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에서 일어서자!
강 대 춘
내 아들, 강원중이가 3살 때 자폐아 진단을 받고 난 후 지내온 일그러진 내 삶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통스러웠던 당시에는 하루 온 종일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뿐이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아이교육을 막연히 시작하려니 앞이 꽉 막혔다. 아들의 사회성을 조금이라도 싹을 틔우려면 사람들 속에 섞이게 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집단이 없었다. 결국 그래도 봉사정신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종교계 쪽으로 생각이 갔다. 평소 친근감이 있던 불교 쪽을 찾아보니 만만치 않았다. 그 다음에는 친한 친구가 열심히 다니고 있는 조그만 동네 교회를 기웃거렸다. 친구의 말로는 원중이가 교회에 나오면 그래도 가족 같은 조그만 교회에서 교인들이 나름 어여삐 봐주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그 용강동에 있는 성문교회에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조금 다니다가 그만 둔 교회에 갑자기 나가 보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래저래 미루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그 성문교회의 일요일 아침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날 목사님으로 부터 성경 속의 좋은 말씀을 들었다.
연못의 물이 동할 때 그 연못 속에 들어가면 온갖 질병이 낫는다는 ‘베데스다연못’ 가에 38년 동안 장애와 질병으로 시달리는 병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연못 물이 동할 때 물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으나 혼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관계로 항상 남에게 그 차례를 빼앗기고 말았다. 저 물에만 들어가면 병이 나을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그 병자를 물로 데려 가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예수가 나타나서 그에게 물었다. "네 병이 낫기를 원하느냐?" 그 병자가 말했다. 제발 저 연못 물 속으로 나를 좀 데려가 달라고........만왕의 왕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가 앞에 서 있음에도 그 병자는 여전히 ‘베데스다연못’의 물만 생각하더란다. 예수는 그 병자를 바로 낫게 하시고 그 병자는 이제는 스스로 걸어서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성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단다. 설교를 마치면서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베데스다에서 일어서자!"
혹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진실로 필요한 것들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연못’같은 다른 곳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들은 어쩌면 남의 말만 듣고, 소문만 듣고, 또 여태까지 그래 왔으니까 그렇게 한다는 식의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이라는 심한 선입관과 편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해결책은 바로 우리 앞에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까?
내 아들, 원중이가 진단받고 40일이 되었지만 우리 가족은 수많은 생각들을 했다. 가장 진지하게 검토했던 것이 아내와 원중이의 캐나다 이민이었다. 그 외에도 교육시설이 많은 서울로의 이사, 이직 등 많은 것을 생각해봤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베데스다연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들은 진정한 해결책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다른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해결책은 ‘사랑’인 것 같다. 사랑은 온유하며 평안하며 위대한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랑의 위대함은 공자의 仁이나 석가모니의 자비, 예수의 사랑에서 언급되어 수많은 시공간의 검증을 거치면서 진리 중 진리로 입증되지 않았던가? 무척이나 선하게도 보이는 목사님과 1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신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교회 문을 나서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따라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기만 했다.
지나고 보니 어쩌면 아이의 장애에는 나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IMF 때 철저하게 망가졌다. 금전대출 보증 선 것이 다섯 군데가 한꺼번에 터져서 집과 현금, 그리고 교원공제회 연금까지 다 털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고교교사였던 내가 담임을 맡고 있던 우리 반의 어느 학부형의 도움으로 산속의 전원주택을 빌려 살았다. 처음에는 ‘많은 나쁜 것 중에는 좋은 것도 더러 섞여있다’는 옛말을 믿으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았다. 처음 배우게 된 농사도 즐거웠고 늘 몸이 허약했던 셋째 딸도 멀리 학교로 걸어 다니다 보니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리고 운이 좋아 팔자에도 없던 아들을 그 산속의 주택에서 얻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까지가 불행 중 행복이 진행됐던 과정이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원중이다. 숲속의 전원주택에서 큰 솥을 걸어놓고 시끌벅적하게 동네잔치를 벌인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원중이의 육아는 그 조용한 산속에서 이루어졌다. 한가한 생활과 조용히 음악이나 듣고 독서나 하는 아내의 취향은 집을 더욱 조용하게 만들었으며 원중이는 늘 누워서 손만 빨고 있었다. 아무런 자극도 없이. 그 뒤 어느 아파트 건설업을 하는 친구의 배려로 경주 외곽지역인 건천에 있는 한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고 재정적으로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가정을 다시 설계하며 아내와 나는 새로운 기분으로 늘 시내의 주점으로 돌아다녔다. 아이가 자폐아라는 사실을 모른 체. 그렇게 건천의 아파트에서 원중이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1년을 별 다른 조치가 없이 조용히 방치되었던 것이다.
