 들다
최영숙 (2편)
가야 꽃물결
칠면초 갈대 춤사위 따라 철새 노니는
순천만 갈밭길 품은 노월마을 돌아서서
한결같은 솔섬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가슴에 와닿은 그리운 이들 떠올리고
유유자적 꽃길 시름없이 거닐다 보면
마음 빈자리 꽃향기로 채워지누나
황홀한 노을이 발길 멈추게 할 즈음
가야무대 수려한 꽃물결 새롭게 안겨와
놀빛 금파 타고 홀연히 선정에 든다
하얀 나비
평행선 유지하며
공허한 빈자리
여린 날개 흔들며
갈망하던 그님
내려놓은 대가
자유와 평온 얻었다
이광숙 (2편)
호스피스 병동에서
오래 묵힌 씨 간장 같은
마음 그립고 그립다
붉안한 심박수, 작은 흐느낌
서러움은 발효되어 쌓이고
두 손 모은 간절함으로
밤을 새워보지만
지극한 염원담아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호스피스 병동에서2
비가 나립니다
가뭄 끝 단비였다지만
제겐 그저 야속하기 그지없는
세찬 비바람 일 뿐입니다
하연없이 눈물 나립니다
사나운 비바람 흔들리는
심전도 그래프
놀란 가슴 쿵쿵거리는데
당신은 먼 길 가신다합니다
바라오니
간절히 바라오니
부디 사나운 빗길일랑
잠시 피했다 가시옵소서
바람 길 / 손미경
바람에 꽃비 쏱아져
나뭇가지 사이로 사뿐 내린다
이름모를 새 한 마리
푸른 말로 재잘거리며 입을 뗀다
연두빛 옷을 입은 바람이 인다
노란 설레임으로 걷는
청산도의 푸른 봄
싱그런 바람이 내 뒤를
따라 올 것 같은 길...
손미경 (3편)
바람 길
바람에 꽃비 쏱아져
나뭇가지 사이로 사뿐 내린다
이름모를 새 한 마리
푸른 말로 재잘거리며 입을 뗀다
연두빛 옷을 입은 바람이 인다
노란 설레임으로 걷는
청산도의 푸른 봄
싱그런 바람이 내 뒤를
따라 올 것 같은 길...
오월의 숲
오월의 햇살이
살포시 이파리에 내려 앉아
아이 좋아라 깔깔거린다
숲은 소녀처럼 수줍어 한다.
봄날엔 바람, 꽃, 새, 벌, 나비
나무가 즐겁다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앉는다.
서재에서
책이란 바다에 빠져
퐁당퐁당 표류하다가
끝없이 몰려오는
검은 활자의 물결에 부대끼는데
밤의 살빛이 나를 포근히 감싼다
마치 저멀리 수평선 끝에
푸른 뭍이 보인다
격랑의 이랑으로 비쳐오는
눈부신 빛
뭍으로 향하려던
내안의 해일(亥日)이었다
박명희 (2편)
고양이가 있는 저녁
호수공원 도서관 옆 산책길
잘 휘어진 활처럼 웅크린
아무렇게 무연한 황백묘(黃白猫)
사람들 어둑하게 집을 향해가는 저녁
길고양이의 고독한 응시는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난겨울에도, 지금 푸른 오월에도
왜 궁금하다
가끔은
해지면 열리는 미술관 관람도 하겠지
‘에드워드 호퍼전’이 아님을 아쉬워하면서
시시로 떠오르는 상념들
도시의 인공광 불빛에서
숨은 쥐들과 숨 가쁜 추격 뒤끝
고요는 적막하다
봄도 밤도 황백묘도 그대로이고
빛과 어둠의 교차점을
고독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은
나인가
그사람 그런 사람
만나고 싶다
그사람
수만리 장천을 날아와
깃들어 쉬어갈
소나무 같은
앉은뱅이 꽃처럼 낮아
속빈 듯 훤히 거울 같은
쇳날 같이
아찔하게 예리한 눈빛
꼭다문 침묵
매웠을 세월의 찬바람도
찬란한
그사람
그런 사람
장 진 (2편)
쉬어가세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니
기대어 잠시 쉬어가세
태풍 같은 세태에 휩쓸려
혼절하지 않으려니 참으로 버겁네
멈춰선 지친 영혼들
바람결이 품은 위로의 노래
서로의 숨결 들으며 잠시 쉬어가세
그리고 손잡고 일어나
함께 나아가세
나의 정원
나의 정원 주인은
햇살과 바람과 물입니다
과해도 부족해도 탈이 납니다
초록 생명들과의 사랑은
매일이 밀당입니다
이옥재 (2편)
화신(花信)
벚꽃 몇 송이
봄내 치열하게 시달렸던
삶의 끝자락을 잡고 있고
벚나무 아래 숨 죽이고 있던
철쭉이 비죽비죽
연분홍 꽃잎을 수줍게 내밀다
개복숭꽃 흐드러지게 피지만
달디 단 열매 맺기 글렀으니
눈으로만 호강하리
등나무꽃 요염한 향이
화엄사 아래 식당촌을 감싸 돌아
식객들의 후각을 어지럽히고
산벚향기 알 듯 모를 듯
연기암 문수보살 앞 피워 올린 향과
어우러져 노고단 허리를 감아 오른다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요량으로
시줏기와 옮기던 스님을 도와
기와 몇 장 옮기려 했더니 손사래를 친다
가는 저 것
봄이나 어찌 해보라는 뜻인가 보다
네가 붙들고 있는 것
그것부터 내려 놓으라는 뜻인가보다.
세월호
– 목포에서
뭍으로 올라왔어도 상처 뿐이구나
치미는 분노이며 슬픔이구나
길가 노란 개나리 발랄한데
철조망에 노란 리본 처절하구나
어미 마음처럼
찢기고 또 찢겼구나
윤명숙 (2편)
명화정
하얀 비단을 끝없이 펼치며
선녀를 기다리는 너
한 방울 한 방울을 눈물로 만들며
수없는 나날을 하루처럼 기다리면서도
원망도 슬픔도 없는 너
텃밭
가을 끝자락에
노란색으로 변해가던 잎들
어제저녁 아궁이에서
타버린 나뭇가지 잔해를
뿌려주는 엄니 손길을 아는지
텃밭 푸성귀는 참 잘도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