나는 원중이의 현재의 상태가 선천적이든 뇌 이상이든 뭐든 간에 나와 아내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중이가 진단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날 즈음에 우리는 아이교육을 위하여 정신없이 움직였다. 잠시라도 아이를 가만두지 말고 계속 가르치고 자극을 주라는 것이 조기 특수교육의 골자였으니 밤낮없이 아이와 씨름했다. 원중이는 우리가 늘 교육시키고 끌고 다니고 하여 보기 흉할 정도로 살이 빠졌다. 그 한 달 동안에 원중이가 달라진 것은 혼자서 숟가락질하며 서툴지만 밥을 먹는 것, 병에 든 주스를 자기가 컵에 부어 마시는 것, 신발에 억지로 발을 끼우는 것 등등의 신변정리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교육시킨다고 아이가 一般化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지난 1년간을 돌아보면 원중이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암담한 현실이었다. 학습이 잘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당시에 밤늦게 까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밤에는 별로 갈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에 밖에 나가면 현란한 네온사인에 아이의 눈이 거의 환각에 빠져 넋이 나간 아이처럼 빙빙 돌아갔다. 그 모습이 보기가 끔찍할 정도였다. 차차 어떤 방법이 생기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당시 주변사람들이 아이의 장애인 등록을 권유했을 때 우리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아이가 장애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형님의 설득으로 장애자 등록신청을 했지만 신청서에 붙은 원중이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나왔다. 장애자가 되어 국가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받고 또 그것이 권리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저 원중이를 세상에 있는 그대로 내놓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장애가 있으니 잘 이해해 주시고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를 교회에 데리고 나간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 ‘발달장애자 1급’의 판정을 받고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IQ는 50이라고 적혀있었고. 아무 말 없이 경주로 돌아온 아내와 나는 술집에 들어가 한참 술을 퍼 마셨다. 취기가 좀 돌 때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그저 씩 웃고 말았다. 옆에서 원중이는 강냉이 박상을 쉴 새 없이 주워 먹고 있었다.
이제 원중이는 고교를 졸업하고 강동면에 있는 한 복지시설에 다니고 있다. 아내는 원중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에 자신의 인생을 아이 때문에 망칠 수 없다며 집을 떠나버렸지만 이제는 예전의 고통스런 기억들도 거의 다 사라졌다. 원중이는 여전히 1급 자페성 장애인이지만 나와 세 딸들은 그 상태를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늙어서 사라진 뒤의 문제도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놓았다. 실제로 원중이로 인해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지만 나름 그 덕분에 방종하지 않아서 좋은 면도 있다. 지나고 보니 아들이 장애인이 되는 바람에 나는 그동안 몰랐던 부분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또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사회복지 분야에서 그렇다. ‘사회복지’란 사회구성원이 기존 사회제도를 통하여 자신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어려움이 예상될 때,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조직화된 사회적 활동의 총체이다. 이제 나이가 든 세 딸들이 모두 집을 떠났지만 나는 부족한 아들과 둘이서 이 고향에서 살아가면서 이 사회로부터 우리가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 도움을 받고, 또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발 벗고 나서는 복지의 기본적인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 누구든지 경주 용강동 승삼마을에 오면 나와 내 아들이 같이 동네 골목을 거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나름대로 행복하다. 행복은 내 마음에 달려 있으니까.